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Vol.6  2019.09.

게시물 상세

 

학술잡지들의 고전(苦戰) :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인터뷰

 

 

 

김보경(지와인 대표)

 

2019. 09.


 

학술적 성격의 잡지들, 그중 계간지들은 대학—독자-출판, 이 세 곳의 생태계를 잇는 가교역할을 해왔다. 일간지, 주간지 등에 비해 긴 분량의 텍스트를 다루는 데다, 역사, 인문, 사회, 문학 등 각각 주요한 자기 분야를 갖고, 그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필자들 대부분이 대학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이며, 이 연구자들이 학술 잡지를 통해 대중적 글쓰기의 예비 단계를 거친다는 점에서도 학술지가 출판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대학과 출판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학술지가 가진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듣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여러 계간지 중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적 주제를 주로 다루는 계간지 《황해문화》 전성원 편집장과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한국 출판과 대학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 편집자 주

 

전성원(황해문화 편집장)


전성원(황해문화 편집장)

 

《황해문화》를 비롯해 학술적 성격의 잡지들, 특히 계간지들은 미디어지만 출판, 특히 인문 분야 단행본 출판과도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습니다. 학술지들이 출판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학술지들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계간 《황해문화》를 만들어 온 것이 지난 1996년(11호)부터 2019년 현재(104호)까지입니다. 햇수로는 23년째 계간지 만드는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황해문화》를 학술지라고 생각하고 만든 적은 없어요. 다만, 계간지의 특성이 다른 잡지 저널리즘과 달리 ‘되감아본다’는 의미에서 리뷰(review), 비평을 잡지의 중요한 역할로 삼는다는 점에서 학술적인 측면이 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출판—대중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죠.

 

지금 질문에서 ‘대학’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대학 구성원을 이르는 말이겠지요. 저희 같은 매체 입장에서는 ‘필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황해문화》는 다른 계간지들과 달리 출판사가 만드는 잡지가 아니라 인천의 시민재단인 새얼문화재단이 발행 주체이기 때문에 단행본 출판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희 잡지를 통해 연재되었거나 또는 저희 잡지를 통해 발견되거나 재발견된 필자들이 이후 책을 출판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황해문화》가 가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맞습니다.

 

출판에서 ‘필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입니다. 그 지식인들이 모여 있는 생태계가 대학이라는 점에서 학술지와 대학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고 생각되는데요.

 

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지식인이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들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지식인의 기원을 두 가지 갈래로 보는데 하나는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 다른 하나는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형성된 ‘인텔렉츄얼(intellectual)’을 들 수 있을 겁니다. 두 개념 사이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지만, 그것이 실제 행동이든, 학문적 실천이든, ‘사회참여(앙가주망, engagement)’를 통해 발언하는 이들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에는 지식인들이 직접 ‘잡지’를 창간하거나 필진으로 참여하여 현실사회에 대해 비판적으로 발언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도 해방 이전부터 잡지가 지식인과 작가들의 지적 근거지 역할을 해왔고, 장준하 선생이 펴낸 《사상계》를 비롯해 《청맥》이 있고, 1970~80년대의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실천문학》, 《역사비평》 역시 자신의 영역에서 지식인 사회와 출판 그리고 대중을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해왔습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찾아와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지적인 분석 작업이나 깨달음은 현실보다 다소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지만, 현실이라는 회색빛 안개 속에서 저 멀리 희미하게 비추는 등대처럼 이들 잡지는 시대의 좌표 역할을 해왔던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학술계간지는 ‘현실(대중)’과 ‘학문(지식인‧대학)’ 그리고 다시 현실을 잇는 가교로서 서로 삼투압하는 공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학술지가 기획을 하고, 저자를 발굴하는 과정은 마치 단행본 출판의 ‘전야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과거에 비해 필자 발굴, 특히 대학 내부의 연구자들을 필자로 발굴하는 과정에서의 변화가 있는지요?

 

본질적으로 큰 변화가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애써 찾고자 하면 여전히 사회문제를 고민하는 지식인, 대학 교수들이 있고, 그들 역시 여러 경로로 사회적 의제에 대해 발언하고, 반대로 자신의 의견을 사회적 의제로 제시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문제는 그런 필자를 발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거겠죠.

