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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0  20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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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종이책의 미래를 말하다]
쓰는 사람이 생각하는 종이책의 미래
이제 막 지어진 세계

 

 

 

양다솔(작가)

 

2023. 02.


 

종이책의 미래라는 주제로 글을 청탁받았다. 숨이 턱 막혔다. 종이책의 미래? 그야 암담하지. 그러나 나는 청탁을 받아들인다. 주제 앞에 있는 ‘쓰는 사람이 보는’이라는 문장으로 인해서다. 이 문장처럼, 나와 종이책의 미래는 어느 정도 나란히 서 있다. 쓰는 사람은 쓰는 행위로서 그 미래가 연장된다. 내가 씀으로써 그것이 종이 위의 활자가 되고, 그러므로 책의 미래도 연장된다.

 

그러나 이야기에 앞서 내가 종이책의 미래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는 걸 밝혀두어야 할 것 같다. ‘암담하다’라는 네 글자면 충분할 이야기에 청탁 원고 분량은 200자 원고지 30매다. 출판계 사람 30명을 붙잡아 물어도 암담하다 할 것이고, 길을 가는 30명을 붙잡아 물어도 암담하다 할 것이다. 대부분은 그 사실에 대해 별다른 절망의 기운도 없을 것이다. 30명이라는 수를 200명으로 늘린다고 해도 변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암담하다’를 6,000자로 늘인다면 어떤 변수가 생길까.

 

나는 묻는다. 어떻게 암담한가, 얼마나 암담한가 그리고 정말 암담한가. 그러자 마음이 암담해진다. 쓰기로 약속했다는 것은 무섭다. 이제부터 나에게 펼쳐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30분간 유튜브를 보는 데에 전념한다. 알고리즘은 딱 지금의 나를 위한 콘텐츠를 상단에 띄워준다. 나는 생각한다. 이제 막 책 한 권 출간했을 뿐인 신인 작가가 종이책의 미래에 대한 혁신적인 비전을 제시하기를 바랄 리가 없어. 절박한 마음으로 책을 주문한다. 그것을 펼친다.

 

그리고 그곳엔 이미 쓰여 있다. 내가 질문하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말하려고 했던 무언가가. 더 구체적이고, 깊고, 넓고, 명확하고, 심지어는 멋진 단어들로 엮여 있다. 책의 내용과 어우러지면서도 적당히 감각적인 표지, 보기 좋게 배열된 내지, 더없이 상냥한 문체. 힘이 탁 풀리면서 나는 순순히 항복한다. 어느새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활짝 웃으며 좋아하는 연필을 찾아 어떤 것은 밑줄을 긋고, 어떤 것은 분홍색 하이라이터로 칠하고, 때때로 종이의 귀퉁이를 접는다.

 

바로 이거지. 내가 몰랐던, 말하고 싶던, 찾고 있던 그것. 나는 무릎을 치며 심지어는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하며 파란색 사인펜으로 별표를 그리고 표지와 어울리는 색인을 붙인다. 그리고 답을 찾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리터러시 연구가 김성우와 사회학자 엄기호가 공저한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라는 책에서다.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종이책뿐 아니라 텍스트가 가지는 변동과 확장,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나아갈 미래가 이 책 안에 있다. 나는 계속 밑줄을 긋다가는 줄 공책을 만들 것 같아 포기한다. 그러다 멈추게 되는 문장이 있었다.

 

‘모두 다 독자가 아니라 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갈수록 책을 읽는 사람은 줄어들고, 종이책 판매량은 가파르게 감소한다. 읽지 않아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읽는 것은 필수적이지 않다. 더 이상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펼치지 않아도 된다. 그보다 쉽고 재밌고 간편하게 정보를 얻는 방법이 수없이 존재한다. 아무도 읽으려 하지 않는 세상에서 쓰려는 사람은 늘어간다. 더 많은 책이 출판된다. 더 많은 작가가 배출된다. 세계를 짓는 사람은 있는데 그것을 누리는 사람은 없다. 별로 새로운 것이 없는 사실이다. 미디어의 구조 변화에 따라 누구나 콘텐츠를 만들고 화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개인이 자신에 대해 표현하는 방식은 과잉일 정도로 다양해지고 많아졌으며 더 자극적으로 요구된다. 책이라는 콘텐츠라고 상황이 다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문장이 새로웠다.

