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39 2022. 12.
[지식 교양 콘텐츠를 판매하는 새로운 모델]
김하나(파이퍼 대표)
2022. 12.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지하철 안 흘끗흘끗 나를 넘겨다보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다. 사람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지하철, 당시 나는 눈에 띄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조용히 글을 읽고 있었을 뿐이었다. 뭐지? 사람들의 시선은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에 쏠려 있었다. 나는 ‘종이’ 신문을 반의반으로 접어서 들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지하철 칸의 그 누구도, 신문은 물론 책도 들고 있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펴고 접고를 반복하며 신문을 보고 있는 나는 그 지하철 칸의 유니콘 같은 존재였다. 잠시 후, 신문은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내가 느낀 감정은 ‘나는 아무도 안 보는 신문을 보는 지식인이야!’ 하는 뿌듯함이 아니라, 창피한 물건을 들고 다니다 발각된 것 같은 부끄러움에 가까웠다.
불과 3년 전쯤, 출근길에서의 경험은 지식 생산-소비에 대한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지금은 더 그렇지만, 그때도 전철에는 종이책, 종이 신문 같은 ‘실물’ 지식 콘텐츠를 보고 있는 사람이 적었다. 내가 신문을 갖고 다닌다고 하면, ‘사진 찍혀서 SNS에 올라가는 것 아니냐’라고 농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종이로 읽는 것이 편하고, 효율적이고, 심지어 더 고상하고 세련된 방식이라고 자부했다. “신문도 보고, 책도 좀 보라”고 주변에 많이 권하기도 했다. 신문사에서 기자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종이책과 온라인 콘텐츠를 함께 발행하는 뉴미디어 스타트업에서 일하면서 종이에 둘러싸여 살았던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내 세상과 바깥세상은 너무 많이 달랐던 것이다. 이후 몇 년간 거듭되는 고민 속에서 내린 문제 정의는 단순하다. 지식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스마트폰 세계에 사는데, 생산자들은 종이의 세계에 산다.
‘디지털화’, ‘모바일화’라는 말이 무의미해지는 시대다. 거의 모든 일상의 출발점이 스마트폰인 환경에서 디지털화한다는 건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다. 우리 삶의 공기와 같은 환경을 성취해야 할 지향점이나 목표로 삼는 것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지식 시장은 여전히 ‘디지털화’를 과제로 삼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여전히 디지털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실제로 책과 뉴스는 종이에 인쇄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아 생산되고 있다. 전자책도 나오고, 온라인 뉴스도 있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종이에 인쇄된 콘텐츠를 그대로 디지털 환경에 업로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디지털화’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디지털 버전’도 만들어 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물건들 대부분이 오프라인에서도 똑같이 판매되는데, 지식은 왜 그러면 안 되는 걸까? 유형의 상품과 무형의 지식은 소비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유형의 상품은 유통과 거래만 온라인에서 일어나고 소비는 오프라인에서 일어난다. 물건을 실제로 받아서 사용하는 소비자들에게 오프라인과 다른 상품을 제시할 이유가 없다. 콘텐츠는 그렇지 않다. 소비 자체가 환경과 묶여서 일어난다. 종이든, 기기든 콘텐츠를 담을 수 있는 컨테이너가 있어야만 거래도, 소비도 가능하다.
그동안 지식 시장의 디지털화는 오프라인 콘텐츠를 디지털 파일로 만드는 데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 전자책 시장이 성장해 디지털화를 이뤄낼 것이라는 기대가 나왔다. 그러나 국내 전자책의 출판 시장 점유율은 3~5%대에 머물고 있다. 지금과 같은 형태라면, 전자책은 종이책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긴 호흡과 집중력을 전제로 만들어진 콘텐츠를 5분도 아니고 1분, 30초 단위로 새로운 관심사가 등장하는 디지털 환경에 옮겨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해법은 종이책을 대체하지 못하는 전자책이 아니라, 디지털 환경에 최적화된 지식 콘텐츠다. 지난 9월 지식 플랫폼 파이퍼를 론칭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일상에서 이미 과거의, 불편한 수단이 된 페이퍼를 대체할 스마트폰 기반의 새로운 읽기-쓰기를 파이퍼에서 해내는 것이 목표다.
