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27 2021. 11.
[구매와 열독 사이, 책을 대하는 사람들의 심리 탐구]
강창래(작가)
2021. 11.
“사 두고 읽지 않는 책이 점점 많아집니다. 그래도 자꾸 사게 됩니다. 다 읽고 사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요. 작가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인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강의하고 다독하는 작가로 알려진 뒤에 공개강의에서 자주 받았던 질문들이다.
읽고 싶은 책은 사서 읽는다. 빌려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읽은 책은 서재 어디엔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언젠가 필요할 때 곧바로 그 기억을 되살릴 수 있도록. 그런 의미에서 내 서재는 내 독서 이력이기도 하고 내 생각의 지도이기도 하다. 물론 읽으려고 사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곧바로 읽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자주. 그러다 보면 쌓이게 되고, 읽지 않은 채 책장에 꽂혀 있기만 하는 책도 많다. 언젠가 읽긴 하겠지만 그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읽지는 않았지만 그 책이 대충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안다. 적어도 책 소개와 저자와 차례 정도는 읽고 그 책을 내 서재 어디쯤에 두어야 하는지 알고 사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처음 질문을 받았을 때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책만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집안을 둘러보라. 주변에 있는 물건들이 모두 당장 필요해서 샀던 것은 아니다. 언젠가 쓰일 것 같아서 산 것이 많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인 옷이나 음식 재료도 그렇지 않은가. 냉장고에는 오래된 먹을거리가, 찬장에는 건어물이나 통조림, 오래된 라면이나 국수도 있을 것이다. 냉동실 구석에는 아마 무엇인지도 모를 ‘얼음 덩어리’도 있을 것이고. 옷장에는 일 년 내내 한 번도 입지 않는 옷이 몇 벌은 걸려 있으리라. 이건 고대 이집트의 일상생활 기록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옷장에 옷이 많지만 ‘입을 옷은 없다’.
먹으려고 샀지만, 입으려고 샀지만, 사용하려고 샀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사용할 기회가 미뤄진 것들이다. 결국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지 모른다. 어느 집안이나 그런 물건들이 꽤 많다. 이사할 때 다들 절실하게 느낀다. 도대체 어느 구석에서 낯선 물건들이 끝없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산 책을 당장 읽지 않았다고 해서 이상할 건 조금도 없다. 사 두었지만 언제 읽을지 모른다거나 사 두고 끝내 읽지 않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책이 쌓여 있다고 해도 책을 좋아한다는 증거일 뿐 아니라, 언젠가 읽게 되리라고 생각하면 뿌듯한 기대감도 느낄 수 있다.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책은 매우 아름다운 장식이 되기도 한다. 책의 용도는 읽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벽돌 책은 목침이나 방어용 무기로도 쓸 수 있다. 총이나 칼로 뚫을 수 없다는 사실은 상징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필수품이다. 주변에 읽지 않은 책들이 적으면 불안하다. 언젠가 마음이 동해서 읽고 싶은데 그 책이 없거나 절판되어 구할 수 없으면 절망스럽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
혹시 동의가 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그 누구도 평생 책을 한 권도 사지 않았다거나 한 권도 보지 않은 경우는 없을 것이다. 한때는 자주 사야 했고 자주 읽어야 했을 것이다. 날마다 책을 펼치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한때는 필수품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 번 필수품이 영원한 필수품인 것은 아니다. 상황이 변하면 부수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책이 그렇다고 해서 이상할 건 조금도 없다.
그러나 책을 통해 이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지혜를 얻고, 그런 과정에 익숙할 뿐 아니라 그 과정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책이 필수품 목록에서 빠질 리 없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지식을 업데이트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어떤 매체보다 책을 통하는 것이 최선이다. 세상이 잘 변하지 않을 때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지난날의 지식으로도 ‘아직 그대로인 세상’에서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변하는 세상에서는 그게 안 된다. 새로운 세상에 맞는 새로운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남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만큼 현명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 더 나아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
주로 인문학을 주제로 글을 쓰거나 강의할 뿐 아니라 수필을 쓰면서 끊임없이 책을 읽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독서가 아무리 즐거운 일이라 해도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오랫동안 지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저 재미로만 읽는 것 같은 소설도 조금도 도움이 안 되는 경우는 없다. 가끔 독서나 문학이 실용적이지 않기 때문에 값진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식으로든 현실적으로 도움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지속가능할 리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독서가들은 어떤 책을 읽는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좋아하는 주제를 좋아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책’이거나 ‘당장 부닥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알려주는 책’일 것이다. 앞엣것은 즐거움 때문이고 뒤엣것은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구체적인 어떤 문제에 대해, 독자가 가진 궁금증에 대해 곧바로 답해주는 책은 드물다.