 

내가 저자가 되기 위해 독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읽지 않는 세계에서 자라났다. 어린 시절 나는 비디오 가겟집 딸이었다. 그 시절 내 키는 가게의 문을 겨우 열 수 있을 정도였다. 색색으로 가득 찬 비디오들은 정수리 위로 한참 높았다. 동네에서 누구보다 먼저 그것을 고를 수 있었다. 내가 고른 비디오는 누구도 빌릴 수 없었다. 포스터와 사진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플라스틱 케이스에서 검은색 테이프를 꺼내 비디오 재생기에 넣으면 그것은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방 안은 시끄러워졌다. 그러면 나에게 형제자매가 없다든가, 부모님이 모두 일을 나가고 없다는 사실쯤은 금방 잊어버렸다. 어떤 것들은 테이프가 닳도록 돌려봤다. 어떤 말들을 따라 발음했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대화를 나눴다. 어떻게 시작하고 끝나게 되는지를 줄줄 욀 수도 있었다. 티브이가 켜진 채로 잠이 들었다.

 

손끝으로 그 비디오의 제목들을 쓸어가며 가게 안을 지나던 그 감각을 기억한다. 그것은 내가 누리게 될 무한에 가까운 즐거움 혹은 내가 외롭지 않을 거라는 증명과도 같았다. 화면이 반짝이는 동안에는, 소리가 가득 차는 동안에는 잊게 될 것이었다. 집에는 책이라는 물건이 존재하지 않았다. 평생 부모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 헌책방에서 헐값에 사 온 듯한 낡은 과학 만화 전집과 무자본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자기계발서 몇 권이 내 손이 닿지 않는 책장에 꽂혀 있긴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꺼내거나 펼치지 않았다. 벽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이야기는 말과 화면으로 이어지고 전해졌으며, 그걸로 부족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가난하지만 대화가 많은 집안이었고, 화면이 꺼진 동안에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읽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고, 문제라는 것을 알 수도 없었다. 우리는 말하고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봤다.

 

읽기의 부재를 처음 인식한 것은 중학생이 되고 나서다. 친구들이 책을 읽고 있었다. 한 친구는 늘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녔고, 한 친구는 책을 읽을 때마다 적어서 내면 부모님께서 용돈을 주신다고 했다. 그들은 내가 들은 적 없는 이야기와 등장인물에 대해 얘기했고, 때로 나와 말하기보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데 집중했다. 나는 친구가 건넨 책을 무심코 펼쳤다. 글자들을 따라 읽다가 곧 그만두었다. 눈이 시렸다. 그 속의 이야기는 멈춰 있었고, 아무런 색도 없었고, 너무도 조용했다. 피할 수 없는 적막이 그곳에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내가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왜 부끄러웠는지 굳이 들여다보지 않으며, 갈수록 그 감정이 희미해짐을 느끼며, 나는 여전히 읽지 않는 성인이 되었다. 읽지 않아도 세상은 충분히 벅찼다. 누군가 책을 읽는다면 대체 어떻게 읽는 건지 물어봐야 할 판이었다. 대학에 다녀야 했고, 꼭 읽어야 하는 참고서들만 읽는데도 머리가 아팠으며, 과제를 하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집안일도 하고 여행도 하고 연애도 해야 했다.

 

자연히 일 년에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유튜브를 봤지만 한 글자도 읽지 않았다. 삼만 원짜리 화장품, 십이만 원짜리 원피스는 척척 사면서 만 삼천 원 하는 책이 비싸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는 장소, 자세, 모습, 분위기, 공기까지 나에게는 생경하고 불편하고 불필요한 일이었다. 본가를 나오면서 가지고 왔던 한 줌의 책들은 창가 구석에 대충 세워두었다. 그 위로 비가 들이치면 그냥 맞게 두었다. 곧 책들은 먼지와 물 얼룩으로 굳어져 펼쳐지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뭔가를 잃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들여다보지 않을 세상이었다.

 

언젠가 책으로 가득 찬 공간에 갔을 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파주에 ‘지혜의 숲’이라는 천장이 10m가 넘고 운동장만큼 광활한 공간에 빼곡히 책으로 가득한 곳이다. 그곳에 들어선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인가가 그렇게 많은 걸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생각했다. ‘왜 이렇게 다들 할 말이 많아.’ 만나보지도 않은 인류에게 질린 기분이 들었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어디서 끝날지도 알 수 없어 보였다. 너무 많고 지겹고 가득하고 시끄러웠다.

 

