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Vol.6  2019. 09.

게시물 상세

 

학술출판 : ‘책’보다 ‘논문’ 생태계부터 키우자

 

 

 

강성민(글항아리 대표)

 

2019. 09.


 

학술출판이 나아지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학이 지식 생산의 메카로서 그 기능을 견고하게 이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너무나 많은 원인과 제도가 서로 얽힌 문제인지라 쉽게 진단할 수 없지만, 인문학 전문 출판사로서는 중요한 문제다. 학계가 건강하고 활발해야 출판도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 임용이나 평가에서 논문은 높은 점수를 주는 반면, 저서나 번역서는 낮은 점수를 주거나 아예 주지 않는 제도가 문제라고 많이 얘기된다. 그리고 학술원과 세종도서 등 우수 학술서 장려책이 규모가 작고 운영 방식도 문제라고들 한다. 또한 연구자들이 연구에 몰두하지 못하고 강의나 프로젝트에 매달리는 현실, 여기에 약간만 어려운 책도 외면해버리는 부박한 독서시장 또한 학술출판을 갈수록 위축시키는 환경이다.

 

이런 것들을 하나씩 개선하면 학술출판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을까? 쉽게 그렇다고 수긍하긴 힘들다. 조건들이 개선되면 환경은 훨씬 좋아지겠으나 환경만 좋아지고 내용은 개선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생각을 좀 바꿔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는 논문에 집중하는 게 오히려 학술출판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

 

한번 따져보자. 논문과 책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가. 둘 다 문제를 발견하고 가설을 세운 뒤 나름의 방법론으로 검증해나가는 것에선 차이가 없다. 물론 논문보다 책이 더 본격적이며 시간과 노력도 더 들어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건널 수 없는 본질적인 차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학자는 논문을 먼저 쓰고 이것을 발전시켜서 책으로 묶어낸다.

 

해외의 석학들도 마찬가지다. TED 강연을 통해 책이 묶여 나오지만, 강연을 위해 먼저 논문을 써야 한다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논문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학계가 논문 위주로 돌아간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즉, 논문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서 논의를 출발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논문 자체를 잘 쓰도록 만들어주는 동기나 자극이 약하다는 데 있다. 이는 논문의 독자, 논문의 담론화, 논문의 활용성 문제와 직결된다. 논문이 주로 분과학문별로 전문가들 사이에서 서로 읽히고 유통되는 것은 전 세계가 같다. 다만 논문이 전문가 사회를 넘어서 공유되고 논의될 가능성의 측면에서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외국과의 간략한 비교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많이 볼 것도 없고 미국과 중국 두 가지 사례를 보면 된다.

 

먼저 미국은 ‘영어’라는 만국공통어를 사용하는 나라다. 영어로 쓴 논문은 전 세계 사람이 읽을 수 있다. 논문을 한 편 쓰면 그것이 미국 내에서는 물론 유럽, 일본, 심지어 아프리카 지식 사회에서도 통할 수 있다. 게다가 미국은 《뉴욕타임스》를 비롯해서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발행되는 대형 매체들이 있다. 논문을 통해 학자로서 입지를 다지고 대중적 글쓰기로 세계적인 오피니언 리더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에 비해 한국어로 쓴 논문은 독자가 국내로 제한된다. 국내에서도 대중과 접촉할 기회는 더더욱 적다.

 

중국을 보자. 중국은 인구가 13억이다. 따라서 자국 내에서 지식의 선순환이 충분히 이뤄질 수 있다. 요즘은 예전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학술서가 10만권씩 팔리는 나라다. 잡지와 언론매체도 많다. 땅이 넓어서 지방 무대와 중앙 무대 간 거리가 넓고 중앙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문화가 형성돼 있다.

