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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8  202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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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상상]
한글과 글씨
소리 문자를 넘어 뜻 문자 한글 이야기

 

 

 

강병인(멋글씨가, 글씨연구가)

 

2023. 10.


 

한글의 제자 원리와 한글에 담긴 애민정신

 

오래전 문자가 없던 시절, 소리나 몸짓으로 전달하던 정보는 기록되지 못하고 곧장 증발했다. 그러나 인간은 정보의 증발을 막는 기호를 만들어 나무와 돌, 쇠 등의 도구로 기록을 남기고 고정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문자 덕분이다. 문자는 그 기능과 만들어진 원리에 따라 형태와 뜻을 표기하는 표의문자(表意文字)와 음형의 실체를 표기하는 표음문자(表音文字)로 분류한다. 음을 표기하는 문자로는 로마자, 한글, 러시아 문자, 아랍 문자 등이 있고, 뜻을 표기하는 문자로는 이집트 문자, 한자 등이 있다. 한자는 사람이나 자연 등 대상의 구체적인 형태를 바탕으로 만든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상형성(象形性)을 내포한다.

 

반면 한글은 하늘과 땅,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형상을 글자의 바탕 꼴로 삼고, 소리를 내는 발성 기관의 모양을 상형했다고 밝혀 놓은 바 있지만, 소리 문자의 가치만 주로 이야기되고 있다. 돌을 보고 돌 석(石) 자를 만든 한자처럼 적극적인 상형문자는 아니지만, 한글도 표음문자와 더불어 표의문자, 즉 뜻 문자의 자질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다가오는 한글 완성 580돌, 한글 반포 577돌을 맞아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밝혀 놓은 제자 원리를 바탕으로 소리 문자를 넘어 뜻 문자 한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443년 어진 임금 세종은 말은 있으나 제 문자가 없어서 한자를 빌려 쓰는 세태가 안타까워 문자를 몰라 핍박당하며 살아가는 일반 백성들을 가르쳐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배우기 쉽고 사용하기에 편한 훈민정음, 즉 한글을 만들었다. 한글에는 세종의 애민정신과 창조적이고 민주적인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한글의 핵심적인 제자 원리는 먼저 동양의 보편적인 세계관인 ‘천인지(하늘과 사람, 땅)’를 문자의 체계로 끌어 왔으며,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이치를 한글의 핵심 체계로 삼았다. 이러한 체계를 바탕으로 첫소리를 ‘하늘’, 끝소리를 ‘땅’, 첫소리와 끝소리를 이어주는 역할을 ‘사람’으로 나누고 합하는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극렬히 반대했던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그의 상소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소리를 나누고 합하는 원리는 세상에서 듣도 보도 못한 제자 원리인데, 어찌 이것이 새로운 문자 창제가 아닌 것이냐’며 세종께 따져 묻는 것이다. 맞다. 최만리가 말했듯 합자의 원리는 세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원리이다. 예를 들어 ‘ㅅㅜㅍ’처럼 풀어 쓰면 소리가 나지 않고 글자가 되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1)에서 밝혀 놓았다. 반드시 ‘숲’이라고 합자, 즉 모아써야만 글자가 되고 소리가 난다고 적어 놓은 것이다.

 

천인지 원리와 모아쓰기

천인지 원리와 모아쓰기(출처: 강병인)

 

 

나아가 발성 기관의 상형화로 자음(첫소리 초성과 끝소리 종성)을 만들고, 중간소리인 모음은 밤과 낮이 바뀌는 원리, 즉 음양의 변화를 끌어와 운용 원칙으로 삼았다. 태극을 놓고 보면 ㅓ가 ㅗ가 되고, ㅗ가 ㅏ가 되며, ㅏ는 다시 ㅜ가 되는 원리이다. ㅡ와 ㅣ도 마찬가지로 회전하는 원리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봄·여름·가을·겨울이 돌고 도는 순환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으며, 엉엉앙앙, 옹옹웅웅, 슬슬실실, 꼬불꼬불, 꾸불꾸불 등도 모두 순환의 원리로 다양한 소리를 적게 했다. 그래서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에는 ‘개가 짖는 소리, 닭이 홰치는 소리 등 세상의 모든 소리를 쉽게 적을 수 있다’고 했다.

