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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1  20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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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세대 독자를 찾아서]
유튜브와 나무위키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박원익(〈공정하지 않다〉 저자)

 

2020. 06.


 

어릴 적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 시리즈를 즐겨 읽었다. 낯선 오지에서 살아남는 모험을 상상하는 일은 짜릿한 일이었다. 한편 소년·소녀 시절의 설렘이 빛바래고 나서도 서바이벌 콘텐츠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다. ‘베어 그릴스’의 방송이나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의 인기가 그 방증이다.

 

이런 서바이벌 콘텐츠를 상상의 영역에 남겨두는 대신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생존주의자’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위기상황에 대비한다며 상비약과 식량 그리고 무기를 구비해 놓으며 여유가 있으면 지하에 벙커를 파놓기도 한다. 이들은 상황별로 어떻게 생존확률을 극대화할지 나름대로 연구하며 서바이벌 가이드북까지 마련한 뒤 이를 틈틈이 업데이트하곤 한다. 이쯤 되면 생존이라는 것이 단순한 삶의 필요를 넘어 이념의 영역에 진입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코로나19 위기사태를 맞이하여 이런 생존주의자들의 모습이 각종 매체를 통해 재조명됐다. 괴짜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경외심도 든다.

 

이들을 보면 이런 생각도 떠오른다. 변화한 매체 환경 속에서 ‘글쟁이’, 즉 주업이든 부업이든 글을 업(業)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서바이벌 가이드북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변화하는 매체 환경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류에 발맞춰 많은 출판사들이 카드뉴스와 일러스트 그리고 유튜브 영상으로 출판 콘텐츠를 홍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매체와 콘텐츠를 둘러싼 낯선 지형 전체를 조감하는 것도 필요하다. 관련한 몇 가지 흥미로운 사례들을 일별해 보도록 하자.

 

 

 

‘짤방’ 혹은 ‘밈(meme)’으로 소비되는 ‘텍스트’

 

2019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한 해 출판되는 책이 6만 2,376종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이 중 출판시장에서 주목받는 책은 극소수이다. 어떻게 하면 이 바늘구멍을 통과할지가 많은 출판인들과 작가들의 고민이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책이 입소문을 타는 경우가 있다. 바로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이다.
그중에서 흥미로운 사례 하나를 들고 싶다. 스피노자, 칸트, 헤겔 등 녹록지 않은 근대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철학 교양서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홍대선 저)가 의외의 곳(주요 남초 커뮤니티)에서 입소문을 타고 화제가 됐다. 개인적으로 홍대선 작가의 책은 서양 근대 철학을 한국적 맥락으로 끌어내 특유의 입담으로 잘 풀어낸 책이다. 한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철학자 칸트가 여성의 청혼에 대해 오래 고민하다가 혼기를 놓쳤다든지 하는 등의 흥미 위주의 썰들이 ‘짤방’으로 캡처되어 커뮤니티 베스트 추천 글로 올라가 있었다.

 


커뮤니티 베스트 추천글

 

이처럼 책의 내용 일부가 수십만 명이 돌려보고 화제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책이 화두로 삼은 서양 근대 철학사나 저자의 식견 그 자체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자크 데리다가 말한 ‘산종(散種, Dissemination)’ 혹은 ‘인용 가능성’의 궁극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동시에 자크 데리다가 누구인지 잘 아는 교양 있는 출판인들에게는 절망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여기서 사람들은 책과 저자 자체에는 진지한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데리다의 예언이 의외의 방식으로 실현된 시대 즉 텍스트가 짤방으로서 인용되고 반복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글쟁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어떻게 책과 저자에 대한 관심을 되살릴 것인가, 하는 것은 그야말로 ‘실천적’인 문제가 되었다. 다시 말해 데리다를 열심히 읽고 논하기만 해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라는 것이다.

