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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6  20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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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 독자들의 귀환]
1990년대 출판물 다시 붐, 3040 남성 독자를 잡아라

 

 

 

오현성(인문 칼럼니스트)

 

2023. 08.


 

최근 서점가 판매 동향이 왠지 수상쩍다. 국내 최대 인터넷서점인 예스24에서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판매된 『슬램덩크』(다케히코 이노우에(井上雄彦), 대원씨아이)와 『퇴마록』(이우혁, 엘릭시르)의 부수가 무려 38만 권을 넘어섰기에 그렇다. 같은 분야에서 연중 1위를 고수하던 『원피스』(오다 에이치로(尾田栄一郎), 대원씨아이)의 신간 판매 수치도 아득히 넘어서 버렸다. 눈여겨볼 점은 이 판매 비중의 31.3%가 35~50세 남성 독자라는 사실이다. 회원 집계가 되지 않는 고객까지 고려한다면 아마 더 높은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점 몇 가지가 있다. 출간한 지 30년이 넘어가는 이 책들이 왜 지금 다시 인기를 끄는 것인지, 산발적으로 퍼져 있던 3040 남성 독자들이 어째서 갑자기 대두되는지의 여부다.

 

단순히 생각하면 최근 개봉한 극장판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때문이라고 단정 지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관람 후 기념품 식으로 다시 도서를 구매해 보자는 심리가 발생했다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해당 분야 전반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1990년대 도서들이 다시금 인기를 끌며 35~50세 남성 독자의 도서 구매 비율이 매년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요인이 그들을 다시금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

 

X세대 아닌 ‘도서 대여점 세대’

 

3040 남성 독자들이 추억의 도서에 깊은 애정을 가진 배경에는 ‘도서 대여점’이 역할을 하고 있다. 1990년대는 문학적 인식이 크게 변하는 혼란의 과정이었는데, IMF라는 경제적 위기를 겪으며 독자들의 도서 콘텐츠 소비 양상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책은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빌려보는 것이란 인식이 서서히 증가하였고 이내 자연스러운 독서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이는 ‘빌려보는 책’으로 규정되는 부류의 도서 분야가 대폭 성장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종합형 도서 대여점’은 1990년대 중반으로 오면서 그 숫자가 전국에 있던 서점을 모두 더한 것보다 많아졌다. 1994년 1,200개소 정도에서 1995년에 9,000개소로 급격히 증가했고, 불과 1년 뒤에는 12,000개소까지 늘어날 정도로 확장세가 가히 기하급수적이었다. 여담으로 당시에 도서 구매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며 출판사와 서점이 큰 피해를 겪었다고 하는데, 그중 출판사는 도서 대여점이 대여 횟수에 비례하게 인세를 지급해야 한다며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도서 대여점의 증가가 출판사들이 느끼기에 생존을 거론할 정도의 문제로 여겨졌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출판 유통 산업의 변화는 도서 소비자의 독서 행태에도 영향을 미쳤다. 〈매일경제〉는 자체 조사를 통해 독서 인구의 도서 구매 비율이 1994년 68.4%였지만 1998년에는 9.7%나 대폭 하락한 58.7%라는 결과를 발표했다. 이 시기 독자의 39.1%는 책을 빌려서 읽었는데, 그중 20% 이상이 도서 대여점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용자의 대다수는 학생층이 차지했다. 가장 큰 특징은 10대 청소년들이 시장에 대거 진입하였다는 것이겠다. 과거 5,000원 내외의 책값을 치르고 구매해야 했던 판타지 소설이 기껏 500원 정도로 대여할 수 있게 되며 도서 접근성이 좋아졌다. 이들이 현재 3040의 연령이 된 남성 독자이기도 하다.