 

순환의 원리

순환의 원리(출처: 강병인)

 

 

소리뿐 아니라 글의 뜻을 나타내는 한글

 

그렇다고 한글은 이렇게 소리만을 적게 한 문자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하늘과 땅,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이치를 담고 있기에 글이 가진 뜻마저도 표현하기가 어렵지 않다.

 

앞서 설명한 소리를 쉽게 적게 하는 모음의 순환의 원리를 가지고 글이 가진 소리뿐만 아니라 뜻이나 소리의 길이, 생명이 자라는 시간, 기운 등을 글씨에 담을 수 있다. ㅓ는 들어오는 기운, ㅏ는 나아가는 기운, ㅗ는 솟아나는 기운, ㅜ는 내려가는 기운, ㅡ와 ㅣ는 멈추고 서는 기운을 보이게 한다.

 

모음의 순환의 원리: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를 바탕으로 만듦

모음의 순환의 원리: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를 바탕으로 만듦(출처: 강병인)

 

 

예를 들어 ‘솟다’라는 단어는 ‘솟아나고 뻗어나가는 기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때 모음 ‘솟’자의 모음 ㅗ의 세로획의 길이를 위로 길게 하여 솟아나게 쓰고, 다시 이 모음 ㅗ를 90도 회전하여 ‘다’의 모음 ㅏ로 활용하면, 금세 ‘솟아나고 뻗어나가는 기운’을 보이게 할 수 있다.

 

솟다(강병인 作)

솟다(강병인 作)

 

 

여기서도 순환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한글 제자 원리는 세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문자의 운용 체계이면서 소리 문자와 뜻 문자의 자질을 동시에 드러내어 보여준다.

 

그리고 순 우리말 봄, 꽃, 똥, 칼, 놀자, 봄날, 햇살 등을 소리 내어 읽어 보면 소리와 글자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칼’이라는 글자를 ‘카알’ 하고 소리 내어 읽어보면 실제 ‘칼’과 닮아 있다. 이는 ‘우리가 쓰는 말을 문자화했기 때문에 소리와 문자가 다르지 않음으로 이치가 이미 둘이 아니’라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밝혀 놓은 ‘이기불이(理旣不二)론’2)을 잘 보여준다.

 

또한 꽃이나 똥, 칼은 대상을 직접 지시하고 있어서 표의문자의 자질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운율이 살아 있다. 봄날, 춤, 날자 등등 소리 내어 읽었을 때 드러나는 운율 등을 글씨로 표현하면 보이지 않던 소리나 마음, 뜻을 살려낼 수 있다. 그 예를 몇 가지 더 들어보겠다.

 

‘봄’이라는 글자는 땅(ㅁ)에서 싹이 나고 자라 가지(ㅗ)를 뻗고 마침내 꽃(ㅂ)이 피는 모습으로 글이 가진 뜻을 글씨로 표현할 수 있다. ‘꽃’이라는 글자도 뿌리(ㅊ)에서 가지(ㅗ)가 나오고 자라서 마침내 피어나는 꽃(ㄲ)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봄이 되면 땅에서 씨앗이 싹 트고 가지가 자라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무성하게 잎을 키우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고 낙엽이 되어 땅으로 떨어져 겨우내 영양분을 쌓아 다시 올 봄을 준비한다. 초성이 종성이 되고 종성이 초성이 된다는 체계(원형이정(元亨利貞))3)이다. 이는 바로 자연의 변화요, 순환의 원리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는 것도 이 원리이고, 글이 가진 뜻과 기운도 모두 이 원리로 드러난다.

