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5 2020. 10.
[오늘의 청소년과 독서]
김태희(사계절출판사 편집자)
2020. 10.
2020, 우리가 직면한 현실
2020년.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상을 살고 있다. 코로나19, 마스크, 비대면, 기후위기, 환경, 쓰레기…. 굳이 빅데이터를 돌리지 않더라도 올해의 주요 키워드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단어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인류사에 오래도록 남을 대전환의 중심에 우리가 있다. 그러나 이 대전환의 격랑에도 대한민국의 고3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수능을 준비한다. 아니, 준비해야 한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한 줄 이력에 불과한 장치라는 것도 모두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한 줄을 위해 대한민국 청소년은 중고등학교 시절 6년을 오직 ‘입시’를 위해서만 써야 한다. 모든 것은 입시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입시를 위한 자기계발, 입시를 위한 책읽기…. 미래를 위해 모든 욕망을 거세당한 채 시간을 견디다 마침내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은 온라인에 익숙지 않은 교수들의 급조한 강의 동영상을 보며 실망한다. 이들은 이미 최첨단 설비를 갖춘 스튜디오에서 수준급으로 만든, 이른바 일타강사의 강의를 접한 세대다. 온라인 강의로만 이뤄진 대학이라면, 정말 존재 가치가 있을까? 하지만 대한민국의 고3은 상점이 문을 닫고, 직장인은 재택근무를 하고, 다른 학년 학생이 비대면 수업을 해도 등교를 하고, 수능을 준비한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2020, 청소년 책의 해
2020년은 코로나19의 해 이전에 ‘청소년 책의 해’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예산을 받아 책읽는 사회문화재단을 중심으로, 청소년과 청소년 책읽기에 관심 많은 사서, 교사, 연구가, 작가 등으로 실행위를 구성해 2019년 3월부터 준비 모임을 가졌다. 매달 한 차례씩 모여 청소년 책읽기와 관련한 도서관, 서점, 학교, 출판사의 사례 발표를 들으며 청소년 책읽기의 필요성과 다양한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2018 책의 해 독자 개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의 생애 독서 그래프에서 독서 관심도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시기가 바로 ‘청소년기’이다. 청소년기의 부정적인 독서 경험은 이후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진다. 한마디로 청소년기의 책읽기가 평생을 좌우하는 것이다. 독서 관심도가 이 시기에 급격하게 떨어지는 이유는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당연히 입시로 인한 시간 부족이다. 사실 교육 정책, 대학 입시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지만 지금으로선 이것 역시 대안이 없다.
실행위의 가장 큰 관심사는 책을 좋아하지 않으며, 책과 친해질 생각이 전혀 없는 청소년을 독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간헐적 독자, 비독자를 평생 독자로 만들기. 청소년 관련 네트워크로 구성된 실행위라 저마다 청소년과 친하고 그들을 지지하고 이해하는 어른이라 자부하지만, 이미 우리는 존재 자체가 그들에겐 ‘꼰대’일 수밖에 없는 기성세대다.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 청소년에게 뭔가를 가르치려 들지 않고 다가가며, 청소년이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를 자연스레 만드는 데 힘쓰기로 했다. 뭐든 시작에는 슬로건이 필요한 법. 실행위 위원들이 저마다 참신한 구호를 생각하며 머리를 맞댔지만, 우리 마음가짐을 보여주기엔 뭔가 부족하고 아쉬웠다. 나는 명색이 출판사 편집자라 다들 열심히 일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어 ‘ㅊㅊㅊ’라는 구호를 조심스레 꺼냈다. 처음엔 청소년이 ㅋㅋㅋ, ㅎㅎㅎ와 같은 초성을 많이 쓰는 것에 착안해 장난스레 떠올린 거였는데 우려와 달리 학생들에게 큰 지지를 받아 슬로건으로 정해졌다. ‘말 꺼낸 사람이 책임지기’는 만고의 법칙. 나는 엉겁결에 청소년 책의 해 홍보 담당이 되어 ‘ㅊㅊㅊ’로 로고와 포스터를 기획하게 되었다. 청소년 책의 해의 상징인 ㅊㅊㅊ 로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다.