 

쓰촨성에서 문필로 날리는 사람이 어느 날 베이징 삼련서점(三聯書店)에서 발행하는 《독서》에 글이 실리면 그는 중앙에 데뷔한 것이 되며 그때부터 전국구 대접을 받는다. 쓰촨성 내에서 박 터지게 경쟁해야 가능한 일이다. 각 대학 별로 학파까지는 아니더라도 학풍이 다르고 경쟁하는 분위기도 만들어져 있다. 이런 성장과 경쟁의 시스템이 학구열을 불러일으키는 자양분 내지는 무대가 되어준다.

 

우리는 어떤가. 변변한 서평지 하나 없고 중앙 일간지에선 학술적인 논의를 실어주지 않는다. 학계는 끼리끼리 뭔가를 하지만 보편적인 판을 벌여볼 중앙무대가 없다. 이런 상황에선 좋은 논문을 쓰기 위한 선의의 경쟁 문화가 생겨날 수 없으며, 좋은 논문을 쓰더라도 그에 값하는 격려나 갈채의 문화도 생겨날 수 없다. 교수 임용을 포기하고 저자로 나서기 위해 책을 써도 잘 팔리지 않아 몇 권 쓰다가 그만둔다. 그러니 논문에 주던 점수를 책에 준다고 한들 큰 효과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논문을 잘 쓰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 논문도 글이며 모든 글은 읽히기 위해 쓰인다. 학문이라는 게 자기만족적 성격도 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타인에게 읽혀야 한다. 내가 쓴 논문이 불특정 다수에게 읽히면 글을 쓴 사람으로서는 그 반응에 신경을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단 한 사람의 자발적인 독자가 있더라도, 논문을 쓰는 자세는 달라질 것이다.

 

나는 2002년부터 2006년까지 교수신문이라는 매체에서 5년 동안 학술기자로 일해 본 경험이 있다. 이 매체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썼던 기사가 바로 논문 리뷰다. 교수들이 읽는 신문이니 논문 리뷰는 클릭수가 많이 나오는 기사거리이기도 했다. 리뷰에 대한 반응은 생각보다 괜찮았고 때론 뜨겁기도 했다. 기사를 잘 써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고, 자신의 학문적 주장을 ‘발견’해주는 것에 대한 응답이었다.

 

신문 지면으로는 한계가 있어 나는 이 작업을 홈페이지를 통해서 했다. 논문을 읽고 신문사 홈페이지에 리뷰를 올린 다음 그중 괜찮은 것을 지면에 내는 방식을 활용했다. 때로는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 자물쇠를 걸어 회원가입을 해야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사이트 회원 가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중엔 유료 회원만 읽을 수 있게 했는데도 기꺼이 돈을 내고 기사를 읽으려는 독자들이 생겨났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아쉽게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걸 몇 달 정도 실험해보던 중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2007년 인문학을 표방한 출판사를 차리게 되었다. 나는 국내 저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해보고자 관심 분야 논문을 열심히 읽고 몇몇 분들을 만나 단행본 출간 계약까지 맺었다. 그런데 계약 후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심지어 10년이 지나도 원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원인 분석을 해보니 대부분의 학자들이 한국연구재단의 연구프로젝트 때문에 자기 연구는 뒷전인 탓이었다.

 

연구프로젝트의 경우 책임연구자의 관심 주제로 팀이 짜이다 보니 팀원으로 합류하는 박사급 연구자들은 정확한 자기 전공이 아닌 분야에서 논문을 써야 했다. 가령 조선 중기 한문학 전공자가 조선 후기 정치사상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식인 셈이다. 연구의 응집력이 어떻게 생겨나겠는가. 인접 연구 분야라 해도 자기 것을 열심히 파서 그쪽으로 넓혀나가는 것과 자기 것을 하다가 내버려두고 인접 분야로 건너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효율적이지도 않고, 성과를 만들어내기도 어렵다. 이런 비효율성이 한국 학계를 지배하는 연구 시스템이 되어버렸다.