 

사실, 새로운 그리고 눈에 띌만한 필자의 고갈 현상은 대부분의 계간지들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신문 칼럼 같은 짧은 호흡의 글에서 반짝이는 필자들은 종종 발견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느 정도의 내공을 갖추고 있는지 판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계간지는 기본적으로 200자 원고지 80매에서 100매 분량의 글을 요구하는데, 사실 축적된 디지털 데이터의 양이 있기 때문에 분량을 채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질적인 부분인데, 자료의 나열이나 제시가 아니라 결기와 통찰 그리고 대안을 갖춘 신진 필자를 찾는다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실천문학》, 《역사비평》, 《황해문화》 등 수많은 계간지들을 통해 각 분야 석박사들의 좋은 글과 저자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들의 글이 단행본 저자로도 이어지는 생태계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생태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씀 같습니다. 왜 이와 같은 생태계가 없어지고 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처음 편집자로 일할 무렵만 하더라도 높은 산처럼 우러러보던 계간지들, 옆에서 든든한 동료로 서로 경쟁도 하고, 영향을 주고받을 만한 잡지들이 당시에는 상당히 많았습니다. 사실, 90년대만 하더라도 제2의 잡지 전성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양한 목소리와 감각으로 무장한 새로운 잡지들이 대거 출현했지요. 예를 들어 ‘서태지 현상’과 함께 등장했다고 할 만한 《리뷰》 같은 잡지가 있었고, 《당대비평》 역시 매우 진지하면서 주목할 만한 시선을 제공했지요. 잡지쟁이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큰 보람이 아직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새로운 필자를 발굴하는 것일 텐데요.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라고 오늘날 명성을 얻은 저자들 중 많은 수가 그런 매체들을 통해 처음 발굴되고, 독특한 시선과 감각이 담긴 글이 주목받게 되어 여러 매체에 동시다발적으로 글을 게재하면서 알려지게 되었잖아요. 그런데 여전히 과거의 명성을 유지하는 잡지들도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그 시기에 등장했던 잡지들이 시나브로 하나둘씩 사라져 버린 상황이죠.

 

다양한 종이 함께 살아야 건강한 생태계가 되는 것처럼 지식생태계 역시 때로는 서로 경쟁도 하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할 수 있어야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는데, 현재의 상황은 ‘가교’ 역할은커녕 생존하는 일도 어려울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잡지란 지식인들의 오아시스이자 숲과 같은 공간인데 잡지가 사라지면서 지식인들이 대중과 만나는 공간도 줄어들고, 많지는 않아도 적은 고료나마 생활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지면이 사라지고 있는 형국이죠.

 

어쩌면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지식인들이 재생산되지 않으면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게 아닐까요. 특히 대학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지식계라는 숲이 커야, 그 안에서 출판이라는 열매를 맺는 게 아닐까요.

 

지식인이 숲인지, 잡지가 숲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실은 독자 대중이 숲일 수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숲이 줄어들고 있다는 겁니다. 숲이 줄어들다보니 그 숲에 기대어 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죠. 출판 편집자들을 만나면 제가 종종 던지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요. 한국에서 인문사회과학 베스트셀러가 만 부 이상 나가기 어려운 이유는 인문사회과학 출판을 담당하는 편집자 수가 다 합쳐서 딱 그 정도라 그렇다고요. 대학 교수들이 책을 별로 사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은 아니겠지만, 과거 중요한 독자층이었던 청년‧대학생 독자층이 엄청나게 줄어든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결국 좋은 콘텐츠를 생산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지 않을까요? 앞에서 좋은 저자와 좋은 원고를 찾기 어렵다고 토로하셨습니다. 대학에서 이른바 ‘글 잘 쓰는 교수’를 찾기 어려워졌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문제의 핵심은 사회의 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의 위기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일단, ‘글 잘 쓰는 교수’란 의미가 강의 잘 하는 교수나 연구 잘 하는 교수와는 또 다른 의미일 텐데, 우리가 흔히 ‘글 잘 쓰는 교수’라고 할 때는 일단 자기 분야의 전문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연구’를 열심히 한 분이어야겠지요. 그런 분들이 나오지 않는 건, 무엇보다 대학 존립의 이유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대학이 스스로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일어난 변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대학은 스스로도 학문의 전당이라고 자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학생복지로 이야기되던 영역조차 촘촘하게 장사하는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대학 교수라는 것이 과거에는, 사실 아주 옛날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사회현실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 발언하고, 현장 활동을 통해 대안을 찾아 제시하고, 대중과 소통하여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였던 시절이 있었지만, 오늘날의 대학교수란 평범한 직장인에 가까운 듯합니다.

