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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8  20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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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인 이야기, 책 만드는 사람의 자격]
책마을 차차차

 

 

 

이수미(나무를심는사람들 대표)

 

2021. 12.


 

대학을 졸업하던 해 웅진출판사(현 웅진씽크빅)에 입사하여 잠시 해외에 체류한 기간을 제외하고 30년 넘게 줄곧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첫 직장이 편집자가 되어 일한 마지막 직장이기도 했고, 거기서 배운 경험으로 8년 전 “나무를심는사람들”을 차려 출판사를 꾸려오고 있으니, 이 일이 내게는 말 그대로 천직이라 할 만하다. 요즘에야 한 생애 동안 여러 번의 직업을 거치는 게 별난 일도 아니고, 다양한 직업을 가지는 사람이 4차 산업혁명을 겪고 있는 초고령사회에서 바람직한 사회인의 모습으로 부각되기도 하지만, 3, 40대 내가 한창 일할 때만 해도 ‘천직’은 긍정적인 의미가 큰 말이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해 왔다고 그 사람에게 그 일은 천직인 걸까? 일단 외형적인 조건에서 30년이란 시간은 필요조건을 충족시키는 것 같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면 3년을 채우기도 힘들었을 테니. 그렇다면 나의 어떤 특성이 책 만드는 일과 잘 맞았던 걸까. 나는 왜 이 일을 육십을 곧 바라보는 지금까지 하고 있으며, 출판의 어떤 매력이 나를 지금껏 이끌었던 걸까. 원고 청탁을 순순히 받아들였을 때는 어쩌면 이번 기회에 스스로 이 대목을 정리해 보는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무의식이 발동했던 것 같다.

 

인연이란 말을 무겁게 받아들인다. 불교에서는 ‘인’에 해당하는 씨앗이 ‘연’에 해당하는 땅과 기후, 사람의 보살핌 등을 받아 결실을 맺는데, 이 ‘인’과 ‘연’이 잘 어우러져야 튼실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씨앗이 좋다고 반드시 결실이 좋을 수 없으며, 조금 부실한 씨앗으로도 ‘연’의 조건을 바꾸어 더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이유가 이렇게 설명된다.

 

편집자와 저자가 만들어 가는 관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편집자가 어떤 기획을 준비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저자인데, 기획을 내용적으로 실현하는 역할의 대부분을 저자가 담당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연출로 비교하면 편집자에게 저자는 주연 배우라 할 만하다. 누구를 주연으로 캐스팅하느냐에 따라 드라마의 성패가 달라지는 경우를 숱하게 볼 수 있다.

 

나는 한 저자와 두 권 이상의 책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편집자라면 인연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책이 가능한 것은 기획 역량이 뛰어나 저자를 설득할 수 있어서였을 수 있고 어쩌면 운이 따라줬을 수도 있다. 어떤 일을 성사시키는 데는 실력보다 운이 더 좋아야 한다는 ‘운칠기삼(누군가는 ‘운구기일’이라고까지 했다)’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런데 첫 번째 책을 위해 쏟은 편집자의 정성과 책임 없이 같은 저자와 두 번째 책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결과가 좋으면 두 번째 책으로 가기가 더 쉽겠지만, 결과가 기대보다 못한 경우에도 편집자가 책에 쏟는 정성과 열정을 보고 관계를 지속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공적인 관계에선 능력이 더 우선이라고 반론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성과 책임으로 부족한 능력을 보완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쉽지 않다. 요즘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능력주의’의 여파가 출판이라고 피해 가진 않겠지만 나는 여전히 정성과 책임으로 지속되는 관계의 힘을 믿는다.

 

처음 웅진에 입사했을 때 내가 맡은 일은 중학교 국어 월간학습지를 만드는 일이었다. 국어 교사가 써온 원고를 편집해 매달 잡지처럼 마감하는 일은 편집자 초창기에 기본 편집 업무를 습득하기에 맞춤이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기량이 숙달되자 매달 똑같이 반복되는 공정이 따분하게 여겨지는 시점에 운 좋게 단행본을 하게 될 기회가 생겼다. 방문판매로 학습지와 어린이전집을 팔면서 사세를 막 키워 가고 있던 웅진이 유통채널을 서점으로도 확장하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외부에서 단행본 경력자를 채용해서 시작해야 마땅한 일을 어찌된 일인지 당시 편집국장님은 새내기인 나에게 단행본 일을 맡겼다. 추측컨대 내가 맡은 국어 학습지에 쉬어 가는 코너로 들어가는 짤막한 읽을거리들이 재밌게 보여서, 그런 감각으로 단행본 기획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그 또한 내 능력이었다고 하기보단 해당 필자의 감각이었다. 이십대의 난 억수로 운이 좋았던 거였다.

