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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7  20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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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번역의 과제와 해법 모색

 

 

 

이승우(도서출판 길 기획실장)

 

2019. 11.


 

 

 

현재 학술번역, 더 나아가 인문 출판은 황금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연구 인력은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비롯한 학술 분야의 번역 인력 또한 그 어느 때보다 폭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때로는 아주 지엽적인 분야에까지 전공 연구자가 있어 번역 출판문화가 우리보다 훨씬 앞선 일본에서조차 번역되지 않은 책들이 국내에서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된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으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아마도 노태우 정부 당시, 1989년 1월 1일부로 시행된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아닐까 한다. 그 이전 시기에는 외국에 나간다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이 시기부터 해외여행뿐만 아니라 학문 연구를 위한 ‘유학’(留學)도 한결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이 시기에 해외 유학을 떠난 세대가 흔히 말하는 ‘베이비붐 세대’와 일치하게 되어 그 숫자 면에서도 유학생 수는 그 이전 시기에 비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아시아권에서 한때 일본이 해외 유학을 가장 많이 나간 시절이 있었다면, 그 바통을 한국이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1980년대 후반부터 (넓게 잡아) 2010년대 후반까지 약 10~20여 년 동안 해외 유학을 떠난 한국 학생 수는 가히 폭발적 증가세를 보였다(현재는 한국을 이어 중국이 전 세계 주요 대학 유학생 수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당시 독일의 한 도시에 수십 명에서 때로는 100여 명 가까이 한국 유학생이 있었다고 할 정도이니, 전 세계로 학문 연구를 위해 유학을 떠난 규모는 방대했을 것이다.

 

2019년 현재, 그 연구 인력이 대학 사회는 물론 각 연구기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인문학은 지금이 가장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호기(好機)라고 볼 수도 있다. 서양철학 분야만을 한정해서 살펴보더라도, 1990년대 이전 시기에는 고대철학이나 중세철학 분야 전공자가 무척 적었고 대부분 번역되어 있던 고전들도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重譯)한 것이었다면, 최근 경향은 희랍어와 라틴어까지 습득한 전공자에 의한 번역이 우리 학계를 한층 풍성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점은 주지의 사실임이 분명하다.

 

특히나 플라톤(Platon)이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등 대가급 철학자 중심의 연구 경향에서 벗어나 중세 후기 분야를 전공하거나 앞선 철학자들보다는 덜 알려진 철학자에 대한 연구나 철학사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서양철학 전반의 흐름을 폭넓게 이해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학계의 이러한 경향에 발맞춰 출판계에서도 기존 번역본이 있다고 하더라도, 최신 전공자에 의한 새로운 번역본을 펴냄 ― 특히 중역(重譯)의 폐단을 방지하면서 ― 으로써 독자들에게 한층 새로운 정보와 학문적 결과물을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낙관할 수 없는 향후 10년, 그리고 그 이후의 미래상

 

하지만 현재의 이러한 상황은 향후 10년 이내에 급속한 연구 인력 축소 및 장기적인 학령 아동의 축소로 인한 위축 요인을 안고 있기 때문에 낙관적으로 미래를 맞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이러한 사태는 최근 대학 사회의 급속한 구조조정 분위기로 인해 더욱 암울해져가고 있다. 그렇다면 향후 암울하게 전개될 학술번역 문제를 어떻게 개선해나거나 최소한 현상유지라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현상유지도 매우 힘겨운 상황이 되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솔직히 앞선다. 무엇보다 연구 인력의 급속한 축소가 당장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기 때문이다. 1998년 시행된 학부제의 폐해로 인해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도 특히 문(文)·사(史)·철(哲)을 다루는 학문 분야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철학 분야만 살펴보더라도 헤겔학회나 칸트학회 등 주요 학회에 40대 이하 젊은 연구자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즉 학문후속세대가 끊어진 상태이다. 향후 10~20년 정도가 지나면 현재의 풍부한 연구 인력은 학부제 세대에 의해 교체될 터인데, 인적 숫자의 축소는 명약관화해 보인다(이와 더불어 한국연구재단 등재지 위주의 학술 논문 ― 물론 이에는 순기능적 요소도 분명히 있다 ― 양산과 번역출판에 대한 연구 평점 미부여 등 많은 요소들이 학술번역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개선의 모색점: 정책적 대안과 출판에 대한 인식 제고

 

이러한 상황을 앞에 두고 솔직히 획기적인 개선책을 제시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는 제도적 차원의 개선책 마련이나 위기의식의 공감대 형성에 따른 학계와 출판계의 공동 대응이 그나마 모색해 볼 수 있는 사안이 아닐까 본다.