 

 

 

일상에 더 가까이 온 서브컬처 그리고 나무위키

 

최근 일본풍 미소녀 게임 〈두근두근 문예부!(원제 Doki Doki Literature Club!)〉를 게임구매 플랫폼인 스팀(Steam)에서 접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이 게임은 미국인들이 만든 게임이라서 당황스러웠다. 물론 해외에서 순수 외국인들로만 이뤄진 K-POP 그룹이 결성되는 사례를 보더라도 서브컬처의 토착화는 이제 더 이상 신기하게 볼 일은 아니다. 서브컬처에 대한 멸시와 검열의식이 전통적으로 강했던 한국에서도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만화, 웹소설, 자작 게임 등이 일상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왔다.

 


<두근두근 문예부!> 일러스트


〈두근두근 문예부!〉 일러스트

 

‘라떼(Latte)는 말이야’가 될 수 있지만, 2000년대까지만 해도 식자층이 일본풍 오타쿠 서브컬처를 향유한다는 것에 조금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예컨대 일본의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손수 보였던 것처럼, 오타쿠 서브컬처에 대한 진지한 비평에는 순수문학과 철학 등의 ‘기성담론에 저항’한다는 식의 사상적 의미가 부여됐다.

 

비슷한 의미에서 2000년대만 하더라도 미소녀(년)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을 진지하게 비평하고 이에 기반해 나름의 박물학적 세계관을 구축한 ‘괴인’들을 블로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블로그에서는 예컨대 게임을 어떤 식으로 공략할지에 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구축한 것은 물론 이에 대한 게이머 자신의 감상과 견해를 동시에 접할 수 있었다. 객관적 정보와 저자의 주관적 해석을 동시에 일별하는 나름의 ‘맛’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새는 게임에 대한 공략정보는 물론이고 애니메이션에 대한 웬만한 비평은 ‘나무위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나무위키는 여타의 위키처럼 어느 누군가가 권위 있는 저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비전문적인 위키이다.

 

한편 이런 현상은 결국 서브컬처의 ‘토착화’ 그리고 ‘일상화’와 직결된다. 예컨대 예전에는 이진경이라는 철학자가 ‘공각기동대’에 대한 특유의 철학적 해석으로 점철된 비평을 쓰면 이를 진지하게 읽는 독자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넷플릭스에 뜬 공각기동대 시리즈에 대해 그런 식으로 해석해봤자 ‘뇌절’이라는 이야기를 듣기 좋다. 이제 서브컬처의 영역에서도 해석의 독점권을 가진 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풍 ‘아니메’나 게임에서 유래한 단어가 청년층 사이에서 유행어로 자리 잡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서브컬처가 상당 부분 일상화·대중화되었으며 이에 대해 해박한 계층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서브컬처를 고급(?)문화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비평이 권위를 가지고 유통되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서브컬처는 사회의 공식부문에서 표출하지 못하는 대중의 무의식적 욕망을 담는 보고이다. 서브컬처에 대한 주류사회의 검열의식이 어느 정도 완화된 뒤인 지금 이 시점, 청년들이 왜 출판시장의 책을 읽지 않는지에 대한 열쇠를 어쩌면 여기서 찾을 수도 있다.

 

 

 

유튜브와 ‘저자의 귀환’

 

앞서 말했듯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텍스트가 짤방으로 소비되는가 하면 편집과 수정이 자유로운 각종 위키(Wiki)의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텍스트의 원본성에 가치를 부여하기 어려운 실정이 됐다. 이에 따라 텍스트의 가치를 보증하는 특권적 ‘저자(Author)’의 지위 역시 마치 상실된 것처럼 보인다. 이와 관련해 수십 년 전에도 ‘롤랑 바르트’라는 프랑스의 문필가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사태를 진단하기도 했다.

