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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8  20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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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디자인’의 오늘과 내일]
출판 디자인 실무자를 위한 조언

 

 

 

심우진(산돌연구소장)

 

2022. 11.


 

모르는 사람에게 글로 조언을 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하지만 필요할 때도 있다. 그래서 써보기로 했다. 먼저 ‘누구’를 위한 글인지부터 생각해보았다. 청탁받은 주제의 제목을 보니 ‘실무자’다. ‘실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실제의 사무’란다. 도움을 받지 못했다. 회사에서의 경험을 떠올려보니, 직무와 실무로 나누어 말할 때가 많았다. 직무는 직책상 맡는 일이고, 실무는 상황상 맡은 일이다. 일본어 사전을 찾아보니 직무는 일반적인 업무 영역이고 실무는 눈앞의 구체적인 일이다. 예를 들어 편집자가 편집을 하면 직무고 북 디자인을 했다면 실무다. 편집자가 편집을 하면 직무고 저자를 설득하여 힘든 계약을 성사시켰다면 실무다. 그러니 실무를 위한 조언은 그 업에 대한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이야기라기보다는 눈앞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실용적 잡기(雜技, 잡다한 놀이의 기술이나 재주)에 가깝다. 지금껏 국내외 유수의 가문을 찾아다니며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잡기를 수집해왔으나, 아쉽게도 후계자 책봉에 실패하여 그 핵심을 이곳에 시원하게 누설키로 한다.

 

갑자기 생기거나 바뀌는 일의 기분

 

일이란 미꾸라지처럼 항상 계획을 빠져나간다.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일에는 딱히 담당자가 없다. 먼저 발견한 사람, 현장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매우 성실한 사람, 그나마 덜 바쁜 사람, 멍청한 사람 등이 처리한다. 실무라는 게 그렇다. 못하면 욕을 먹고 잘하면 은근슬쩍 내 일이 된다. 실무 비중이 커질수록 나의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 같고 앞날이 뿌예진다. 정작 자기 일은 못하고 잡기만 느는 기분이다. 이 회사에서 일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이 커진다. 이럴 때일수록 직무와 실무의 비중을 꼼꼼히 따져야 한다. 직무의 비중이 크면 어느 정도의 실무는 불가피한 것이니 적당히 즐기면 되지만, 실무의 비중이 크면 변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뜻으로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특히 소통 체계나 의사 결정 과정이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 이 글은 정상적인 실무 환경을 전제로 한다.

 

얼마 전 평화롭던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있었다. ‘끼야악-’ 방에서 아내의 숨 가쁜 비명이 들리더니 제법 큰 쥐 한 마리가 유유히 방을 빠져나와 주방 쪽으로 달아나 종적을 감췄다. 아파트 9층에서 벌어진 일이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방문을 모두 닫고 기어들어갈 곳을 모두 차단한 후 숨어 있을 만한 곳을 하나둘 뒤졌다. 추적 끝에 도망쳐버렸지만 덕분에 들어왔던 구멍을 찾았다. 쥐는 사라졌지만 쥐잡기 실무는 이제부터였다. 아파트 관리소장은 반드시 쥐를 생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서식하며 다른 집을 가도 문제고 쥐약을 먹고 벽 속에서 죽어도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아파트에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단호했다. 하지만 쥐는 잡히지 않았고 주방 벽 속을 부지런히 나돌며 쓱싹쓱싹 서걱서걱 찍찍 소리를 냈다. 소리가 보인다고 할까. 적나라했다. 급상승하는 망상과 스트레스 속에서 우리는 쥐가 언제부터 난입하기 시작했는지를 알아야 했다. ‘이럴 때는 쥐똥을 찾아야 해.’ 나도 모르게 떠올랐다. 단 한 군데에 있었고 찰지게 윤기가 흐르는 상태였다. 얼마 안 됐구나. 근거를 찾으니 조금씩 마음도 가라앉았다. 안정을 찾은 아내는 의연하게 대응한 남편의 존재를 뒤늦게 깨닫고 고맙단 말을 전한다. 세상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군대 쥐잡기가 25년 만에 아빠의 실무로 부활했다.

 

계획한 일을 잘 해내는 능력은 중요하다. 또한 측정하기도 쉽다. 반대로 예상하지 못한 일을 해결하는 능력도 중요한 시대다. 그러나 순발력과 임기응변은 잡기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잡기의 성과를 측정하여 연봉에 반영한다는 회사는 못 들어봤다. 그렇다면 잡기의 명예 회복을 위해 더욱 그럴듯한 말로 바꿔주자. 오늘 하고 싶은 말은 창의력이다. 다양한 경험에 기반을 둔 발 빠른 창의력은 실무력의 원천이다. 실무의 존재와 중요성을 인정할수록 갑자기 튀어나온 일을 대하는 자세는 ‘또 왔니?’가 아니라 ‘어서 와’가 된다. 영양소로 치면 단백질이다. 열심히 운동만 한다고 반드시 근육이 붙는 것은 아니고 적절한 단백질 섭취도 병행되어야 한다. 직무와 실무는 운동과 단백질처럼 상호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노력이 결과를 맺게 만든다.