 

우선 제도적 차원이라 함은 민간 영역인 출판사에서의 학술번역이 아니라 정부 차원의 학술번역에 대한 개선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대표적으로 한국연구재단 내의 ‘동서양고전명저번역사업’을 비롯해 출판과 관련한 다수의 학술정책이 그것이다. 한국연구재단의 주요 사업에는 시간강사를 비롯해 비정규직 교수들에 대한 처우개선 사업 등 다양한 학술 연구 인력 관련 정책이 시행되고 있는데, 특히나 몇몇 사업들은 직접적으로 출판과 연계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연구재단 내에 이른바 ‘출판’을 아는 직원이 단 한 명도 없는 점은 학술정책을 시행하는 기관으로서는 분명 치명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동서양명저번역사업’만 하더라도 한국연구재단 내에 출판을 아는 직원이 없는 관계로 편집과 제작 등 책과 관련된 제반 요소들이 완벽한 품질로 만들어졌는지를 판별할 수 없는 실정이다. 번역자 선정에서부터 최종 번역 결과물까지의 출판 이전 단계는 비교적 엄밀한 검증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정작 그 마지막 결과물인 ‘책’에 대해서는 어떠한 검증 장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검증할 인적 구성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더 큰 시야에서 보자면, 현재 ‘동서양고전명저사업’으로 선정되고 있는 목록들이 과연‘고전급’ 반열에 들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부터 시작해, 민간 출판 영역에서 충분히 번역·출판할 수 있는 책들까지 사업영역에 둠으로써 과연 이것이 ‘국가’ 사업의 취지에 합당한지도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다. 적어도 ‘국가’ 사업이라고 한다면 민간 출판사들이 할 수 없는 방대한 분량의 고전번역 사업에 우선적으로 무게중심을 두고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 역사가인 리비우스(Livius)나 폴리비우스(Polybius)가 남긴 역사서들 같이 민간 출판사가 하기에는 힘든 고전들 말이다. 이와 같이 각 학문영역별로 선정위원회 ― 학회 차원의 구성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 를 구성해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한결 수월하게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각별히 어떤 책을 우선순위로 두고 번역사업을 전개해 나갈 것인지와 관련해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향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절대적인 연구 인력이 급속히 축소된다는 점이다. 즉 번역해야 할 학술고전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인적 자원은 급속도로 그 규모가 줄어들 것이기에 현재의 전문 연구 인력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이 사업과 연계할지도 적극적인 고민거리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결함들은 결국 한국연구재단이 상당한 기간과 국가 예산을 투입해 많은 동서양 고전들을 번역·출판했지만, 과연 전체 기획 의도에 맞게 시리즈의 위상이 정립되었는지를 묻는다면 많은 연구자나 학술출판 관계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이는 1980~90년대 대우그룹의 재정지원을 통해 민음사에서 출판한 ‘대우학술총서’와 단순 비교만 해보더라도 분명히 드러난다.

 

즉 ‘동서양고전명저사업’의 경우, ‘국가’ 사업이라는 취지에 걸맞은 위상을 갖추려면 기획 단계에서부터 뿐만 아니라 최종 결과물인 ‘책’에 이르기까지 촘촘한 검증 체계를 갖추어야 하며, 아울러 민간 출판사에서 번역 기획하기 힘든 대형 프로젝트를 우선순위로 두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출판’ 실무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필요하며,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출판 관련 업무가 발생할 때마다 적어도 ‘옵서버(observer)’ 형식으로라도 참여할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궁극적인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번역 기획 단계부터 출판 관계자가 참여하여 최종 결과물인 ‘책’에 이르기까지 출판 실무자의 경험이 자연스레 녹아들어갈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큰 틀에서 보면 출판을 하청으로 보는 인식부터 고쳐야

 