파이퍼 메인 화면
우리 팀은 책을 그대로 화면에 띄워 놓은 전자책이 스마트폰의 짧은 읽기 호흡에 맞지 않는다고 봤다. 실제로 서비스 론칭 전 만난 20대 초중반의 지식 소비자들은 독서 과정에서 부정적 경험을 쌓고 있었다. 종이책은 한 번에 다 읽지 못해서 덮어 놨다가 그냥 잊어버리게 되고, 전자책은 보다가 다른 콘텐츠로 계속해서 넘어가게 되면서 완독을 못 한다는 것이다. ‘발췌독’도 읽기의 한 방법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 젊은 소비자들에게 발췌독은 ‘실패’에 가까웠다. 비싼 돈을 주고 한 묶음의 책을 샀는데, 그 책은 이러한 순서대로 이렇게 다 읽으면 좋다고 말하고 있는데, 다 못 읽었다면 잘못된 선택을 해 돈을 낭비한 내가 잘못이라고 느끼게 된다고 했다. 실패의 경험 이후에는 선택이 더 신중해지고, 읽기는 결국 습관이 되지 못한 채 숙제처럼 남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우리는 젊은 소비자들이 스마트폰 환경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읽는 것이 무엇인지 살폈다. 그리고 웹소설에 주목했다. 웹소설은 종이책으로 펴냈던 장르문학과 인터넷 게시판에 업로드된 글을 디지털 상품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2013년 100억 원 규모였던 시장이 7년 만에 60배가 커져 6,000억 원 규모가 됐다. 레거시 지식 시장에서 일하면서 자주 들었던 이야기는 ‘요즘 사람들은 안 읽어’였다. 그런데 웹소설은 이런 시각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사람들은 읽히면 읽는다. 웹소설의 읽히는 전략을 지식 시장에 적용할 수 있다면, 충분히 새로운 시장이 열릴 것이다.
우리가 분석한 웹소설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짧은 호흡이다. 웹소설은 5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호흡의 에피소드들이 연결되는 구조다. 하나의 작품은 길지만, 읽는 사람은 짧은 시간 단위로 읽기 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실패’의 경험이 없다. 언제든 원할 때 이어 읽거나 중단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소비자 취향 저격이다. 로맨스판타지나, BL처럼 소비자들이 반응을 보이는 장르가 발전하고, 고도화되고 더 다양해졌다. 원하는 반응에 맞춰 다음 이야기를 생산하기도 한다. 생산자들이 만들고 싶은 걸 만들어서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서 연결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세 번째는 실시간 대량 생산이다. 일정하게 포맷화된 형식이 만들어져 있어서 글쓰기 경력이 있는 기성 작가가 아니더라도 시장에 진입해 빠르게 생산자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 카카오페이지 스테이지처럼 데뷔할 수 있는 무대가 열려 있는 플랫폼들도 많다. 기존의 신춘문예 등단과 비교하면 훨씬 쉽고 부담 없이 웹소설 작가에 도전할 수 있다. 10만 명이나 되는 생산자 집단이 형성된 시장에서 소비자가 원하는 작품은 더 빠르게, 많이 생산되고 있다.
웹소설의 세 가지 특징은 우리가 만난 스마트폰 환경에 맞는 빠른 호흡, 취향 맞춤, 빠른 연결을 충족시켜 주는 핵심이기도 했다. 레거시 지식 시장은 웹소설과는 정반대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3~4시간은 들여야 볼 수 있을 만한 분량으로 책을 만든다. 소비자 취향을 묻고 맞춰가기보다 생산자의 관점을 제안하고 설득하는 쪽에 가깝다. 특히 긴 제작 기간은 점점 빠르게 바뀌는 소비자의 관심과 궁금증을 충족시키기 어렵다.
우리가 생각한 해법은 생산과 소비를 빠르게 연결할 수 있는 포맷화된 시스템을 갖춘 플랫폼이다. 파이퍼는 웹소설의 빠른 호흡에 착안해 에피소드별로 구성된 시리즈 형태의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한 권의 책을 여러 개의 챕터로 나눠서 판매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개별 챕터들이 하나의 완결된 글로 기능한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책과 다르다. 하나의 에피소드는 5분 정도면 읽을 수 있도록 짧게 구성한다.
파이퍼 시리즈
취향 맞춤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 ‘덕후’들을 생산자로 모시고 있다. 작가들이 소비자의 취향을 상상하거나 추측하지 않고, 본인이 소비자인 사람들이 관심사를 콘텐츠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산의 퀄리티다. 글쓰기 훈련이 되어 있지 않더라도 알고 있고, 공부하고 있는, 좋아하는 영역의 지식을 콘텐츠로 만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쉽고 빠르게 글을 쓸 수 있는 ‘파이퍼 에디터’를 만들었다. 특허 출원한 파이퍼 에디터는 질문-답변 구조의 블록형 글쓰기 툴이다. 글의 키워드를 입력하고 목적(설득, 설명, 묘사 등)을 선택하면 여러 개의 연결 질문들로 구성된 글쓰기 템플릿을 제공한다. 질문에 하나씩 답을 하며 따라가다 보면, 글이 완성된다.
