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32 2022. 05.
[문해력의 중요성과 전망]
구본권(한겨레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2022. 5.
문해력이 우리 사회와 교육계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2021년 3월 교육방송(EBS)이 방영한 “당신의 문해력” 다큐멘터리는 우리 사회의 문해력에 관한 생생한 현장보고서였다. 디지털 기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바일에서 쉼 없이 읽고 쓰는 활동을 일상화하도록 했지만, 거의 모든 세대는 긴 글 읽기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2019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대한 한 줄 평은 세대별 어휘 격차와 문해력 문제를 널리 알린 계기였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도 처연한 계급 우화”라는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문장은 내용과 별개로 어휘의 적절성 논란으로 이어졌다. 왜 ‘명징’, ‘직조’처럼 어려운 단어를 사용했느냐는 일부의 반발이었다. 2020년 광복절 즈음엔 대체공휴일로 ‘사흘 연휴’가 생겼다는 보도에 “왜 3일 연휴인데 사(4)흘이라고 보도하느냐”는 댓글과 함께 ‘사흘’이 포털 검색어 1위에 올랐다. ‘고지식한 사람’은 지식이 높은 사람으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의 선무당을 서 있는 무당으로 이해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게 교사들의 말이다. 말과 글을 다루는 게 직업인 기자들도 단어의 뜻을 몰라, 황당한 보도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2021년 11월 이준석 국민의 힘 대표가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에게 “무운을 빈다”고 말하자, ‘운이 없기를 바란다’고 해석한 언론 보도가 잇따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21년 5월 발표한 “피사(PISA) 21세기 독자: 디지털 세상에서의 문해력 개발” 보고서에서 한국의 만 15살 학생(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들의 디지털 문해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 중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특히 한국 학생들은 사기성 전자우편(피싱 메일)을 식별하는 역량 평가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 중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피싱 메일 여부 식별을 통해 정보의 신뢰성을 평가하는 테스트에서 덴마크·캐나다·일본·네덜란드·영국 학생들은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지만, 한국은 멕시코·브라질·콜롬비아·헝가리 등과 함께 최하위 집단으로 분류됐다.
이와 달리, 국내 초·중학생들의 디지털 문해력이 개선되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최근 공개됐다. 2022년 3월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17개 시·도 초등학교 4학년∼중학교 3학년 학생 2만 2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2021년 국가수준 초·중학생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 수준 측정 연구’ 결과에서는 중학생 중 ‘우수’ 학생의 비율이 2019년 검사 때의 14.9%보다 높아지고, ‘보통’ 비율도 36.5%에서 46.4%로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코로나19 유행으로 정보통신기술과 컴퓨터를 활용한 비대면 학습이 늘면서 전반적인 디지털 문해력이 향상한 것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2년 전 조사에 비해 조사대상 학생들의 디지털 리터러시 능력이 좋아졌다고 낙관하기엔 최근 언론과 교육계에서 보고되는 문해력 실태 문제가 결코 간단치 않다.
국내 출판계에서는 디지털 시대의 문해력에 대한 관심이 관련 서적의 잇단 출간과 인기로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어크로스, 2019), 언어학자 김성우와 사회학자 엄기호가 공동집필한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따비, 2020), 미국 대학에서 10년 넘게 문해 교육을 연구해온 조병영 한양대학교 교수가 펴낸 『읽는 인간 리터러시를 경험하라』(쌤앤파커스, 2021)가 대표적 도서다. 이들 서적은 모두 현재 논의되고 있는 문해력의 문제를 모바일과 동영상 콘텐츠 소비문화가 특징인 디지털과 관련해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리터러시 문제의 최전선을 다루고 있다.
디지털은 문해력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국민의 정보화 욕구가 높은 ‘디지털 강국’이자 문맹률이 최저 수준인 높은 교육열의 국가 한국에서 왜 문해력이 문제되는 것일까. 우선 최근 문해력이 새롭게 관심을 받게 된 배경은 문해력의 역사 그리고 현재의 디지털 기술과 떼어서 고려될 수 없다.