 

저희가 지역에서 잡지를 발간하지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에 거주하면서 지역문제에 시민으로 직접 참여하는 교수를 찾아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건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사회 영역에서 직접 활동하면서 현장을 경험하고 발언하는 사람을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막스 베버는 “전문직 종사자는 지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에 의존해서 산다”고 말했습니다. 직업적 역할이나 직업적 기능이 지식을 다루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프로페셔널로서 판매하기 위한 지적 기능만을 쌓아왔다면, 정신노동자이고 기술자라고는 할 수 있어도 지식인이라 부를 수 없다는 말이죠. 자기 영역에만 치우치지 않는 지적 능력, 일반화할 수 있는 능력, 자유로운 사색과 참신한 관찰, 창의적인 호기심, 근본적인 비판 능력을 갖춘 지식인들을 만나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전성원(황해문화 편집장)


전성원(황해문화 편집장)

 

비판의 능력은 어느 사회나 새로운 세대에서 더 큰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대학의 차세대 연구자들이 새로운 지식인으로 올라와야 합니다. 그런데 각 분야에서 눈에 띄는 ‘젊은 차세대 연구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10여 년 전, 20여 년 전에는 대학원생이어도, 주요하게 발언하고 글을 쓰는 필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의 이유가 무엇일가요?

 

이 문제는 우리 시민사회의 공적 영역 대부분에서 후속 세대를 육성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오늘날 명망 있는 학자들 중 상당수는 대학원생 때부터 이미 사회적으로 발언해온 이들이 많지요. 당시의 특수성이기도 하고. 당신들이 살아온 삶을 존경하기는 하지만, 이 분들이 대학에서 청년들을 오래 만나왔다고 하더라도 스승의 위치에서 지금 현실을 바라보는 것과 당사자로서 그들 자신의 문제로 느끼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글이 수준 높고 깊이 있는 지식이 담긴 글이란 의미만이 아니라면 지금의 독자와 소통하고, 공감을 끌어내는 글은 최근에 자신이 직접 부대끼면서 느낀 현실의 문제에 대해 다소의 깊이는 포기하더라도 그만한 결의와 의지를 담은 글이 대중의 입장에서는 더 좋은 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럴 여유가 별로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지식인도 인간이기 때문에 생활이 안정되어야 사회 문제에도 더 관심을 가지고 나설 수 있을 텐데. 그 같은 활동력을 갖추고 있는 이들은 대학에서 자리 잡기 위해 다른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경우가 많지요. 또 간신히 대학에 자리를 잡더라도 정년 보장을 받기 위해서는 연구논문 실적을 채우기에 급급한 상황이죠. 이것만이라면 그나마 다행인데, 대학에서 젊은 교수를 뽑는 이유가 대학 내에 필요한 여러 업무 처리를 위해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잡무가 많기도 하고요. 일단 대학 사회 내부에서 그런 의미의 ‘좋은 글’에 대한 평가가 매우 박하죠.

 

어떻게 하면 대학을 비롯한 학술 생태계가 대중적 저술 활동에 참여하는 일이 활성화될까요?

 

지금이라고 해서 대학이 저술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여전히 많은 분들이 훌륭한 연구를 하고 있고, 과거와 비교해보면 우리의 학문적 역량이 이 정도로 높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다양하고, 심도 있는 저술들도 출판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학진 체제’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지만, 전문 연구 영역에서 일정한 축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학진(과거 한국학술진흥재단, 현재 한국연구재단)의 역할이 작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저 이외에도 많은 분들이 이미 지적하셨을 텐데, 연구 성과에 대한 정량적인 분석 이외에도 질적인 측면에서의 배려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처럼 깊이 있는 연구가 지식인들끼리만 논의되는 수준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좀 더 대중화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겠지요.

 

생각해보면 대학 생태계에서 생산자인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소비자인 학생들의 독서 행태 문제도 크지 않을까요?

 

최근에 대학의 위기라는 말이 있고, 독서시장의 축소 등 여러 문제 제기가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대학에서는 충족될 수 없는 전인적 교양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아졌고, 글쓰기 교육에 대한 욕구와 열망은 커지고 있습니다. 대학이 일종의 공교육체계라면 대학이 소홀히 하고 있는 교양교육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사교육 시장이 생긴 것이죠. 물론 대학도 여러 경로로 이런 사교육 시장에 직접 참여하고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성인을 대상으로 외부에서 강사를 초빙하여 실시하거나 내부 인력을 활용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으로 압니다. 정작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에서 교육 받는 학생들은 그와 같은 교육과정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있죠.