 

출발이 이렇다 보니 처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단행본 필자들이 전집과 학습지 전문인 출판사에 원고를 선뜻 줄 리가 없었고, 빵빵한 현금회전력을 갖춘 회사 규모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겨우 3년차 학습지 편집자 출신인 나에게 경험 있는 선배 하나 없이 맨땅에 헤딩하는 단행본 기획은 너무 힘든 과업이었다. 몇 달의 시장 조사와 전문가 면담 등을 하며 발로 뛰어 내린 결론은 처음 웅진 단행본 기획의 방향이 청소년 출판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동 전문 출판인 웅진이 곧바로 일반인 대상의 단행본을 하기보다는 중간 단계의 청소년을 거점으로 하여 차츰 일반인으로 확장한다는 전략으로 회사를 설득할 수 있었다. 초창기 웅진의 전집과 학습지를 본 아동들이 이미 청소년이 된 시기적인 면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이런 배경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펴낼 수 있게 되었다. 청소년을 위한 성장소설이라는 기획이 선생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대림동 선생님의 아파트에서 처음 뵈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거실 바닥에 함초롬히 무릎을 세우고 앉으셔서 조용히 듣고만 계셨던 야윈 선생님의 모습이 액자 속의 사진처럼 선명하다. 남편과 아들을 앞세운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고 외출도, 밖의 사람을 만나는 일도 거의 없었던 때였다. 아마도 선생님은 참혹한 전쟁도 죽음도 없이 평화로웠던 유년의 시절, 개성 박적골 고향의 기억을 떠올리며 당시의 고통을 이겨내려고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원고가 나오기까지 내가 했던 역할은 주기적으로 선생님을 방문하여 조심스럽게 안부를 묻는 일이 전부였다. 갈 때마다 조금씩 마음을 열어 주시고, 원고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실 때는 특유의 개성 발음을 살짝 섞어서 조곤조곤 말씀하셨던 모습이 생각난다. 특정 장면을 설명하실 때는 마치 글로 묘사하는 듯 구체적으로 표현하셔서 세밀한 기억력에 감탄하곤 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반응이 좋아 예정에 없었던 후속작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까지 내게 되면서 선생님과 만나는 기간이 길어진 것도 큰 행운이었다.

 

박완서 선생님이 마흔의 나이에 여성동아 장편 공모에 당선되면서 등단하게 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당선이 확정되고 동아일보사에서는 본인 인증을 위해 기자 두 명을 당시 선생님이 살고 계셨던 신설동 집에 보내는데, 둘 중의 한 명이 지금은 가수 이적의 엄마로 더 잘 알려진 여성학자 박혜란 선생님이다. 여성동아 기자를 하다 둘째 이적을 낳고 퇴사 후 10년 가까이 세 아들을 키우며 전업주부를 하다 박완서 선생님처럼 마흔이 되던 해 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에 들어가 여성학자로 인생 후반부를 시작하셨다. 셋째 아들까지 대학에 들어간 해, 세 아들을 키운 이야기를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에 담았는데 이 책 또한 나의 편집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다.

 

잘 아는 외부 기획자를 통해 박혜란 선생님과 계약이 진행되고 초고가 완성되었을 쯤 저자에게서 더 이상 진행을 할 수 없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기획자와 원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게 발단이 된 듯했다. 기획자의 양해를 구하고 그때부터 내가 전담을 하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당시 학부모교육운동을 열정적으로 하고 계셨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긴 생머리를 올백으로 넘겨 질끈 묶은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이었다. 그때 나도 다섯 살 큰아이를 키우고 있던 때라 저자가 책에서 강조한 ‘육아에서 아이를 믿어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교육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을 내고 난 다음해 퇴사를 하게 되어 선생님과의 인연이 끝나는가 했는데, 해외 체류를 끝내고 웅진에 재입사하게 되었다. 그때 선생님은 여성신문에 페미니스트 관점으로 “나이듦에 대하여”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계셨다. 단행본으로 엮어 보자는 나의 제안을 흔쾌하게 받아 주셔서 두 번째 책으로 이어졌고,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7권의 책을 함께 냈다. 첫 책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은 지금까지 네 번의 개정판을 내면서 25년간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육아바이블이 되었으니 박완서, 박혜란으로 이어진 내 편집 여정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하다.