15세기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기술 덕분에 인류는 지식의 시대를 만나기 시작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자를 읽고 쓰는 능력은 오랫동안 소수 특권층의 영역이었다. 서양에서는 라틴어를, 동양 한자 문화권에서는 한자를 배운 사람들만 리터러시 능력이 있었다. 라틴어와 한자는 말하는 모국어가 아니어서, 적어도 10~20년은 배워야 능통할 수 있는 문자 언어다. 생계를 위한 노동에서 자유로운 특권층만이 문해력을 지닐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인쇄기술의 보급은 모국어로 읽고 쓸 수 있는 세상을 불러왔고 근대 시민사회와 산업사회를 가능하게 했다.
디지털과 인터넷은 지식과 정보의 세계에 또 한 번의 혁명을 가져왔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를 누구나 손안에서 거의 공짜로 언제나 마음대로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선물했다. 정보사회는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예고한 대로 지식과 정보가 가장 큰 권력이 되는 사회다. 문맹률은 제로에 가깝고, 누구나 스마트폰이라는 강력하고 편리한 정보 단말기를 이용해 쉼 없이 읽고 쓰는 행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정보 이용과 생산이 어느 때보다 활발해진 오늘날 문해력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일까?
디지털 세대의 문해력 문제를 얘기하려면 먼저 디지털 환경에서 요구되는 문해력이 전통적 문해력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를 짚어봐야 한다. 리터러시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고대엔 ‘학식 있는 사람’, 중세엔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근대국가 시기엔 ‘모국어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리터러시를 갖춘 사람이었다. 리터러시는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말해왔는데, 책의 그림과 글자보다 스마트폰이나 패드로 동영상을 먼저 접한 디지털 네이티브가 늘어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읽고 쓰기가 그 이전과 다른 점은 매우 쉽고 편리하며 순간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과거에 읽고 쓰는 행위는 교육받은 소수의 일이었다는 점과 함께 상당한 시간과 생각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지만, 디지털 환경에서는 모든 게 달라졌다. 읽고 쓰기는 모바일 환경에서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됐지만 과거처럼 시간과 숙고를 동반하지 않는 행위가 됐다. 정보 이용의 대부분도 동영상 시청 플랫폼의 인기에서 드러나듯, 책읽기에 비하면 수동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런 수동적 정보 수용 과정에서 정보 이용자는 인지를 최소한으로 작동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인지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적 구두쇠’ 현상이다. 동영상 시청은 글자를 읽고 숨겨진 의미를 이해하고 앞서 맥락을 기억하는 등의 노력 없이도 정보를 실감 나게 얻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수단이다.
그런데 인식은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이다. 지성과 진실은 외부의 정보를 갖고 자기 안에서 구성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뭔가 안다는 것을 단지 정보를 아는 것으로 취급하는 일이 확산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전문가와 지식에 대한 권위가 추락하고 있다. 전문가의 식견에 대한 존중은 사라지고, 그 지식과 노하우를 인터넷 검색을 30초만 하면 누구든지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값싼 공유물로 인식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나도 너만큼 알아’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전문가와 강적들』(오르마, 2017)의 저자 톰 니콜스는 이에 대해 “지식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 것이 아니라, 모두의 지적 수준이 동등하다는 비합리적인 신념이 확산되는 상황을 맞게 됐다”고 말한다.
누구나 손쉽게 지식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지식과 정보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그 능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정보의 맥락과 상황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데 인터넷 환경에서는 정보가 개별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검색을 통한 정보 이용과 소셜미디어를 통한 정보 공유가 대표적이다. 인터넷은 배경과 맥락을 찾아보기도 편리하지만, 적극적 정보 이용은 실제로 많지 않다.
이는 리터러시에 대한 유엔 교육사회문화기구(UNESCO)의 정의에도 부합한다. 유네스코는 리터러시를 “다양한 맥락과 연관된 인쇄 및 필기 자료를 활용해 정보를 찾아내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만들어내고, 소통하고, 계산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종이에 쓰인 글의 내용을 읽는 것을 넘어 종합적인 사회적 능력을 말한다.