 

물론 책이 담는 정보와 문체 그리고 이에 대한 전문가의 평가와 같은 책의 ‘내재적 가치’에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텍스트의 가치하락은 뚜렷하다. 하지만 반대로 다른 곳에서 저자가 주목받는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유튜브에 등장하는 저자의 ‘입담’이 좋다면 이를 통해 사후적으로 저자의 권위를 확립할 수 있다. 이세환 기자와 함께 출연한 유튜브 채널 ‘토크멘터리 전쟁사’ 등을 통해 유명해진 임용한 교수를 보면 그의 저술이 나중에 나무위키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 인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자와 같은) 밀리터리 오타쿠 사이에서나 한정된 신드롬에 불과하다고 반론할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유튜브에서의 유명세가 아니었다면 사학과 전공생 외의 다른 누가 임용한 박사를 눈여겨봤을까. 그런 의미에서 앞서 말한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텍스트의 권위는 사라졌지만 텍스트의 저자라는 권위 그 자체는 사라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 미묘한 ‘틈새’를 어떤 매체와 노하우를 통해 공략해야 할지 실천적 고민이 필요하다.

 

‘텍스트의 권위는 몰락했지만 정작 저자는 묘하게 주목받는’ 사태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들이 있다. 그것은 나무위키에 실린 저자들의 각종 ‘사건/사고’ 항목이다. 저자들이 쓴 책과 논문은 잘 읽지 않지만 정작 SNS에서의 발언들이나 사생활 논란들은 실시간으로 박제되고 10년이고 20년 후에도 회자된다. 저자들에 대한 넷상의 평가가 그들의 텍스트에 대한 평가를 ‘떡상’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떡락’시키기도 하는 것. 이것이 초연결사회의 모순이다.

 

물론 이러한 넷상의 평가가 100% 공정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많은 경우 넷상의 여론은 마녀사냥이나 앞뒤 가리지 않는 조리돌림으로 이어지곤 한다. 논란 와중에 억울함이 밝혀져도 과거 논란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경우들도 있다. 과거에 박제된 논란거리들은 얼마든지 나중에 악의적인 의도로 재발굴될 수 있다. 따라서 악성 댓글러 및 트롤러에 대한 출판인과 작가들의 실전적 대응지침이 필요하다. 우리가 논란에서 자유로운 훌륭한 존재라고 믿을 수 있지만 단지 그런 믿음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으며 그런 믿음이 강할수록 더욱 외부의 논란에 강경하게 대처해야 할 때가 있다. 앞서 언급한 생존주의자들의 서바이벌 가이드북과 같은 종류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글쟁이’들의 서바이벌 가이드북이 필요하다

 

글을 쓰는 테크닉과 교양으로 식자층의 특권을 과시하는 시대는 끝났다. 이는 이런저런 텍스트의 권위에 기댈 수 있었던 작가와 출판인들에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사태이다. 하지만 기업의 정보전달을 위해서든, 정치인의 연설을 쓰기 위해서든, 유튜브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서든 글쓰기의 직업적 소명은 앞으로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직업적 소명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식은 새로운 매체 환경 속에서도 지속될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 표지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 표지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된 환경 속의 ‘생존 가이드북’이다. 어릴 적 접했던 『로빈슨 크루스 따라잡기』와 같은 친절한 가이드북 콘텐츠가 어쩌면 지금 우리와 같은 어리숙한 성인들에게 여전히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가령 이런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제대로 준비되어 있는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텍스트가 원래 의도한 맥락에서 단절된 채 낯선 매체에서 표류할 때 우리는 어떤 식으로 ‘노를 저어야’ 하는가. 서브컬처와 주류문화의 경계가 희미해진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서브컬처를 통해 어떻게 다수 독자들의 욕망을 읽어낼 것인가. 새로운 매체를 통해 어떻게 하면 텍스트와 저자에 대한 관심을 되살릴 것인가. 동시에 텍스트와 저자에 가해지는 부당한 해석학적 폭력과 왜곡에 어떻게 주체적으로 저항할 것인가.

박원익(〈공정하지 않다〉 저자)

고려대학교 경제학 박사과정에 있으며, 현재 지자체 정책연구기관 연구원으로 있다.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글을 발표해왔다. 『포비아 페미니즘』(2017),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무엇이 정의인가』(공저, 2011) 등의 단행본 발간했다. 제22회 고려대학교 호원논집 우수상(2015), 제1회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2014)을 수상했고 후자는 2016년 일본 《겐론》에 번역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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