 

실무의 극비, 품앗이

 

어려울 때마다 빠지는 덫 중 하나가 혼자서 끙끙대는 거다. 정성껏 문제를 낳고 품어서 부화시킨다고 할까. 실제로 일을 잘하는 사람은 잘 부탁한다. 잘 부탁한다는 것은 부탁할 사람(믿을 만한 사람)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은 언제든 자기도 부탁을 받았을 때 응해야 하는 품앗이 관계라는 뜻이다. 빚을 지고 갚으며, 플러스-마이너스-제로를 지향하는 관계가 실무적 인간관계의 핵심이다. 그러려면 주고 받는 것(give and take)이 필요하다. 먼저 줘야 받을 수 있다. 물론 회수율은 떨어진다. 책 10권을 빌려줬는데 3권만 되돌아왔다. 이 상실감이 크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회수 시기는 내가 정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마이너스로 보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은근슬쩍 내 책상에 꽂아 놓고 가버리는 부지불식간의 회수도 있다. 그러니 정확한 회수율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세상엔 단 것만 쪽쪽 빼먹는 체리 피커도 있지만 부지불식간에 복리로 갚는 사람도 있다. 결국 정산은 죽을 때 하는 것이니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동서고금의 현자가 말하길, 베푸는 삶이 남는 장사라고 한다.

 

출판 디자인 실무의 시작

 

찾아보면 어딘가에서 내가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뒤집어 말하면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여럿 있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출판 디자인 팁은 이미 유튜브에 있다. 마음에 드는 채널 몇 개만 구독하며 1.5배속으로 훑는 정성만 들여도 충분히 좋아질 수 있다. 그래도 안 되면 관계자 서너 명만 알아 두어도 카카오톡으로 상당 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 정보가 부족해서 못하는 시대는 아니다. 정작 실무의 발목을 잡는 건 선명하지 않은 범위다. 밑도 끝도 없이 망망대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니 즐기기보다는 줄이거나 피하고만 싶다.

 

따라서 앞서 말했듯 실무의 적당량을 파악해서 직무와의 비중을 맞추는 것이 좋다. 일이 넘치면 몸도 망치고 효율도 떨어져 모두에게 손해니 노사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낯선 것을 거부하는 본능을 잠재울 여력이 생긴다. 실무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그걸 내 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여기에 적잖은 에너지(각오)가 필요하므로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시작한 실무가 숙련기를 거쳐 직무가 되면 멀티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조직적으로도 꽤나 유용한 옵션이다. 그러니 출판 디자인 실무도 차근차근 단계를 밟는 것이 좋다. 크기가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여러 쪽이 있는 것으로 차근차근 난이도를 올려보자.

 

예를 들면 작은 명함 하나부터 시작하는 거다. 예전에는 인쇄소에 직접 발주를 해야 했지만 요즘은 웹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손쉽게 주문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재미있을 것’이다. 너무 잘하려고 하면 안 된다. 처음이므로 결코 잘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함 디자인의 난이도는 꽤나 높다. 좁은 공간에 보기 좋게 정보를 넣기란 의외로 어렵다. 적당히 숨을 곳조차 없어 기본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러니 잘하려고 하면 싫어지기 마련이다. ‘하다보면 늘겠지’ 하는 자세가 딱 좋다. 그러다 재미가 붙으면 온갖 디자인이 선생으로 보이며 세상이 나한테 말을 걸어온다. 무관했던 세상과 이어지면 실력은 알아서 는다. 그렇게 실무는 일상을 관찰하며 삶의 외연을 넓혀주는 기폭제다.

 

일상의 레이아웃, 사진 찍기

 

사진은 화면을 보며 적당한 시기에 셔터를 누르면 찍힌다. 중요한 것은 적당함의 조건이다. ① 피사체가 적당한 위치에 있고, ② 초점을 원하는 지점에 맞추고, ③ 외곽에 불필요한 사물이 들어왔는지 확인한다. 적당한 위치를 찾는 그리드 중 대표적인 것이 삼분할 원칙(Rule of thirds)이다. 삼분할 원칙이란 화면을 가로 세로 각각 3등분하는 그리드 위에 피사체를 맞추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다를 배경으로 선 사람을 찍는다면, 세로선 위에 사람이 오도록 맞추고 가로선 위에 수평선이 오도록 맞추면 안정적인 구도가 나온다. 대부분의 스마트폰 카메라에도 있는 기능이다. 초점은 깊이를 만들 때 쓴다. 주변을 아웃포커스하면 초점에 집중하기 쉽다. 여기를 봐달라는 메시지를 매우 뚜렷하게 전할 수 있다. 외곽에 불필요한 오브제를 빼는 것도 집중하기 위함이다. 결국 사진 찍기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일의 원리이자 디자인의 원리를 몸으로 익히는 좋은 도구다. 바쁜 와중에 옆에서 말을 걸어오고 전화까지 울리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선택과 집중’을 몸에 익히면 디자인을 못하는 것이 오히려 힘들다.