게다가 한 권의 책을 어떤 문제에 대한 답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어떤 책이든 그 내용은 저자의 편견이기 때문이다. 매우 감동적이고, 공감될수록 더 그렇다. 그 내용은 독자가 가진 고정관념을 잘 설명한 것일 확률이 높다. 그럴 때는 이런 경구를 떠올려 보아야 한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보다 한 권의 책만 읽는 사람이 더 위험하다.” 책 읽기를 즐기는 독자들은 절대로 ‘한 권만 읽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한 권’이란 물리적인 단위로서 ‘한 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좋아하는 저자의 책만, 좋아하는 종류의 책만 읽는 것도 ‘한 권’의 효과를 낸다. 그런 경우 책을 통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 큰 문제를 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꼭 싫어하는 저자나 자기 생각과 반대되는 내용도 읽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경우, 매우 공감되고 감동적인 책이라면 적어도 네댓 번은 읽는다. 정말 좋아하게 되면 수십 번 읽는다. 비판적인 독서로 읽을 때마다 새로운 내용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런 책 가운데 하나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월터 옹)이다.
여러 번 읽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사람들은 묻는다. 정독하는 것이 좋은지, 다독하는 것이 좋은지. 마치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렇지 않다. 책은 이 세상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하고 그 수도 많다. 다 볼 수도 없고, 다 읽을 수도 없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과 비슷하다. 만나는 사람 모두 깊고 중요한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한두 번 만나는 게 전부일 수도 있고, 여러 번 만나야 하는 경우도 있고, 자주 만나 깊은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만남이 더 중요한지를 잘 판단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다독하지 않고 정독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경우든 비교되어야 그 의미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비교의 범위는 넓을수록 좋다. 다독의 경험이 의미 있는 정독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역시 한 권의 책을 읽는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다양하고 많은 정독 경험이 매우 특별한 정독의 가치를 분명히 알게 해 준다.
오해가 좀 있을 수 있겠다. 매우 특별한 정독의 경험을 위해 의도적으로 다독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독하다 보면 저절로 정독할 책을 만나게 된다. 정독의 경험이 쌓이다 보면 매우 특별한 정독의 대상을 만나게 된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를 그렇게 만났다. 어린 시절부터 만화와 무협소설,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그리고 문학비평 책들을 거쳐 사회과학 분야를 꽤 넓고 깊게 섭렵한 뒤였다. 다독의 경험이 풍부했던 것이다. 이 책은 오랫동안 다독하면서 궁금해 했던 거의 모든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런 만큼 텍스트는 조금 어려웠다. 일단 한 번 통독한 다음 다시 되풀이해서 꼼꼼하게 한 줄 한 줄 새기며, 검증하며 읽었다. 책에서 언급된 다른 책들을 찾아 읽었고, 그에 대한 ‘다른 평가’들까지 챙겨 본 다음 다시 이 책으로 돌아와 ‘비판적으로 읽었다’. 그 과정에서 질문이 떠오르면 기록해 두었다. 그에 대한 답이 될 가능성이 보이는 책이 있으면 모두 사 두었다. 곧바로 읽기도 했지만 그러지 못하면 언젠가 읽게 되리라 믿었다.
필자에게는 이런 식으로 매우 특별하게 정독한 책이 여러 권 있다. 그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과 비극을 다시 꼼꼼하게 읽었고, 19세기 이후, 그리고 현대 문학을 섭렵했으며 근현대 철학까지 독파했다. 근현대 철학의 경우 한 권이 아니라 적어도 수십 권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러한 다독과 정독 과정에서 자연과학과 예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야 통섭이 가능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진지한 독서는 더 많은 책을 읽게 만든다.
그냥 생각해 보아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 삶은 단순하지 않다. 의식주 모든 것에 걸쳐 있고, 현대의 삶은 다양한 ‘네트워킹’의 결과이다. 그 네트워킹은 현대적인 ‘과학기술’의 원인이면서 결과이다. 웬만큼이라도 잘 이해한 다음 선택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려면 ‘삶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 지식은 끊임없이 변한다. 늘 새로운 지식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는 책 한 권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책 읽기를 좋아했다. 운이 좋았던 셈이다. 어린 시절에는 책읽기가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독서가 세상을 좀 더 잘 이해하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가능케 해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책 읽기를 즐기지 않았다면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지금은 2만 권쯤의 책을 가지고 있다. 집의 벽은 거의 전체가 책꽂이로 뒤덮여 있다. 방문한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 이 많은 책을 다 보았느냐고. 대개는 웃음으로 답한다. 굳이 말해야 한다면, 다 본 것이기도 하고 보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네댓 번 읽으며 정독한 책도 많다. 그게 어떤 것인지는 다 기억하지 못 하지만. 정독하면서 참고자료로 뒤적인 책은 더 많다. 잠깐 보았기 때문에 역시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 읽지도 않고 꽂아 두고 잊어버린 책도 많을 것이다. 드물지만 같은 책이 두 권이나 세 권이 있는 경우도 있다. 보고 싶을 때, 필요할 때 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얼마 전에는 한국문학에 대한 글을 쓰면서 ‘오래된 문학전집’ 가운데 한 권을 찾아보았다. 35년 전에 만들어진 책이다. 편집자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적어도 네댓 번은 읽었던 것이다. 거의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을 지내면서 두세 번 정도 꺼내 보았을 것이다. 지금은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책들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을 제외하면 그 어디에도 없다. 내가 사 두는 책들 가운데에는 그런 것이 많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948년에 출간된 『근원수필(近園隨筆)』이다. 30년 전쯤에 우연히 헌책방에서 구한 것인데, 꽤 비싼 값을 치렀다. 한국문학에 대해 글을 쓰면서 초판을 구해 보던 때였다. 이건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없을지 모른다.
