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0 2023. 02.
[다시, 종이책의 미래를 말하다]
김형보(어크로스 대표)
2023. 02.
종이책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그러나 1000년 넘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형태의 문서 기록이었던 책 앞에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알 수 없는 형국이다. 종이가 양피지를 대체하고, 가동 활자가 필경사라는 직업을 없애고, 코덱스, 즉 제본한 책이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제쳤듯이, 컴퓨터와 전자책이 아주 빠르게 종이책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다.”
내가 처음 받은 이직 제의는 2000년대 초반 우후죽순 생겼던 전자책 업체 중 한 곳이었다. 당시는 새 밀레니엄을 맞아 인터넷 혁명에 대한 기대감으로 닷컴 버블이 한창이었던 시절이었고, 책은 빠르게 디지털화할 수 있는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일부 작가들은 전자책의 인세로 50%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제지업체와 인쇄소는 대표적인 사양 산업 중 하나로 꼽혔다. 디지털 전환을 시급히 준비하지 않으면 시대의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서 탈락할 것이 뻔해 보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출판사도 ‘○○닷컴’으로 사명을 바꾸면서까지 변화의 대열에 동참했고, 회사가 소장하고 있던 많은 콘텐츠를 디지털로 전환해 새로운 시대의 새 성장 동력으로 삼으려고 했다. 당장이라도 종이책이 사라지고 전자책이 지배하는 세상이 곧 도래할 것 같았던 시대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그때보다 더 많은 종류의 종이책이 출간되고 있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종이책을 만들고 팔고 읽는 생태계 안에서 일하고 있다. 기술 발전의 속도가 더뎌진 것도 아니다. 그동안 킨들(Kindle)과 같은 전자책 전용 리더기가 나왔고 스마트폰이 우리 삶의 디지털화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리고 이제는 종이책이 곧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책은 수저나 망치나 바퀴, 또는 가위 같은 것입니다. 일단 한 번 발명되고 나면 더 나은 것을 발명할 수 없어요.” 움베르토 에코는 시나리오 작가 장 클로드 카리에르와의 대담에서 말했다(움베르토 에코, 『책의 우주』, 임호경 옮김, 2011, 9쪽). 그의 말대로 종이책은 대체재를 만들 수 없는 인류 문명의 완결된 발명품일지 모른다. 종이책 생태계 안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책의 소멸을 걱정하지 않는다. 디지털 혁명이 시작된 후 사라질 거라고 끊임없이 예견되었던 종이책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건재하다. 여전히.
하지만 그 20년 동안, 구텐베르크가 근대적 인쇄술을 발명한 후 차지하고 있던 ‘감동, 재미, 사상, 주장, 지식, 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권위 있고, 효율적인 매체라는 트로피도 내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책을 출간한 작가라는 훈장은 매력적이지만, 웹소설 작가가 되거나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는 것으로도 종이책 작가만큼의, 아니 그 이상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 웹소설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드라마나 영화 기획사들은 종이책을 검토하기보다 웹소설과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을 개발하는 것에 힘을 더 쏟는다. 유튜브와 팟캐스트의 인기 콘텐츠가 원소스(One Source)이고, 책이 멀티유즈(Multi Use) 중 한 가지인 경우가 훨씬 많은 시대가 되었다.
책은 소멸하지 않았지만, 책의 세계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완결된 발명품으로 그 가치를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던 움베르토 에코도 앞에서 인용한 말에 이어 “미래에는 몇 안 되는 절대적인 신봉자만이 종이책에 관심을 가질 수 있어요.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지향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박물관이나 도서관을 찾게 되겠죠.”라고 덧붙였다(움베르토 에코, 앞의 책, 11쪽). 종이책의 세계가 점차 축소되고, 그것의 가치를 숭배하는 이들이 소수가 될 것을 석학이 예측하기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자책에는 표지 뒷면도 책등과 책날개도 필요 없다
“대부분의 표지 디자인은 오프라인 마케팅 도구로 진화했는데 전자책에서 표지의 역할은 어떻게 될 것인가? 구입한 다음에 표지는 어떻게 되는가? 아니, 좀 더 말하자면 구입하기 전 표지의 역할은 무엇인가?”
본격적으로 전자책을 편집하고 발행한 건 출판사를 창업한 직후였다. 2010년대 초반에는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전자책 리더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스크린에서 책을 읽는 게 훨씬 용이해졌다. 매출을 만드는 일이라면 뭐라도 해야 하는 처지였던 터라 당시 출판사에게 전자책 공급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던 전자책 업체들의 출현은 기회였다. 창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출간된 종이책을 전자책으로도 발행하기 시작했다. 종이책을 epub 형식의 전자책으로 전환하는 데는 큰 비용이 들지 않았다.
처음 전자책을 제작하고 검수할 때는 많이 혼란스러웠다. 전자책에는 표지의 뒷면이 필요 없다. 날개에 적힌 저자의 이력과 책 소개 글을 전자책의 어느 위치에 넣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종이책 표지는 스크린에서 전통적인 쓸모를 상실한다. 본문 인쇄물을 묶고 보호하는 물리적인 역할은 없다. 공들여 썼던 표지 문안들은 갈 곳이 없어졌다. 서점 매대에서 두드러져 보이기 위한 종이책의 표지 전략은 인터넷 브라우저나 모바일 화면이라는 환경에서는 유튜브 콘텐츠나 다른 콘텐츠의 섬네일보다 발견성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 독서 과정에서 물리적인 실체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의 묶음, 혹은 얼굴로서의 역할도 없다. 책의 본문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전자책에서는 독자(사용자)들이 글자 크기와 서체 행의 넓이와 간격을 정할 수 있기 때문에 종이책을 편집할 때 편집자가 의도한 판면이 없다. 면의 아래가 없기 때문에 각주(foot note)가 있을 수 없다. 종이책과 전자책을 만드는 일은 같은 일인가, 다른 일인가.