 

독서 문화의 변화는 이전 시기의 향유 방식과는 사뭇 다른 가치로 학생층에게 다가왔다. 민주화 항쟁 정신의 가치와 이념, 문학으로서의 정체성 따위의 깊은 이해와 통찰이 필요한 도서들이 소비되었던 이전과는 달리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소재의 책들이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도서 대여점을 이용함으로써 적은 비용만으로도 책 선택의 폭은 넓어졌지만, 독자들은 연체료를 면하기 위해 가볍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선택해야만 했다. 이때 등장한 장르가 일명 ‘남성향’이라 불리는 소설과 만화였다. 판타지나 무협 그리고 모험 및 성장물 등이 이에 해당된다. 대표적으로 만화 『슬램덩크』, 소설로는 『퇴마록』과 『드래곤 라자』(이영도, 황금가지) 등을 꼽을 수 있다.

 

과거의 현상에 대해 레트로 연구소 송창훈 대표는 “무협지나 판타지를 비롯한 남성향 도서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식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대부분 도서 대여점에서는 신간이 나오면 종류 무관하게 손님들이 줄을 지어 대여해 갔고, 거부감 없이 새로운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 당시의 독서는 철학적이거나 심오한 탐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여가를 위한 미디어 시청과 같은 사회문화 그 자체였다. 거기에 IMF와 세기말이라는 상황까지 겹쳐 오묘한 그 당시만의 감성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라며 회상한다. 인기 도서는 대기 번호를 받고 기다려야 했다는 송창훈 대표는 오히려 그때가 대중 소설이나 도서의 콘텐츠가 확장하고 분출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는 설명도 이었다. 말 그대로 '대여점 세대'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도서 대여점 프랜차이즈 ‘깨비 책방’

도서 대여점 프랜차이즈 ‘깨비 책방’(출처: 네이버 블로그)

 

 

향수와 추억에 대한 자부심

 

지난해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29주 차 기준 누적 관객 수 470만 명, 누적 매출액 490억 원을 기록하며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중 국내 흥행 2위를 기록했다. 흥미로운 점은 관람객들의 더빙 버전 선호 현상이다. 극장 개봉 초기에는 자막판이 더빙판보다 비중이 더 높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빙판의 비중이 더 높아진 것이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서 살펴보면, 2023년 7월 27일 기준으로 더빙판의 비중이 50.1%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아이맥스(IMAX), 돌비시네마(DOLBYCINEMA), 디지털 상영의 전체 항목을 제외한 일반 디지털 더빙만의 수치다.

 

『슬램덩크』가 국내에 처음 발간된 1990년대 초에는 X세대가 문화의 주축이었다. X세대는 197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로 당시 『슬램덩크』의 주인공들과 같은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 국내 버전에서 등장인물의 이름과 지명은 한국명으로 변경되어 연재됐는데, 향수를 떠올리기에는 한국명으로 전개되는 더빙판이 더 적합했다. 결국 3040 남성 독자에게는 당시의 정서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옛것이 통한 것이다. 같은 세대인 가수 허각은 자막판을 보며 감동하였고, 더빙판을 재관람할 예정이라며 자신이 『슬램덩크』의 팬이라는 사실을 자부하기도 했다.

 

 

30~50대 남성 독자의 대표 구매 분야에서의 대표 도서 2권

2023년 순위 분야 대표 도서 2권
1 경제경영 『사장학개론』, 『K 배터리 레볼루션』
2 만화/라이트노벨 『슬램덩크 챔프』, 『슬램덩크 신장재편판 4』
3 어린이 『흔한남매 13』, 『설민석의 한국사 대모험 24』
4 자기계발 『세이노의 가르침』, 『김미경의 마흔 수업』
5 소설/시/희곡 『불편한 편의점』, 『아버지의 해방일지』
2022년 순위 분야 대표 도서 2권
1 경제경영 『트렌드 코리아 2023』,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20주년 특별 기념판』
2 어린이 『흔한남매 10』, 『흔한남매 11』
3 만화/라이트노벨 『원피스 101』, 『원피스 102』
4 소설/시/희곡 『불편한 편의점』, 『하얼빈』
5 자기계발 『역행자』, 『웰씽킹』