 

얼마 전 종영한 TV드라마 “갯마을 차차차”를 오랜만에 본방사수하며 보았다. 정글 같은 도시 생활에 치인 치과의사(신민아 분)가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 바닷가를 찾았다가 그곳에 아예 병원을 차리고, 마을의 온갖 잡일을 아르바이트로 메꾸며 사는 의문의 홍반장과 얽히고설키다 사랑에 빠진다는 흔한 로맨스였다. 그럼에도 다음 회차를 기다려 가며 드라마에 열광했던 것은, 그림 같은 바다마을의 풍경과 매회 천진한 어린애 같은 미소를 날려주는 신민아의 보조개에 홀려 온갖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오래 잔상이 남는 것은 여주인공의 상큼한 미소도 예쁜 바다도 아니었다. 그동안 이름조차도 알고 있지 못한 두 조연들에게 유독 관심이 가면서 그들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관심 깊게 보고, 필모그래피를 검색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식당주인으로 분한 이봉련과 신민아의 단짝 친구이자 간호사를 맡은 공민정이었다. 이봉련은 이혼 후 아들 하나를 키우며 야무지게 식당을 운영하면서 마을의 반장까지 맡고 있는 이른바 ‘츤데레’이다. 신민아가 마을에 정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힘들고 외로워할 때 따뜻한 성게국을 끓여 마음을 달래 준다. 공민정은 하는 연애마다 차여 상처투성이지만 특유의 현실감각과 낙관성으로, 신민아가 헛똑똑으로 직진하려 할 때마다 사실을 직시하게 해준다. 얼마나 찰떡같이 이 역할을 소화해 냈던지 최근 본 영화에서 공민정이 나왔을 때 이 드라마에서의 연기가 오버랩되면서 역시 명품 조연이구나 다시 감탄하게 되었다.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두 조연의 이야기를 이렇게 꺼내는 것은 두 사람의 역할이 편집자와 많이 닮았다고 여겨서이다. 흔히 편집자를 프로듀서에 비유하곤 하는데, 나는 원고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편집자가 하는 일은 두 조연의 역할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스펙을 갖춘 엘리트이지만 슬럼프에 빠지게 된 신민아에게 살 곳과 병원 자리를 물색해서 정착하게 도와주는 식당주인 이봉련처럼, 편집자도 글감옥에 빠지게 되어 때로 옴짝달싹 못하게 된 작가들이 다시 글을 쓸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내고, 토론 상대가 되어 주고, 가끔은 없는 솜씨라도 발휘해서 성게국을 끓이곤 한다. 저자의 의욕이 지나쳐 경계를 넘을 때 현실에 맞게 조정하게 돕는 일도 편집자의 몫이다. 이때는 친구 신민아가 위축되지 않도록 시크하고 위트 있게 눈웃음을 날리며 꼭 필요한 말을 던지는 공민정의 역할이 필요하다.

 

제일 먼저 초고를 접하는 순간은 예나 지금이나 최고로 설레는 시간이다. 어떤 시간을 거쳐 원고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응원해 왔기 때문이다. 편집의 여러 공정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저자가 의도한 바를 확실하게 파악해서 불특정 독자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편집의 질서를 만드는 과정은 내가 가진 기본기를 바닥부터 끌어내야 하는 과정이다. 글의 구성을 바꾸거나 강약을 조절하여 저자를 설득하기 위한 근거와 배경지식 없이 이 일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관점과 판단이 늘 정확할 수는 없어서, 때로 저자와 충돌하는 일도 생긴다. 상충되는 의견들을 수용하고 보완하면서 다듬어져 나온 책의 반응이 좋을 때 느끼는 짜릿함으로 다음 책을 또 준비하는 것 같다.

 

모니터로 원고 보기가 점점 힘들어 얼마 전 태블릿을 장만했다. 거치대에 태블릿을 올리고 책 보듯이 원고를 보니 모니터로 보는 것보다 훨씬 좋아졌지만, 얼마 안 가 눈이 침침해지면서 피로감이 몰려온다. 앞으로 얼마나 이 일을 더 할 수 있을까 되묻는 순간이 많아지고 있다. 얼마 전엔 큰아이보다 어린 필자와 계약을 했다. 조연의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할 때가 많아질 거라는 예감이 든다. 그날이 언제일지 아직 모르지만 마지막 책을 만드는 날까지 기꺼이, 행복하게 나의 천직을 완수하고 싶다.

이수미

 

이수미(나무를심는사람들 대표)

웅진지식하우스 대표, 웅진씽크빅 단행본개발본부장을 거쳐 현재는 나무를심는사람들에서 청소년을 위한 책들을 주로 출간하고 있다. 지금까지 여러 장르의 다양한 책들을 기획하고 편집해 왔지만, 맨 처음 단행본 편집자가 되어 청소년소설을 냈던 것이 다시 청소년도서를 출판하게 된 소중한 인연으로 여겨진다.
soomi5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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