 

많은 이들이 이 문제를 지적했건만, 연구프로젝트는 당장의 먹고사니즘인지라 오히려 더 견고하게 현실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출판사가 책을 먼저 기획해서 학계의 젊은 연구자들에게 의뢰하는 방식으로는 책을 만들어내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몇 년 뒤엔 다른 것을 시도했다. 바로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시리즈다. 배경은 이렇다. 논문이 쌓여 책으로 묶여 나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적게는 3~4년, 길게는 10년도 걸린다. 책이 나올 시점에는 처음의 문제의식에서 그만큼의 많은 시간이 흐른 뒤라는 얘기다. 이건 정보의 시의성 면에서 부적절하고, 정보의 유통기한이 지나버리는 문제도 있다.

 

또 하나, 논문을 유기적으로 엮어 책으로 낸다는 게 생각보다 힘들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논문 한 편을 얇은 문고판 책 한 권으로 바로바로 연결시켜 펴내는 시리즈였다. 그렇게 펴낸 책이 주창윤 교수의 『허기사회』와 강주원 교수의 『나는 오늘도 국경을 만들고 허문다』이다.

 


『허기사회』(왼쭉), 『나는 오늘도 국경을 만들고 허문다』(오른쪽)


『허기사회』(왼쭉), 『나는 오늘도 국경을 만들고 허문다』(오른쪽)

 


리뷰 아카이브 웹사이트(http://www.bookpot.net)


리뷰 아카이브 웹사이트(http://www.bookpot.net)

 

 

둘 다 3,000부가 넘게 판매되었으며 아직도 절판되지 않고 판매되고 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지만 논문을 가지고 의견을 주고받고 수정, 보완하는 작업이 너무 고되었다. 게다가 담당하던 편집자가 학문의 길을 걷겠다고 출판사를 그만두는 바람에 총 3권을 내고 이어가지 못한 채 잠정 중단중이다.

 

이런 아쉬움을 해소해보고자 나는 또 다시 일을 벌였다. ‘리뷰 아카이브’(http://www.bookpot.net)라는 논문 리뷰 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한 것이다. 출판사가 논문 리뷰 사이트를 운영한다니 좀 황당한 시도일 수 있는데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앞서 ‘아케이드 프로젝트’ 시리즈가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논문을 매일매일 찾아 읽고 좋은 필자를 발굴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논문 리뷰 사이트를 운영하면 싫어도 계속 논문을 읽어야 하고 리뷰해서 올려야 하니, 이런 강제적인 방식을 동원해서라도 국내 저자 발굴 작업을 이어나가고 싶었다.

 

방식은 간단했다. 논문을 읽고 A4 1~2장 분량으로 다이제스트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다. 출판사 내부에서는 대표인 내가 리뷰어로 나서고, 석사 재학생 10여 명의 지원을 받아 지침을 알려주고 건당 소정의 원고료를 줘가며 사이트를 운영했다. 이것도 곧 한계에 부딪혔다. 한 편의 논문을 읽을 만한 리뷰로 만들어내는 일이 생각보다 그리 쉬운 게 아니었던 것이다.

 

대중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써야 하는데 대개 석사과정생인지라 자기 전공에 함몰되어 그쪽 주제의 논문들을 난해한 전문용어를 써가며 현학적으로 올리는 바람에 독자 입장에서는 논문을 읽는 것과 기회비용에 별 차이가 없게 되어버렸다. 게다가 네이버, 다음과 같은 포털에 뉴스 사이트로 등록을 시도했으나 2번 연속 고배를 마셨다. 리뷰를 매일매일 올리지 못해 지속성에서 감점을 받은 것, 인터뷰나 현장기사가 없었던 것 등이 이유로 여겨졌다. 결국 1년 정도 유지를 하다가 600건 정도의 리뷰를 생산한 뒤 지금은 사이트만 열어둔 채 개점휴업하고 있다.

 

사실 우리처럼 소규모 출판사에서 이런 논문 리뷰 사이트를 유지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매달 두 사람의 인건비 정도가 들어간다. 사이트를 통한 수익은 제로인데, 사이트 유지비에 인건비, 콘텐츠 생산비까지 감당하기에는 인문학 전문 출판사로서는 무리였다. 포털에 사이트가 등록되어 방문자가 늘어나면 소액의 출판 광고를 유치해서라도 유지하려고 했었는데 그것도 힘들게 되었다.