* 대표 도서 선정 기준: 35~55세 남성 기준 각 분야별 베스트셀러 1, 2위
** 데이터 추출 기간: 2023.01.01.~07.24., 2022.01.01.~12.31.
자료 제공: 예스24

 

 

이러한 심리는 출판 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스24에서 제공한 2023년 35~55세 남성 독자의 도서 구매 비중 통계를 살펴보면 1위 ‘경제경영’, 2위 ‘만화/라이트노벨’, 3위 ‘어린이’, 4위 ‘자기 계발’, 5위 ‘소설/시/희곡’ 분야 순으로 판매 순위가 집계됐다. 흥미로운 점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된 후 ‘만화/라이트노벨’ 분야에서 『슬램덩크 챔프』, 『슬램덩크 신장재편판 4』가 가장 많은 판매를 보였다는 점이다. 이는 늘 판매 상위 랭크를 독차지했던 스테디셀러 『원피스』 신간의 판매율을 추월해 버린 수치다. 주로 경제서나 어린이 도서 구매의 비중이 대다수를 차지하던 이전의 상황에서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독자가 직접 나서서 출판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진행된 소설 『로도스도 전기』(미즈노 료(水野良), 들녘) 25주년 기념 신판 출간은 입소문이 퍼지며 성공적인 재발간을 마칠 수 있었다. 모금은 한 달 만에 초기 목표 금액의 1,003%인 1억 원 이상을 돌파했고, 예정했던 1쇄 분량을 출간 전에 모두 소진했다. 신판은 서점 유통 없이 오직 펀딩에 참여한 인원에게만 제공돼 특별한 선물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3040 남성 독자의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충성 독자에게 특별판을 제공하는 동시에 서점 유통용 재발간의 초석을 마련한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인기의 배경을 단순히 추억 팔이나 감상 정도로 판단할 수는 없다. 3040 남성 독자가 작품에 대해 느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실제로 이 시대의 작품들은 작품성과 문학성의 수준이 뛰어났다. 오히려 근래의 웹소설이나 장르문학과 비교하면 순문학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정도다. 독자도 마찬가지로 문법과 이야기에 지대한 관심을 두던 사람들이기에 이미 어느 정도 문화적 적극성을 갖춘 식자층일 수밖에 없었다.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라고 불리는 최근의 장르 출판물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웹소설 히트작들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3040 남성 독자의 관심 분야와는 미세하게 차이가 발생한다.

 

일본의 소설 『은하영웅전설』(다나카 요시키(田中芳樹), 이타카)은 판타지 장르가 수준이 낮다는 기존의 선입견을 완전히 깨부순 사례다. 1992년 2월 23일 〈조선일보〉 13면에 실린 광고 문구에는 “지모(智謀)·야심·용기. 모든 것을 갖출 수 있는 신비의 힘이 이곳에 있습니다. 부하 직원을 대하기 부끄러운 중견 간부, 뛰어난 용병술을 갖추고 싶은 군인, 새로운 사업에의 두려움에 고민하는 사업가. 이제는 모두 용기를 가지십시오!”라는 거창한 문구로 소개됐다. 독자층을 청소년이 아닌 기업의 중견 간부나 사회적 리더와 같은 지식인으로 선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학의 지적 교양 도서로도 선정되기도 했는데, KAIST 도서관 교양 서적 대출 순위 1위(1997년), 서울대학교 도서관 대출 순위 2위(2001년)를 기록하며 명문대생의 애착 도서로도 인정받았다.