 

봄(강병인 作), 꽃(강병인 作)

봄(강병인 作), 꽃(강병인 作)

 

 

우리말의 뜻과 소리를 형상화한 ‘멋글씨’

 

이렇게 우리말이 가진 뜻과 소리를 적극적으로 형상화하면 한글이 소리 문자의 자질과 함께 뜻 문자의 자질도 동시에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뜻이나 소리를 표현하는 방법에는 기존의 정형화된 활자로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활자는 정보를 왜곡하지 않고 전달하고 기록하는 데 1차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전통 서예나 서예를 바탕으로 한 멋글씨로는 보다 글이 가진 뜻이나 소리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 이유는 먼저 화선지와 먹, 붓, 벼루 등 문방사우에 있다. 필압이나 속도, 먹의 농담을 이용해 희로애락을 자유롭게 표현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글이 가진 뜻이나 소리를 적극적으로 글씨에 담아내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멋글씨’는 ‘서예’의 순우리말로 서(書)는 글씨, 예(藝)는 멋, 이를 합하면 ‘멋글씨’가 된다. 전통 서예와 멋글씨의 차이를 굳이 말한다면, 앞서 언급한 대로 멋글씨는 ‘글이 가진 뜻이나 소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에 있다 하겠다. ‘멋’이라는 말이 들어갔다고 해서 멋만 부리는 글씨가 아니라 ‘반드시 전통 서예를 바탕으로 한 글씨’를 멋글씨라고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에는 ‘정음 28자로도 전환이 무궁하며 간단하고도 긴요하고 정밀하고도 통한다.’라는 말로 한글 꼴의 다양성과 확장성을 말해 주고 있다. 하늘과 땅, 사람, 만물의 생과 사를 문자의 바탕 체계로 삼았기 때문에 자연의 이치와 소리, 인간의 삶이 문자 안에 이미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다. 한글을 소리를 적는 문자로만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얼쑤 좋다(강병인 作)

얼쑤 좋다(강병인 作)

 

 

 

1)
初中終三聲, 合而成音(초중종삼성, 합이성음). 初中終三聲, 合而成字(초중종삼성, 합이성자).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 세 낱글자가 합하여야 소리가 나고 글자를 이룬다.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 합자해.
2)
理旣不二(이기불이). 則何得不與天地鬼神同其用也(즉하득불여천지귀신 동기용야). 이치가 이미 둘이 아니니 어찌 천지 귀신(음양)과 함께 그 용(用)을 같이 하지 않겠는가? 강신항, 『훈민정음 연구』, 성균관대학교출판부, p131.
3)
一元之氣, 周流不窮(일원지기, 주류불궁). 四時之運, 循環無端(사시지운 순환무단). 일원(봄, 一元)의 기운이 두루 흘러 다하지 않고, 사시四時(봄·여름·가을·겨울)의 운행이 돌고 돌아(순환) 끝이 없는 까닭에(원형이정(元亨利貞)의 이치에 따라), 故貞而復元(고정이부원). 冬而復春(동이부춘). 初聲之復爲終, 終聲之復爲初, 亦此義也(초성지부위종 종성지부위초 역차의야). 정(貞, 겨울)에서 다시 원(元, 봄)이 오고, 겨울에서 다시 봄이 되는 것이니, 초성이 다시 종성이 되고 종성이 다시 초성이 되는 것은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 강신항, 『훈민정음 연구』, 성균관대학교출판부, p14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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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인 멋글씨가, 글씨연구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한글 서예를 시작하고,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1990년대 말부터 서예와 디자인을 접목한 멋글씨, 캘리그래피 분야를 개척하며 융합과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한글 글꼴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다. 한글의 창제 원리를 작품 철학으로 삼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네 삶과 소리를 담아낸 글씨를 선보이고 있으며, 소리 문자를 넘어선 뜻 문자와 한글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독립열사 말씀, 글씨로 보다〉 순회전 등 16회의 개인전을 개최하고,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 등 130여 회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한글의 디자인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를 확장해온 노력을 인정받아 2009년 한국출판인회의 선정 올해의 출판디자이너상을 수상하고, 2012년 대한민국디자인대상 은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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