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38 2022. 11.
[‘출판 디자인’의 오늘과 내일]
박진범(디자인공중정원 대표)
2022. 11.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또는 설명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적당한 사각형 안에 될 수 있는 한 많이 집어넣는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필요 없거나 성격이 불분명한 것들을 덜어내 나간다. 비슷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미지들 가운데 의미를 가장 잘 내포하고 있는 것들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지운다. 그리고 마침내 책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남겨져 있을 때 비로소 디자인은 시작된다. 디자인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면서 단순하고 편리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만듦의 자세
책이라는 하나의 물성은 작가, 번역가, 편집자, 디자이너 등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제 몫을 다했을 때 완성된다. 그중에서도 시각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디자이너의 자세가 상당히 중요해졌다. 자신이 추구하는 디자인의 성향을 물씬 풍기는 개성이 뚜렷한 디자이너들도 많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 번 정도 우리는 고민을 해봐야 한다. 독일의 유명한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인 얀 치홀트(Jan Tschichold)는 “책이 품은 의미가 크면 디자이너는 자신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고 내가 디자인했다는 혹은 내 작품을 만든다는 태도를 보이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즉, 북 디자인은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란 이야기이다. 다른 디자이너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텍스트가 갖는 의미와 문체가 전부 다른데 개성이 너무 뚜렷한 디자인을 통해 디자이너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면 안 된다는 얀 치홀트의 생각에 필자는 동의한다. 만듦의 시작
작가가 몇 개월, 혹은 몇 년에 걸쳐 탈고한 원고의 형태는 오로지 텍스트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원고들은 나름대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마음을 울리는 아련한 원고도 있고,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는 스승 같은 원고도 있으며, 때론 아주 사납고 공격적인 원고도 있다. 이런 각각의 성격을 지닌 텍스트들은 스스로 말하고자 하는 스토리의 분량 또한 매우 다르며 읽혀야 할 공간, 시간, 대상자들이 모두 다르다. 즉 만듦새에 있어 고려해야 할 것들이 상당히 많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은 시작 단계에서 많은 것들을 고민한다. 어찌 보면 그 시작 단계가 북 디자인의 전 과정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만듦새를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텍스트를 어떻게 하면 읽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보이게끔 하느냐는 것이다. 디자이너가 받아든 텍스트를 읽는 대상자가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이 먼저라는 말이다.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과 나이 드신 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은 처음 접근함에 있어서부터 고려가 필요하다. 이때 글자의 크기와 행간을 통해 편안하고 수월하게 글을 읽어나갈 수 있게 해야 할지 아니면 어느 정도 변화를 꾀해도 될지를 결정한다. 또한 본문 중간중간에 어려운 단어들의 부연 설명인 각주가 포함되어 있을 때 찾아보기 편하면서도 글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세심히 신경을 써야 한다. 도판이 들어가는 경우에는 본문의 해당 설명이 나오는 부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간혹 서점에서 책을 살펴보다 보면 이런 기초적인 것들을 무시한 채 오로지 예쁜 옷만 곱게 차려입은 책들이 있다. 그중엔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한 후 행해지는 실험적인 것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일부는 맹목적으로 독특하게 보이고 싶은 욕심에 굉장히 불친절하게 만들어진 책들도 보인다. 그리고 책을 읽다 보면 유독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이 느껴지는 책들이 존재한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에 소홀한 책들이란 뜻이다. 가장 기초적인 것들이 체계적이고 정확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비로소 그 다음, 책이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다.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
책의 크기(판형)는 원고의 분량, 장소, 독자의 성향에 따라 결정된다. 손으로 책을 집었을 때의 감각도 고려하여 원고의 분량이 적으면 보통 사륙판(128mm×188mm)과 같은 작은 판형으로 결정하고, 원고의 분량이 많아 책이 너무 두꺼워질 우려가 있으면 신국판(153mm×224mm)이나 그것보다 더 큰 판형으로 결정한다. 판형이 사륙판, 신국판과 같은 크기로 결정되는 이유는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국전지에 인쇄하여 추후 재단했을 때 종이의 여분으로 버려지는 부분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책이 읽힐 장소 또한 판형을 결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이다. 예를 들면 시집이나 에세이 같은 책들은 보통 지하철이나 공원 또는 야외로 나가 자연과 더불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작고 가볍게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책을 들고 다니는 데 있어서 수월할 수 있도록 접근해야 한다. 몇 년 전부터는 이러한 이유로 소설이나 인문학 분야의 책들을 손바닥만한 포켓용 문고판 판형으로 만들어 인기를 끌기도 했다. 분량이 많은 책들이 읽혀야 할 장소가 앞서 말한 곳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출판사와 디자이너는 분권을 고려하기도 한다.
이렇게 책의 판형이 결정되면 비로소 책은 옷을 입기 시작한다. 옷을 입기 위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는데, 글의 성격이나 책이 놓일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위 있는 시사회 같은 자리에 참석해야 하는데 알록달록한 평상복을 입으면 곤란하고, 편하고 활동적이어야 할 자리에 드레스 같은 옷을 입으면 불편하지 않을까?”