첫 번째 ㅊ은 책을 상징하고, 두 번째 ㅊ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사람, 즉 청소년을 상징한다. 마지막 ㅊ은 청소년의 손에서 다른 손으로 이어지는 연결을 상징하는 것으로 책 읽기로 이어지는 청소년의 연대, 축제를 떠올린 것이다. 책의 기본을 이루는 한글의 모양에 착안해 만든 로고라 더 의미가 깊고, 책이 가진 다양한 매력과 확장성까지 새겨 넣을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ㅊㅊㅊ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이게 뭐야? 할 수도 있는 법. 그래서 이번엔 ㅊㅊㅊ의 의미를 문장으로 풀어 포스터로 만들었다.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얼굴로 다가와요. 꼭 하나의 메시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요. 같은 책이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번 읽을수록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줘요. ㅊ을 책으로 완성하는 건 여러분 몫이에요. 책은 우리를 규정하지 않아요.
책은 우리의 마음을 키워 줘요. 우리는 책을 통해 여러 삶을 살고, 다양한 세상을 여행하지요. 때로는 지옥 같고 때로는 행복한 감정을 느끼며 우리는 크게 크게 자라나요. ㅊ을 더 크게 키우는 건 여러분 몫이에요. 움츠러들지 말고 ㅊ을 통해 성장해요.
책은 우리를 이어 줘요. 이메일, 스마트폰, 소셜미디어… 우리는 초연결 시대에 살고 있지만 모두 떨어져 있어요. 책은 공감하고 연대하고 함께 나아가려는 마음을 만들어 줘요. 여럿이 함께 읽으면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 ㅊㅊㅊ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일 수도 있어요.
김성미 디자이너와 윤예지 화가가 없었으면 이렇게 멋진 로고와 포스터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방에 걸어두고, 오래오래 들여다보면서 책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 보게 만드는 포스터. ‘청소년 책의 해’ 로고와 포스터에는 지난해 열 달 내내 멀리 세종에서 올라온 문체부 관계자를 비롯해 각자 생업이 있음에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모여서 청소년과 책에 대한 애정을 불사른 모두의 바람이 담겨 있다.
쉽고 재밌고 새롭고 깊이 있다, 청소년 책의 진화
청소년 책은 날마다 새롭게 변신하면서 ‘지금, 여기’의 독자를 만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청소년소설은 현재 문학판 흐름을 주도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인 독자층까지 폭넓게 아우르고 있다. 청소년출판이 본격화된 것은 1997년 사계절출판사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지적 호기심이 강한 십대를 위해 ‘1318문고’라는 청소년소설을 펴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2002년부터는 역량 있는 청소년소설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사계절문학상’을 제정해 『푸른 사다리』의 이옥수, 『몽구스 크루』를 쓴 신여랑, 『열일곱 살의 털』 김해원, 『합체』 작가 박지리, 『싸이퍼』 탁경은, 『산책을 듣는 시간』을 쓴 정은 등 뛰어난 ‘신인’ 청소년소설 작가를 배출했다. 2000년대 중반에 청소년출판이 블루오션으로 떠오르면서 비룡소, 문학동네, 창비 등 대형출판사가 청소년소설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고, 문학과지성사, 돌베개, 자음과모음, 뜨인돌 등에서도 꾸준히 청소년소설을 펴내고 있으며, 양철북, 우리학교, 단비, 블랙홀 등 청소년 책을 전문으로 출판하는 출판사도 많아지고 있다.