최근에는 7년쯤 전에 사둔 책을 읽고 있다. 크고 두꺼운 미술책이다. 크기는 대충 23cm×29cm이고 1,240쪽 분량인데 두꺼운 종이에 컬러 인쇄를 했기 때문에 책 두께가 6cm 정도 되고 무게는 4kg이나 된다. 책값도 30만 원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대는 이미지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이미지의 영향을 받고 있다. 길거리의 풍경이나 TV 드라마, 영화가 그런 것이다. 그 이미지들을 비판적으로 읽어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술사를 공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많이 읽는 책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이다. 그러나 이 책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서양미술사』는 1951년에 출간된 책이다. 그동안 여러 번 개정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너무 오래 전에 쓰인 책이다.
새로이 구한 미술사 책은 『Art History』(Marilyn Stokstad, Pearson Education)이고, 전 세계의 미술사를 종합적으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한국어판은 없다). 대학이나 대학원 교재로 쓰이는 것인데 베스트셀러이기도 했다. 2008년에 초판이 출간되었고 2016년에 6번째 개정판이 나온 최신간이었다. 처음 구했을 때는 차례와 서문만 읽고 꽂아 놓았다. 2년쯤 지난 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필요한 부분을 일부 읽었다. 그러고는 다시 책장을 장식만 하고 있었는데 요즘 다시 이 책을 자주 본다. 최근에 미술사를 주제로 격주간지에 연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저작물의 종이책을 구할 수가 없다(헌책은 있지만). 현재 미국 지역에 한해서 ‘대여’만 하고 있다.
책은 사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독해’가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다 읽지 않은 책들이 모인 서재는 세월과 함께 나만의 도서관이 된다. 그곳에는 당연히 도서관의 천사가 살고 있다. 책장을 거닐며 책을 찾을 때 그것과 함께 어떤 책을 더 읽으면 좋을지 안내해 준다. 사서 읽었지만 오래 전이라 잊어버린 책, 샀지만 읽지 않은 책이 그 순간 빛을 발한다.
세 번째 질문에도 짧게 의견을 표명하고 싶다. 나는 책을 살 때뿐만이 아니라 ‘게임’이나 비디오를 구할 때에도 언제나 기꺼이 비용을 지불한다. 책을 위한 비용 지불이 게임이나 비디오에 비하면 일고여덟 배는 되겠지만. 그럴 만큼 여유가 있어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가난했던 젊은 시절에도 책을 많이 산 건 마찬가지였다. 책을 좋아했고, 꼭 필요했으므로 배고픔을 참고 책을 사 보았다. 먹기보다 읽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당시에도 게임이나 영화를 좋아했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의식주를 제외하면 책을 사는 데 돈을 가장 많이 쓴다.
사회심리학을 공부해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사회의 평균적인 행동양식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미래사회가 책을 많이 읽기를 원하고,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책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다. 독서는 다른 매체와 달리 반자본주의적인 경향이 강하다. 고정관념과 보수적인 행동양식을 바탕으로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서를 즐기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들은 게임이나 비디오, 또는 그 비슷한 것에 쉽게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그것들은 수동적이고 보수적이라 편하기 때문이다. 그 점은 관객 스포츠와 플레이어 스포츠의 관계와 비슷하다. 직접 행동해 보면 저절로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이 생긴다.
독서 과정은 플레이어 스포츠 같은 것이다. 가끔 사람들은 ‘비판적인 독서’가 ‘부정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 지금 현재 시스템의 그 어떤 것도 완전할 수 없고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비판적인 사고방식은 완전해지기 위해 개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과정이다. 어떻게 그보다 더 긍정적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스템이든 유지하는 것은 보수적이고 적응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창의적이고 진보적인 사람들보다 보수적이고 적응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아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강창래(작가) 인문학 전문 작가로 건국대학교와 중앙대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책의 정신』(2013)으로 한국출판평론상 대상을 수상했다. 대학과 도서관에서 특강 형식으로, 20년 넘게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베스트셀러로는 『인문학으로 광고하다』(2009), 본격적인 인문학 저작물로 『문학의 죽음에 대한 소문과 진실』(2022)이 있다. 수필집으로는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2018)가 있다. 이 수필집은 한석규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되어 왓챠에서 12월부터 방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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