 

(좌) 삼분할 원칙을 표시한 화면, (우) 삼분할 원칙을 적용하여 찍은 사진

(좌) 삼분할 원칙을 표시한 화면, (우) 삼분할 원칙을 적용하여 찍은 사진

 

 

 

출판 디자인의 시작, 글자

 

글자를 다루는 일을 타이포그래피라고 한다. 출판 디자인 실무를 즐기려면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글씨 쓸 일을 조금씩 늘리는 게 좋다. 수첩에 메모를 하거나, 포스트잇에 몇 자 적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습관을 들이거나, 매일 밤 일기를 쓰는 것도 좋다. 펜도 다양한 것을 써보는 게 좋다. 비싸지 않아도 된다. 연필, 볼펜, 수성펜, 만년필 등 종류도 많다. 펜을 고르면 수첩도 고르기 좋다. 핵심은 역시 종이다. 잉크가 퍼지는 맛 또는 잉크가 종이에 올라타는 정도, 펜과의 마찰 지수를 느끼면 재미있다. 이런 조건에 따라 글자의 모양도 달라진다. 혹시 만년필을 택했다면 잉크도 골라보자. 세상에 얼마나 많은 파란색이 있는지 겪게 된다. 카카오톡의 테마나 바탕화면을 바꾸듯 폰트를 바꿔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적잖은 기분전환이 된다. 웹에서 멋진 폰트를 보면 저장해두거나 마음에 드는 폰트를 볼 때마다 사진으로 찍어두는 것도 좋다. 폰트 이미지를 올리면 어떤 폰트인지 알려주는 폰트 검색 서비스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글자의 흥을 알게 되면 폰트를 고르는 재미도 늘고 안목도 좋아진다. 같은 폰트도 작게 썼을 때와 크게 썼을 때 느낌이 크게 달라진다. 마치 20살 적 나의 얼굴과 40살 적 얼굴의 차이만큼 다르다. 그런 게 보이기 시작하면, 디자이너들이 왜 그리 폰트에 집착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폰트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1단계다. 그러나 출판 디자인에서 쓰는 폰트는 독자를 고려해서 골라야 하기 때문에 취향만 내세울 수는 없다. 따라서 대화가 필요하다. 1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여기서 막힌다. 함께 대화하며 현 상황에 걸맞은 폰트를 고를 수 있게 되면 2단계에 들어선 거다. 그러다 어느새 나만의 판단으로 폰트를 고르고 디자인을 할 수 있게 된다면 3단계다. 왜 이렇게 했는지에 대해서도 담담히 말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디자인 과정에는 의외로 대화가 많이 필요하다. ‘나는 작업으로 말한다.’라는 말은 0.01%의 디자이너만 부릴 수 있는 허세다.

 

독학의 정석, 구체적으로 따라 하기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 인디자인 등의 그래픽 도구를 가볍게 익혔다면, 마음에 드는 작업을 그대로 따라 해보는 것만큼 좋은 학습은 없다. 예를 들어 멋진 책 표지를 발견했다면, 이미지를 바탕에 깔고 그대로 따라 그릴 수 있다. 어차피 연습용일 뿐이니 표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따라 하기는 목표를 구체적으로 한정하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명료해서 좋다. 그만큼 진도도 뚜렷하게 보이니 조금만 열심히 해도 금세 성과가 보인다. 그것도 어려우면 비슷할 정도까지만 따라 하면 된다. 그 정도만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뚜렷하게 알게 된다. 이때부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므로 매우 중요하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았다면 남은 건 시간 문제다.

 

일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것, 즉 큰일을 작은 일로 쪼개는 것은 어려운 일을 쉽게 해내는 좋은 방법이다. 웹에 쓸 배너를 디자인해야 한다면 이미 있는 것 하나를 골라 그대로 따라 한다. 여러 번 반복한다. 하나를 만들 때 걸리는 시간을 재어본다. 나는 ‘이 정도의 일을 이 정도의 수준으로 하는 데 이만큼의 시간이 걸린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견적력’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적 인간의 기본 소양이다. 누군가 ‘언제까지 가능해요?’라고 물었을 때 언제까지라고 정확하게 답하면 모두에게 두터운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맺는 말

 

실무는 음식으로 치면 후식이나 간식, 삶으로 치면 취미나 여가와 닮았다. 핵심은 아니지만 잘게 흩어져 이곳저곳 틀어진 삶의 균열을 부지런히 메우는 살림꾼이다. 세상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애당초 계획은 세상의 흐름대로 만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이다. 그러니 계획은 늘 틀어지기 마련이고 틈틈이 바꿀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실무는 그런 유연함을 뜻한다. 물론 재차 강조하지만 실무의 전제는 뚜렷한 직무다.

 

심우진

심우진 산돌연구소장

산돌연구소(https://www.sandoll.co.kr)의 소장을 맡고 있다. 타입 디렉터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simwujin@gmail.com
인스타그램: @simwu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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