파이퍼에는 공개적으로 판매되는 글을 써본 적이 전혀 없는 저자들이 많다. 그럼에도 30분, 1시간 만에 한 편의 글을 써낸 경우가 있을 정도로 효율이 높다. 저자들의 응답과 파이퍼 팀의 에디팅 시간을 바탕으로 추산한 결과, 글 한 편의 생산 시간이 2분의 1 수준으로 단축됐다. 글을 잘 쓰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질문에 간단히 답하거나, SNS에 토막글을 쓰는 것에는 익숙하다는 점을 반영했다. 지식이 있다면, 누구나 콘텐츠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목표는 구호를 넘어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지금 이 글도 파이퍼 에디터로 작성하고 있다.)
질문과 답변 구조로 되어 있는 ‘파이퍼 에디터’ 템플릿 예시
서비스 론칭 후 두 달, 성과를 말하기에는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하는 데에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발견한 지점은 다음과 같다.
스마트폰 환경의 지식 소비자들은 인사이트가 아니라 정보 정리를 원한다. 주제에 대한 해설이나 분석, 전망보다 잘 정리된 정보를 산다. 특히 향수, 재즈, 내추럴 와인, 현대 미술처럼 분명한 취향을 가진 소비자들이 적극적으로 찾고 있는 시리즈들을 중심으로 구매가 일어나고 있다. 나보다 먼저 해당 분야를 좋아하고, 깊이 탐구한 사람들이 깔끔하게 정리한 정보와 아이디어를 소비하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순서대로 읽지 않고, 원하는 부분을 선택해 읽는다. 시리즈는 형식상 1화부터 순차적으로 제시된다. 그럼에도 소비자들은 1화를 읽고 4화를 보거나, 12화를 본다. 원하는 키워드가 있는 회차를 구매하는 것이다. 생산자가 제시하는 순서가 아니라, 소비자가 원하는 순서로 정보를 재구성한다. 같은 시리즈를 읽더라도 읽는 사람마다 다른 구성이 되는 것이다. 이는 추후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글을 골라 시리즈를 구성하는 ‘나만의 플레이리스트’ 형태로 서비스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있다.
또한 지식을 경험으로 확장하려는 니즈가 있다. 지식은 소비하는 것 자체로 완결되는 경험이 아니다. 지식을 접한 이후 달라지는 삶이 지식의 유효성을 입증한다. 론칭 초기부터 ‘경험하는 콘텐츠’를 서비스했던 이유다. ‘빈티지 향수 수집가의 88가지 향조 교과서’를 읽고 시리즈에 등장하는 향을 맡아 볼 수 있는 시향 패키지를 제공하고, 재즈 기초 시리즈를 발행한 후엔 뉴욕에 있는 저자와 온라인 생중계로 음악 감상회를 열었다. 내추럴 와인 시리즈를 구매한 분들을 대상으로 연 시음회의 성과를 바탕으로, 다음 달에는 내추럴 와인 시리즈와 관련한 경험 패키지 상품을 구성해 판매할 예정이다.
파이퍼 시리즈의 구독 댓글
이미 몇몇 파이퍼 시리즈는 출간 제의를 받아 책으로 펴낼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출판 디지털화의 새로운 단계라 보고 있다.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디지털화했던 것에서 출발해 브런치, 블로그 등의 무료 디지털 콘텐츠가 에디팅을 거쳐 종이책으로 상품화되고 있는 경향을 넘어, 파이퍼처럼 이미 상품화되어 있는 디지털 유료 콘텐츠를 종이책으로 옮기는 작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모르는 것을 배우고, 공부하고, 알고자 하는 욕망은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갖고 있는 기본적인 욕망이다. 문제는 배우고, 공부하고, 알아 나가는 과정이 재미없고, 심지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고, 한꺼번에 많은 양을 소화해야 하고, 궁금하지 않은 주제를 의무감에 공부하려 하는 것 모두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의 지식 콘텐츠는 ‘공부는 원래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거나 ‘고통이 있어야 제대로 배운다’라고 설득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소비자들은 고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초 단위로, 분 단위로 발전하고 편리해지는 세상에서 재미와 편리함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김하나 파이퍼 대표 신문 기자로 커리어를 시작해 미디어 스타트업 북저널리즘 콘텐츠 총괄을 거쳐 파이퍼를 창업했다. 읽고, 쓰는 일이 누구에게나 쉽고 재미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