몇 년 전 한국출판인회의의 SBI(Seoul Book Institute)에서 강의를 할 때 학생들에게 자주 했던 이야기이다. 책도 사람처럼 자기가 가야 할 곳을 명확히 알고 옷을 입어야 한다는 말이다. 북 디자인도 패션처럼 유행이 있다. 어떤 특정 방식의 디자인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면 그 뒤로 그 책과 콘셉트가 비슷한 책들이 비슷한 방식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때론 제목조차도 굉장히 비슷하게 만들어낸다. 출판계에 몸담고 일하는 20년 동안 숱하게 많이 봐왔다. 최근 SNS에서 이 부분을 꼬집는 유저의 게시물에 몇백 개의 댓글이 달린 것을 보았는데 모두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같은 위치에 놓여 마치 유니폼을 맞춰 입은 듯한 모습으로 개성 없이 자리하고 있는 책들은 오랜 기간 심사숙고해서 그 책들을 집필한 작가에게도 굉장히 미안한 일이 아닌지 관계자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이렇듯 책이 놓일 위치가 정해지면 책의 문체가 주는 성격과 독자층에 따라 기본이 되는 컬러가 정해진다. 그리고 정해진 컬러를 기반으로 따뜻함이나 차가운 느낌으로 때론 강하고 어두운 느낌으로 이미지와 더불어 디자인된다.
여기까지 진행되면 보통 디자이너의 머릿속에선 어느 정도 레이아웃 구성은 마친 셈인데 이때부터 고려해야 할 것은 디자인을 찍어낼 종이와 후가공을 결정하는 일이다. 후가공 기술은 20년 전 출판계에 몸담았을 때보다 상당히 다양해졌다. 하지만 그에 비해 출판시장이 매년 불황이라는 기사가 쏟아지면서 출판사들은 종이를 사용하거나 후가공을 사용하는 데 있어 소극적으로 변해 갔다. 후가공이라 함은, 금박, 은박 또는 에폭시 등으로 책의 입체감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작업을 말한다. 후가공을 통해 인쇄로는 표현하지 못할 부분을 보완하거나 시장에서 더욱 경쟁력 있는 모습을 갖추게 한다. 그렇지만 부적합한 후가공은 책의 만들어진 모양새를 오히려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에 후가공의 성질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하다.
얼마 전 후배 디자이너로부터 엠보싱(종이의 원하는 부분에 열을 가해 종이 표면이 볼록하게 올라오도록 하는 방법)을 하고 싶은데 노하우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엠보싱을 할 때 표지 종이를 두꺼운 걸 쓰면 효과가 두드러진다. 엠보싱은 열에 의해 종이가 늘어나면서 올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종이가 얇으면 올라오다 찢어진다는 한계가 있다. 또 한 가지 예로, 은박을 사용할 때 검정색 바탕에 유광 은박을 사용하면 검정색 바탕이 은박에 비쳐 전체적으로 어둡게 보이기 때문에 은박을 사용한 효과를 100% 보기 어려울 수 있다. 이렇듯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이 효과적인지, 그 효과를 얻기 위해 어떤 방식을 채택해야 하는가를 잘 알아야 한다.
출판시장에 불황이 시작되면서 가장 아쉬운 부분 중 하나를 꼽자면 책을 만졌을 때 손으로 느낄 수 있는 종이의 질감을 살린 책들이 많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디자인 초창기 때엔 지금보다는 시장이 비교적 나아서인지 표지를 찍을 종이를 다양하게 선택했고 또한 종이 위에 코팅(오염을 방지하고 종이를 보호하기 위해 무광 또는 유광의 얇은 비닐을 입혀주는 방식)을 하지 않아도 출판사에서 큰 거부감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책에 맞는 종이의 질감을 선택하여 독자들에게 전달해주는 즐거움이 있었다. 시각적인 부분과 더불어 촉감까지 전달해주는 이런 부분들이 차츰 소극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건 디자이너에게도 독자에게도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만듦의 완성도
매년 연말 즈음이 되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출판계에서도 많은 이벤트를 진행한다. 한 해 동안 좋은 책을 많이 출간한 출판사 혹은 좋은 책을 기획하고 편집한 관련자를 선정해 상을 주기도 한다. 잘 만들어진 책을 선정해 수상을 하기도 하는데, 수상한 책들의 심사평을 훑어보면 지금껏 언급한 모든 부분이 적절하게 잘 어우러졌다는 의견이 많다.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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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를 전달해야 할 명확한 대상의 독자들에게 친절한 텍스트의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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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읽힐 장소와 책이 놓일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책의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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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감성을 잘 품고 있는 시각적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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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는 물성의 본질이 되는 종이와 후가공의 이해도
이러한 것들이 하나도 소홀함 없이 처음부터 잘 짜인 설계도대로 진행되어 마무리되어야 비로소 텍스트를 품고 있는 책이라는 입체적 물성의 만듦새가 완벽에 가까워진다.
마치며
몇 개월 전부터 SNS를 개설해 그간 해온 작업물을 올리며 포트폴리오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사람들이 북 디자인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많이 알 수 있는 기회들이 생겼다. 최근 여성층 독자들이 주를 이루면서 출판시장은 그들을 타깃으로 예쁘고 발랄한 디자인을 많이 출간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작업할 때도 그런 디자인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우리가 책을 만들면서 ‘이런 방식은 독자들이 안 좋아할 거야.’ 또는 ‘이런 표현은 좀 거부감이 들지 않겠어?’라고 우려했던 부분을 독자들은 생각보다 잘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독자들은 디자인에 대해 다양성을 요구하고, 그들 스스로 활발하게 의견을 나누며 이치에 맞는 비평도 한다. 잘 만들어진 책은 그들이 먼저 알아본다.
끝으로 책을 만드는 디자이너로서 또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의 독자로서, 책은 유행에 편승된 형태로 만들어져서는 안 되며, 시류를 따르지 않은 모습으로 더욱 견고하게, 견고한 만큼 또 오랜 시간을 그들의 서가에서, 내 서가에서 자리를 잡길 희망해본다.
박진범 디자인공중정원 대표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였고 문학동네 미술부팀장을 거쳐 현재 디자인공중정원 대표로 있다. 2014년 한국출판인회의가 선정한 올해의 북 디자이너로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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