 

한국연구재단이나 콘텐츠진흥원 등의 재정 지원을 받아보려고 제안서를 만들어볼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날마다 들이닥치는 출판사 일이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양질의 논문 리뷰 사이트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최소 운영인력 2명에, 10명 이상의 필자가 상시적으로 있어야 한다. 1명당 1주에 2~3편의 리뷰를 작성한다고 할 때 1주에 20~30편의 리뷰가 올라오는 셈인데 분야별로 안배하다보면 국내에서 매주 생산되는 논문에 비해 약간 부족하지 않나 싶다.

 

‘리뷰 아카이브’를 시작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논문을 매개로 한 담론 포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논문이 책을 내기 위한 전단계의 재료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사회와 소통하고 독자를 가질 때 논문의 수준과 질이 높아진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독자는 아무래도 학계에 몸을 담은 사람들이 위주이겠지만, 언론인, 출판인, 교사, 책을 좋아하는 일반인, 사회 각 분야의 기획자들, 논술을 준비하는 고교생 등도 넓은 독자군으로 포섭할 수 있다.

 

물론 논문을 단순히 요약·소개하는 것으로는 담론을 일으키기가 힘들다. 여기엔 반드시 ‘논쟁’이라는 장치가 필요하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란 말이 있듯이 학문적 논쟁 또한 다르지 않다. 분기별로 이목을 끄는 학문적 논쟁을 기획해서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 때로는 소장 학자 인터뷰, 이슈를 소화하는 연속기획 같은 것도 이뤄지면 좋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논문을 리뷰하는 게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데이터를 쌓아나갈 필요가 있다. 나중에는 이것이 아카이브가 되기 때문이다. 숨어 있던 논문이 발굴되면서 좋은 저자가 좋은 출판사와 만날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또한 논문 리뷰를 중심으로 사이트가 자리를 잡으면 여기에서 서평 기능을 추가하면 된다. 더 나아가 해외의 주요 논문 리뷰 기능까지 덧붙여진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물론 저작권 문제는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 지금의 저작권법에서는 학술적, 공익적 목적의 인용은 허용하고 있으니 논문을 리뷰하는 과정에서 본문을 인용하는 것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러니 사이트는 특정 출판사가 사적으로 운영해서는 곤란할 것이며, 참여하더라도 학계·출판계의 뜻 있는 사람들이 운영위원회를 꾸려서 참여하고 정부가 자금을 대는 방안이 적절할 것이다.

 

이걸 운영하는 데 과연 얼마의 돈이 들어갈까. 한국연구재단의 1년 예산이 수천억 원이 넘는 걸로 안다. 그중 0.05퍼센트만 여기에 투자해도 충분히 운영해나갈 수 있고, 몇 년의 인큐베이팅 이후에는 자체적인 수익모델을 찾아 경영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들이는 비용에 비해 그 효과는 너무나 크고 지대하다. 이는 우리 학문의 생태계를 지키는 일이다.

 

미국처럼 보편언어를 갖춘 나라나 중국처럼 땅덩어리가 넓은 경제대국이 아닌 이상, 우리의 학문은 안으로 강하게 융합하면서 발전해나갈 수밖에 없다. 기초학문, 학술출판이라고 목소리만 높이지 말고 실제 지식이 만들어지고 창조적인 활동이 일어나는 논문 생태계를 지켜보고, 감시하고, 애정을 갖고 읽어주고, 서로 코멘트해주는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게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요즘은 지식의 사이클이 갈수록 짧아지고 책도 경량화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두꺼운 종이책 형태보다는 논문을 직접 읽거나, 효과적인 요약을 통해 그때그때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지식 활용성을 높이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유튜브 등과의 연결성도 대폭 확대될 것이고 말이다.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약간만 신경을 쓰고, 열린 마음으로 검토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앞으로 이와 관련된 추가 논의의 자리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커버스토리 다른 기사보기 View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