끝으로 학계나 한국연구재단(정부 당국), 그리고 출판계 공히 인식 전환이 시급히 요구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출판을 ‘하청’(下請)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출판계에 종사하는 편집자들까지도 자연스레 몸에 밴 행태가 되고 말았다. 먼저 정부에서 시행하는 학술과 출판이 연계된 거의 대부분의 사업에서 출판은 언제나 하청 취급을 받고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한국연구재단의 ‘동서양고전명저번역사업’에서도 출판 관계자는 최종 결과물인 번역물이 주어졌을 때 그제서야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책이 기획되고 그 책들이 전체 한국연구재단의 사업에서 갖는 위치 등 국가사업에 걸맞은 위상 속에서 출판 관계자의 참여로 책이 만들어져야만 하는데, 출판 관계자는 단순히 ‘제작비’만 받고 책을 ‘납품’하면 끝인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오로지 최종 결과물인 번역원고와 그 번역자와의 편집 과정이 유일한 개입이며, 그것 역시 현재의 출판 행태 속에서 올곧게 수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지금은 폐지된 한국연구재단의 인문저술지원사업 역시 마찬가지 구조로 되어 있다. 각 연구자에게는 연구비로 3,000만원을 지급했는데, 거기에는 출판 비용이 빠져 있다. 오롯이 저술 기획 단계에서부터 최종 결과물인 원고가 나오기까지의 비용이 책정되어 있는 것인데, 따라서 각 연구자는 자신의 최종 결과물을 민간 출판사를 통해 알음알음 펴내야 하는 실정이었다. 즉 ‘국가’가 개입해 이루어지고 있는 ‘책’과 결부된 대부분의 학술 정책과 사업에서 최종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출판 분야’는 어떠한 정책적 지원이나 배려가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단순 ‘하청’ 수준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인문/사회 학술 분야의 연구자들도 책을 ‘편집’하는 행위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실정인데, 이는 곧 출판 행위(특히 ‘편집 과정’)를 단순히 연구자의 보조 인력 내지 보조 행위 정도로만 보는 인식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편집자의 교정과 교열이 책을 만드는 전체 과정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연구자도 드물다 보니, 편집 과정이 저자와 편집자의 이상적인 ‘정신의 교류’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단순히 오자(誤字)나 탈자(脫字)를 발견해 정리해주는 정도의 일만 하는 것이 편집자의 역할이라고 보는 연구자가 대부분이며, 하물며 ‘편집’ 과정이 왜 필요한지를 의문시하는 연구자조차 있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 학문 풍토에서는 이에 대한 인식 전환 역시 시급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학술 정책을 담당하는 국가기관이나 학술번역이나 저술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연구자들 대부분이 출판을 단순 ‘하청’ 행위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어 전체 학술 프로그램에서 ‘출판’이 갖는 순기능들이 적극적으로 학술 정책에 반영되지 못함으로써, 최종 결과물인 ‘책’은 항상 최고의 형태를 갖추는 경우가 매우 드물게 되었다.

 

이 땅에서 근·현대 출판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처럼 인문학과 인문/학술 출판이 절정에 오른 때는 없었다. 연구 인력도 지난 세기에 비해 한층 풍부해졌고, 또한 다양성과 전문성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우려스럽게도 앞서 언급했던 여러 가지 요인들로 말미암아 향후 전개될 미래상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아니 지금보다 훨씬 좋지 않은 상황으로 내몰리리라는 것이 학계는 물론 출판계 공히 예측하는 바이다. 아울러 출판 역시 사양산업적(斜陽産業) 요소가 강해 ― 특히 학술출판 분야는 더욱 그러하다 ―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처지에 있다.

 

이러한 전반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 정부 당국은 제도적·정책적 차원에서 인문 연구자 인력뿐만 아니라 학술출판 전반에 대해서도 분명 적극적인 지원책 ― 수십 년째 반복되어 이야기되고 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는 각급 도서관의 도서구입 예산 확충을 통한 양서 구입 사업 ― 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재정적 지원 차원에서 머물러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우선적으로 출판을 ‘하청’으로 생각하는 인식부터 바꿔 학술 정책의 기획단계에서부터 출판 관계자가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학문 연구자나 출판 편집자 역시 편집 행위가 ‘정신의 교류’라는 고도의 정신 작업을 같이 수행해가는, 즉 수직적 상하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 속에서 책을 만들어 나가는 행위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 발제문 형태의 글이라 다소 거칠고 논리 전개가 부정확할 경우가 있을 수 있으므로 인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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