 

미국의 저명한 이론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은 대중적 글쓰기 실력도 탁월하지요.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은 저자이기도 한데, 언젠가 이 분이 회고한 내용을 보면 대학에서 4년 내내 글쓰기 교육을 받은 덕분이라고 말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 책에서 다뤄지기도 했고, 신문 기사로도 취급되었는데 미국의 이른바 명문대학에서 강조하는 것이 독서와 글쓰기 교육이라고 합니다. 졸업생 대부분이 기술자와 과학자인 MIT대학도 글쓰기가 필수과목이고, 글쓰기 센터가 설립되어 있는데, 이처럼 글쓰기를 강조하는 까닭이 실제로 이들이 사회에 나와서 하게 되는 그들의 업무 중 35% 이상이 글쓰기와 관련 있다는 겁니다.

 

저는 대학이 먼저 독서를 통한 교양교육과 글쓰기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이 저술활동에 참여해서 좋은 책을 내도 읽을 수 없다면 장작을 만들어 쌓아두는 일과 다를 바가 없겠죠. 생산자 중심으로만 사고해서는 안 되고, 대학의 교육체계가 학생들을 미래의 저자이자 오늘의 독자로 만드는 형태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앞에서 학술계간지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날 학술계간지가 겪고 있는 어려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어떤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오늘날 학술계간지가 겪는 어려움이라, 아마도 경제적 어려움을 제외하면 학술계간지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토론과 비평을 통해 현실에 착근한 이론의 생산, 시좌(視座)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학술계간지의 존재 이유는 ‘속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성찰’과 ‘좌고우면하지 않는 진지함’에서 찾아야 합니다. 다른 저널리즘에서는 이념적 지형이나 진영에 입각한 선정적인 비난이 난무하더라도 학술계간지에서는 그 같은 흑백 이분법적인 도식을 넘어 여러 겹의 시선으로 보다 면밀하게 다루어져야 하고, 서로의 시선을 교차 검증하는 토론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같은 활자매체인 신문 문화면에서조차 계간지 특집에 대한 기사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것은 학술계간지들이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진 아카데미즘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필요하겠지만, 반대로 기성 언론들이 선정적인 단독 기사, 분석 없는 속보 경쟁에만 치중한 나머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제안과 깊이 있는 분석에 대해 무관심한 탓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 이후, 생존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가 되면서 먹고 사는 문제 이외의 가치에 대해서는 사고할 능력을 상실한 탓이 크겠지요. 미국의 미술평론가 해럴드 로젠버그는 “지식인이란 해답을 질문으로 바꾸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계간지는 ‘대중이 처한 현실’과 ‘비판적 지식(인)’을 연결하고 이를 통해 대중이 처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대안은 역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겠지요.

 


전성원(황해문화 편집장)


전성원(황해문화 편집장)

 

이 인터뷰의 기획 의도는 결국 한국 출판 생태계의 질적 성장을 위해 대학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었습니다. 대학은 어느 나라나, 어느 역사에서나 출판 생태계의 핵심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은 출판 생태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생각이 약간 다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학의 출현 이후 지식의 역사에서 대학이 항상 중심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때로 특정한 시기, 대학이 기성권력이 되고, 체제의 일부가 되어 학문적으로 스스로를 갱신할 수 없었을 때에는 외부에서 더 많은, 극적인, 지적 성과들이 산출되었죠. 사실, 그 결과가 애덤 스미스와 제임스 와트가 살았던 시대에 시작된 산업혁명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대학이 출판 생태계와 맺고 있는 관계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출판이 더 이상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닌 세상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책을 쓰고 싶어 하고, 실제로 그런 책들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필자, 저자들은 여전히 우리 출판계의 중요한 일부이지만, 그것을 대학이라는 장소로 확대해도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그것은 서점이 있는 대학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매우 우울한 전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걸어야 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해주신 많은 말씀 중에서 “이제는 신문에서 학술지 특집에 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과거에는 대학의 연구 성과를 학술지가 발견하고, 이를 다시 미디어가 발견하고, 이 발견이 하나의 담론이 되고, 그 담론을 대중이 소비하는 과정에서 단행본 출판이 이루어지던 순환 프로세스가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과거의 프로세스를 복원하는 게 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새로운 프로세스가 만들어질 수 있겠지요. 오늘날 대학과 출판의 관계가 고민이 깊은 것은 우리 사회가 ‘텍스트를 통해 사고하는 능력’의 가치와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우려 때문일 수 있겠습니다. 결국 출판 생태계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이 답을 보여줘야 하는 문제이겠지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김보경(지와인 대표)

출판인. 현 지와인 대표. 전 웅진지식하우스 대표, 인플루엔셜 출판사업 본부장으로 일했다.

 

커버스토리 다른 기사보기 View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