 

1992년 2월 23일 <조선일보> 13면 광고 이미지

1992년 2월 23일 〈조선일보〉 13면 광고 이미지

 

 

그래서일까. 정식 교과 과정에도 문학 작품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영도 작가의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는 현대문학의 한 줄기의 사례로 소개되며 지향적 성찰 등의 논제로 다뤘다. 이 작품은 2004년 태성출판사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와 2007년/2016년 천재교육 중학교 교과서에도 내용이 수록돼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심지어 2018학년도 서강대학교 인문계 논술 문제의 지문으로도 출제되기까지 했다.

 

1992년 2월 23일 <조선일보> 13면 광고 이미지

문학 교과서에 삽입된 『드래곤 라자』, 2018년 서강대학교 인문계 논술에 출제된 『드래곤 라자』 지문

 

 

3040 남성 독자를 이해하라

 

소비자들의 상업성 분석을 위한 소비 주체 트렌드 연구는 활발히 진행돼 왔다. 본격적 경제 활동에 나서 소비 주체로 거듭난 ‘여성’, 은퇴 후 삶의 소비를 준비하는 ‘노년’, 나아가 새로운 소비 주체로 거듭 거론되는 ‘MZ’와 ‘Alpha’에 이르기까지 그 특성과 소비 패턴을 다양하게 풀이해왔다. 반면 3040 연령의 남성 소비자에게는 그럴듯한 논리가 부여되지 않는다. 세대를 막론하고 생산과 소비의 주력을 담당해왔기에 그렇다. 이들은 한결같이 합리적인 소비 활동과 함께 과소비를 절제해 왔는데, 이런 합리성에는 자신에 대한 보상이 포함되지 않았다. 이들에게서 추가 지출과 소비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이성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작용해야만 한다.

 

1970, 1980년대생들은 경제 고도성장의 혜택을 받았지만, IMF 경제 위기와 취업난을 두루 경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심리적으로 위축된 삶을 살아온 이들이 유일하게 맘 편히 다가갈 수 있는 공통분모가 청년 시절 경험한 문화 콘텐츠이다. 과거를 회상하고 마주하는 사소한 계기가 주는 감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그렇기에 단비처럼 다시 찾아온 『슬램덩크』나 『퇴마록』과 같은 도서가 불러온 감동은 단순한 구매욕의 수준을 넘어선다. 획일적 규범에 길들여져 버린 사회인 이전의 자신을 마주한 것이다. 책은 지난 시절의 문화 감수성을 상기시키는 도구이자 선물로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경직된 조직 문화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온전히 자신의 흥미를 살피기 어려웠던 3040 남성 독자의 구매 욕구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슬램덩크』

『슬램덩크』(출처: Flicker(morningfire1))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는 부유하지 않은 가정환경이 짐작될 정도로만 묘사된다.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해 여학생에게 연일 고백하지만 차이기만 반복하던 그가 농구라는 스포츠를 통해 꿈을 찾고 불굴의 의지를 다져가는 모습을 그린다. ‘백호 군단’을 비롯한 친구 중 누구 하나도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위해 묵묵히 험한 일을 대신 자처하는 모습에 청년 독자들은 환호했다. 가족보다 친구가 우선인 시절을 경험해 온 남성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공감하고 동화되며 응원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르겠다.

 

3040 남성 독자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을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급변하는 사회 속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꿈 많던 시절을 가슴에 묻어둔 개인의 이야기를 말이다. 도서 소비 주체로 급부상했다는 식의 표현은 어불성설이다. 통계를 통해 알 수 있듯 이들은 대부분 수익 증진을 위한 경제서나 자녀를 위한 아동서를 꾸준히 소비해 온 우수 고객층이다.

 

올해 들어 갑자기 수면 위로 드러난 ‘슬램덩크 열풍’은 이들이 온전한 하나의 인격체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가정을 이끄는 가장이나 누군가의 남편, 아버지가 아닌 꿈 많던 자기 자신 말이다.

 

오현성 인문 칼럼니스트

인문학과 트렌드 관점의 복합적 시점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14년차 저널리스트이다.
korstar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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