종이책 인터페이스에 길들여진 편집자의 한계
“코덱스가 개발되기 전에 긴 글은 보통 두루마리에 쓰였다.”
편집자가 처음 출판사에 입사해 일하며 배우는 것은 원고를 입수한 후 종이책을 구상하는 사고방식과 그 방법이다. 편집자는 원고를 읽으며 좌우로 나뉜 책의 판면 위에 글과 시각 자료를 ‘앉혔을’ 때의 모습을 상상한다. 독자의 가독성을 높일 수 있는 적절한 장과 절의 구성과 길이를 설계하고, 주석을 달 때 각주와 미주 중 어느 것이 종이책의 판면 위에서 독자에게 도움이 될지 고민한다. 표지를 구성하는 문안을 쓰고 어떻게 배치할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책의 장정으로서의 본연의 기능에 필요한 제작(인쇄와 제본)을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을 배운다.
편집자와 발행인 경력의 대부분을 종이책 인터페이스에 맞춰 편집하고 제작하는 사고훈련을 해온 나에게 종이책 이외의 매체로 책을 구상하는 일은 마치 ‘배운 적은 있지만 실시간으로 입 밖에 나오지 않는 외국어’와 비슷하다. 외국어로 사고하고 외국어로 표현하는 것처럼, 콘텐츠를 디지털 형식으로 구상하고 구현하는 일은 막연하다. 아직은 종이책으로 먼저 만들고 전자책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이런 편집의 일들을 전자책을 편집할 때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종이책에 적용되었던 편집의 방법을 그대로 전자책에 적용하는 게 맞을까? 종이책의 표지의 역할과 전자책의 표지의 역할은 다르며, 종이책의 색인 방식은 전자책에서는 무용하다. 우리는 전자책에 필요한 편집론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에 있지 않은가? ‘나는 종이책 편집자로 살 테니 전자책 편집기술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종이책은 죽지 않았지만 스크린 위에 있는 텍스트와 콘텐츠를 더 많이 읽고 있는 시대에 진입한 지 이미 오래인데 말이다.
종이와 스크린, 양손잡이 편집력이 필요한 시대
“읽기에 관련된 변수들을 하나둘 검토하다 보면, 텍스트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매체가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올해 초, 종이에서 스크린과 오디오까지 디지털 전환 시대의 독자들을 위한 최적의 읽기 전략을 다룬 나오미 배런 교수의 『다시,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출간했다. 학생들에게 읽기를 가르치는 교사의 입장에서 그리고 종이, 스크린, 오디오 등 지식 정보의 다매체 시대를 독자를 위해서 ‘어떤 매체가 학습에 가장 유리한지, 종이 읽기와 스크린 읽기의 차이가 어떻게 다른지’를 연구한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매체별 읽기의 전략이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자들은 종이로 읽을 때와 스크린으로 읽을 때 같은 텍스트도 다르게 읽고 내용을 이해한 정도도 다르다. 원고의 장르가 무엇인지, 읽기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따라 독자들은 다르게 읽고 다르게 반응한다.
『다시,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읽으며 내가 편집한 원고가 매체에 따라 읽는 방식과 그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실감했다. 나는 책을 만들며 매체별로 독자의 읽기 방식과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그것을 반영해 책을 만들었던 적이 없다. 머릿속에는 당연하게 종이책을 상상하는 회로만 있었다. 내가 편집한 원고가 종이에 인쇄되어 읽히지만, 때로는 스크린에서, 때로는 동영상과 오디오로 재생될 수도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자각이 부족했다.
내가 종이책에 익숙하다고, 나의 출판이 종이책만을 만드는 일로 멈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내고, 전자책에 필요한 새로운 환경을 설계할 자신은 없다. 그렇지만 내가 만드는 책이 종이책으로 전달될 때와 전자책으로 전달될 때의 차이가 무엇일지, 독자의 개인적 특성과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어떤 매체를 활용해 독서를 할 수 있을지를 고려하며 다매체 시대에 맞는 편집을 고민해야 할 때임은 틀림없다.
읽는 뇌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매리언 울프는 『다시, 책으로』에서 독자들에게 ‘아날로그와 디지털 매체를 넘나들며 깊이 읽기를 구사할 수 있는 양손잡이 문해력을 기를 것’을 제안했다. 디지털 전환기, 편집자에게는 ‘양손잡이 편집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독자를 중심에 두고, 종이와 디지털을 넘나들며 ‘이 원고는 어떤 매체에 적합할까’를 고민할 수 있는 그런 편집력이 출판사와 편집자에게 필요한 시대가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김형보 어크로스 대표 1999년 웅진출판에 입사하여 12년간 편집자로 일했다. 2011년 어크로스 출판사를 창업해 현재까지 170여 종의 종이책과 160여 종의 전자책을 출간했다. ‘지식이 지혜로 바뀌는 순간’이라는 모토로, 인문, 사회, 과학 분야의 교양서와 전문성에 기반을 둔 에세이를 출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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