조금 치가 떨렸다.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도 자신의 이야기는 다르다고 아득바득 우기며 또 새로운 것을 얹어내는 인간의 심리를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똑같아 보였다. 그래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어릴 적에 비디오에 둘러싸였던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그것은 나를 완전히 소외시키고도, 나에게 한 번도 말을 걸어주지 않고도 온전히 존재했다. 나에게 필요하지 않고,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였다. 나는 단 한 권도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런 내가 어느 날 저자가 되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는 어느 날부턴가 쓰는 일을 시작했고, 눈치를 채 보니 그것을 굉장히 오래 지속하고 있었다. 그저 이야기를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고, 그걸 들어주는 유일한 곳이 글을 쓰는 모임이었고, 할 말이 마르지 않고 계속되었을 뿐이었다. 쓰는 행위가 십 년이나 지속되는 동안에도, 나는 내가 쓴다든지 읽어야 한다든지 하는 감각을 갖지 못했다. 스스로를 저자라고 인식하지 않았고, 저자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으며, 마찬가지로 독자가 필요하다거나 독자가 되어야 한다고도 느끼지 않았다. 동료들의 글을 매주 읽는 것 또한 독서라고 자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저 친구와 수다를 떠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전혀 힘들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이 실제로 몇 권의 책만큼 엄청난 양이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어느새 눈처럼 글이 쌓여 있었다. 주변의 권유로 독립출판을 하게 되었다. 별 뜻 없었다. 그때의 내 책을 본다면 내가 책이라는 것, 특히 종이책이라는 것을 얼마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이틀 만에 짜깁기한 조악한 표지와 아래아 한글로 편집한 본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탈자와 비문은 기본적인 교정·교열도 거치지 않았다. 문서의 여백과 자간과 행간, 글자체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종이는 빳빳해서 넘어가지도 않았으며 몇 줄만 읽어도 눈이 아팠다. 책이라기보다는 네모난 종이 뭉치에 가까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책이 내가 살면서 했던 그 어떤 시도보다도 성공적인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 흉측한 종이책은 내가 상상했던 곳보다 멀리 갔다.

 

생각지도 못하게 나는 계속 쓰게 되었다. 독립출판을 계기로 출판사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출판사가 지원하는 교정 교열 수업을 듣게 되었고, 책을 편집하게 되었다. 책 관련 팟캐스트를 제작하고 영상을 만들었으며, 책을 홍보하고 기획했다. 함께 쓰던 친구들은 작가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주변을 보다 깜짝 놀랐다. 모든 것이 책투성이였다. 읽지 않는 세계에서 자라왔던 내가 책으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쓰는 사람들과 책을 만들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 나에게 ‘네가 이런데도 안 읽나 보자.’라고 단단히 작정한 것으로 보였다. 내가 조용히 치를 떨었던 공간 앞에서 나를 저자로 소개하는 순간은 그야말로 거대한 사기를 치는 기분이 들었다. 반짝이는 눈들을 향해 나는 저자였던 적도, 독자였던 적도 없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독자가 되었다. 이토록 독자였던 적이 없다. 전례 없이 독자다. 누가 봐도 독자다. 요즘 나의 가장 큰 지출은 옷도 아니고 밥도 아니고 집도 아닌 책이다. 누군가 책 제목을 입에 올리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책을 산다. 몇 년 사이 집엔 커다란 책장들이 들어섰다. 그마저도 더 이상 꽂을 공간이 없다. 읽고 싶은 책을 한두 권 올려놓기 시작한 책상에는 매일같이 탑이 쌓여간다. 가장 먼저 눈을 뜨면 책을 읽고 눈을 감기 전에도 책을 읽는다. 외출할 때는 기본 세 권을 챙겨서 집을 나선다. 대중교통이라도 이용하면 책을 읽을 수 있어 신이 난다.

 

진정으로 쓰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나는 읽게 되었다. 저자가 된 순간부터 내가 가장 많이 했던 것은 쓰기보다는 읽기였다. 세상의 많은 이야기들이 더는 나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더 많은 이야기들과 관계자가 되었다. 내가 이 원고를 쓰기 위해 새로운 종이책을 사고, 읽어야 했던 것처럼.

 

쓰기가 바꾸기 시작한 내 삶의 풍경은 놀랍다. 그것은 한두 권씩 내 삶을 천천히 장악했다. 이제는 평생을 올라도 다 오르지 못할 아득한 산처럼 그곳에 있다. 그런 아득함은 다른 어떤 것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기분이다. 그것은 날이 갈수록 점점 명확해진다. 나는 늘 알기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된다. 여전히 모르는 작가의 모르는 책들을 만난다. 그것은 지금도 쓰인다. 나는 늘 새로운 책들을 들고 집으로 온다. 내가 온전히 존재할 공간을 점점 좁혀가면서 활자들을 야금야금 읽어나간다. 유튜브를 보고 싶은 마음을 때로는 참고 때로는 까먹으면서.

 

내가 읽어서 그 세계를 펼치기 전까지 그것은 ‘내가 그것을 언젠가 읽겠다’라는 성명에 불과하다. 나는 그 이야기가 내 삶의 일정 부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도록 둔다. 그것은 이야기하겠다는 의지의 시각화다. 나는 그것이 내 눈앞에 실존한다는 것에 안심한다. 내가 말을 걸기 전까지 나를 기다려줄 것임에 안심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의 종이책의 미래는 전혀 암담하지 않다. 적어도 내 종이책의 세계는 이제 막 지어지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찬란하게.

 

양다솔

양다솔 작가

쓰는 사람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수필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을 지었다.
moojusim@gmail.com
인스타그램: @kakm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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