문해력이 디지털 세상에서 더 중요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대중들의 문해력 저하 현상이 말해주듯 갈수록 희소해지는 능력인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디지털 기술은 더 높은 리터러시 능력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정보화 세상에서는 정보량이 많아지고 세상은 더 복잡해지고 연결성은 높아진다. 정보를 연결하고 선택하고 분석하고 적용하는 능력은 예전보다 훨씬 복잡해질 것이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딥페이크와 메타버스처럼 가상과 현실의 뒤섞임이 불가피한 미래다. 단순한 정보 접근과 수용으로는 점점 복잡해질 현실의 문제를 풀 수 없다. 우리에게 손쉬운 정보 접근과 이용법을 알려주는 디지털 기술의 편리함이 거꾸로 이용자들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리터러시 능력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그러니 디지털 환경에서 집중해서 읽고 생각하는 능력을 더 소중히 여기고 가르쳐야 한다.
책에서 만나는 정보는 대개 순차적으로 읽어나가면서 맥락을 함께 알게 되는 선형적 구조를 하고 있지만, 인터넷에서 정보는 기본적으로 비선형적이고 고립적이다. 검색을 통해 만나는 정보는 배경이나 맥락에 대한 고려가 없다. ‘가장 인기 높은 정보’이거나 ‘만족도 높은 정보’가 낱개로 제공되고 분절적이다. 정보를 빠르고 쉽게 찾을 수 있게 됐지만 맥락과 배경에 대한 이해를 건너뛰기도 쉬워졌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만큼, 중요한 문제는 많은 것을 찾아보고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스스로 구성해내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체적 정보 구성력이 새롭게 요구되는 문해력의 핵심이다. 지금까지의 지식체계와 직업을 대비해 이뤄져온 기존의 교육 방식과 문해력 접근법이 새로운 환경에 맞게 업그레이드되지 않으면,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세대 간, 계층 간 문해력 충돌현상이 생겨나게 된다.
디지털 환경에서 문해력이 중요해진 또 하나의 이유는 ‘가짜뉴스’로 불리는 허위 왜곡정보의 범람과 영향력 확대다. 가짜뉴스를 만들고 퍼뜨리는 세력은 디지털 정보 구조와 새로운 문해력에 관한 전문적 기술을 갖추고 이를 악용한다. 리터러시 격차를 조작과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하는 세력이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편향적이고 분절적인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수동적인 이용자들을 주로 공략하고 있다. 허위 왜곡정보의 문제가 특정 국가나 계층을 넘어 범사회적이고 글로벌 차원의 문제가 되는 배경이다. 새로운 문해력을 디지털 시대에 만인에게 필수적인 시민성 차원으로 재교육하지 않으면 사회와 개인은 점점 더 많은 허위 왜곡정보의 피해를 입게 될 수 있다.
기술은 가장 자연스럽고 쉬운 방향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결국 사람이 가장 쉽게 정보를 취득하는 방식인 이미지와 음성을 더 많이 보고 듣는 방향으로 향한다. 이는 갈수록 유튜브, 넷플릭스, 틱톡 등 동영상 플랫폼이 인기를 끄는 현상을 설명해준다. 문자를 읽고 이해하는 방식은 몇백 년 전에야 보급된 정보 취득 방법이다. 추상적 기호를 통해서 의미를 이해하고 논리적 사고를 하는 일은 매우 비자연적 경로다.
『읽는 인간 리터러시를 경험하라』의 작가 조병영은 요즘 사람들이 정보 홍수 아닌 정보 결핍에 시달리고 있다고 본다. 그는 “디지털 이전에 필요한 정보는 생존과 성공에 중요한 정보였다. 디지털에서는 생존과 관련 없는 많은 정보가 넘쳐난다. 지금은 즐거움과 웰빙을 위한 정보를 찾는 경향이 있다”며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라는 측면에서는 정보 결핍이다. 그런데 대부분 자각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넘쳐나게 들어오는 정보의 유해성, 유익성을 판별하기 어렵다. 있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고 말한다.
매리언 울프를 비롯한 리터러시 전문가들은 아날로그의 선형적인 정보와 디지털의 비선형적인 정보 중 어느 것이 우위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오른손, 왼손 모두를 사용하는 양손잡이처럼 두 능력 모두를 균형 있게 개발하고 사용하는 게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종합적인 문해력이라고 알려준다.
구본권(한겨레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정보기술 전문기자로 오랫동안 일하며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인지 구조와 사회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탐구해왔다. 『로봇시대, 인간의 일』, 『공부의 미래』, 『유튜브에 빠진 너에게』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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