등장 초반, 작가 자신의 회고담으로 계몽성을 강조하던 청소년소설은 10년이 지나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출판 시장을 장악하는 존재감을 선보였다. 그 신호탄은 이경혜 작가의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로 기존 청소년소설과는 확실한 차별점을 둔 ‘지금, 여기’의 청소년을 다뤘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김려령 작가의 『완득이』는 영화로도 성공해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청소년소설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최근에는 손원평 작가의 청소년소설 『아몬드』가 가장 사랑받는 한국 소설로 뽑히기도 했다. 이제 청소년소설은 더 이상 청소년만을 위한 책으로 치부되며 일반소설 하위 범주의 개념으로 취급당하지 않고, 오히려 뛰어난 문학성과 읽는 재미를 선사하는 하나의 장르문학으로 자리 잡았다. 박지리 작가의 청소년소설은 우리 청소년문학의 진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이정표이다. 『합체』에서부터 『맨홀』, 그리고 한국형 영어덜트의 시작이자 완성이라 할 수 있는 『다윈 영의 악의 기원』까지 읽고 나면 청소년소설이 어떤 식으로 성장하고 진화해 왔는지 단번에 확인할 수 있다.
청소년 교양 도서 역시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처음엔 성인 독자 대상의 교양 도서를 좀 더 쉽게 풀어낸 책으로 여겨지던 것이 자신만의 확고한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십대 소년 소녀를 주체적 대상으로 삼아 그들 눈높이에 맞는 책을 선보이고 있다. 인문 고전을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쉽게 풀어 쓴 사계절출판사의 ‘주니어클래식’은 십대뿐만 아니라 일반 성인 독자도 즐겨 보는 시리즈이다.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를 흥미로운 사례들로 재구성해 핵심 내용을 전하면서도 현재 시각으로 비판하고 우리 현실에 맞게 해석한 노명우 교수의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 등도 대표적이다. 우리학교 출판사의 ‘소년소녀’ 시리즈는 청소년 눈높이에 맞는 참신한 기획이 돋보이는 책이다. ‘청소년을 위한 생명 감수성 장착 프로젝트’라는 부제가 달린 『소년소녀, 고양이를 부탁해!』나 ‘만국의 청소년을 위한 정치력 향상 프로젝트’ 『소년소녀, 정치하라!』 등은 자립적인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꿀팁을 전해 준다. 지난해 봄, 만화가 이다의 『걸스 토크-사춘기라면서 정작 말해 주지 않는 것들』이 나왔을 때 많은 성인 여성 독자는 물개박수를 치며 이 책의 출간을 반겼다. 드디어 우리 청소년에게 읽힐 수 있는 제대로 된 ‘사춘기’에 관한 책이 나왔구나 하면서. 이차성징, 외모 콤플렉스, 월경을 비롯해 여성 청소년의 성욕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사춘기 시절에 느낀 고민과 고백을 솔직하게 밝힌 이 책은 지금 십대에게, 더 나아가 성인에게도 위로와 공감을 전하는 소중한 책이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이 책은 최근 ‘성평등 나다움 책’ 가운데 회수된 7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성평등 나다움 책 회수 사건’은 우리 사회가, 아니 기성세대가 아직도 얼마나 전근대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행해지는 통제와 차별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요즘 애들을 뭘로 보고.
청소년의 목소리를 듣는 청소년 책
BTS가 전 세계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 것이 기성세대에겐 놀랍고 신기한 일이지만, 지금 대한민국 청소년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어른들의 호들갑이 유난스러워 보일 지경이다. 어찌 보면 우리 청소년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진화하며 세계적 수준을 갖춰 나가는 데 반해 정작 이들을 둘러싼 하드웨어는 너무 낡은 것이 아닌가 싶다. 코로나19로 전 세계의 ‘잠시 멈춤’이 지속되면서 우리가 외면하고 은폐하려던 진실이 태풍이 지나간 자리처럼 하나둘 적나라하게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저마다 방구석 사회학자, 교육학자, 환경주의자가 되어 처음으로 진지하게 지구의 운명과 나의 삶을 연결해 생각하고 있다. 이제 우리 청소년에게 필요한 교육은 지구 종말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일지도 모른다. 쓰레기를 최소화하고 지구 환경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찾기, 스스로 요리하고 바느질하고 못질하며 생존과 자립할 수 있는 능력 갖추기, 몸과 마음의 근육을 기르기 위한 운동과 책읽기, 나다움으로 충만한 삶 누리기 등 청소년 스스로 배우고 익히고 나누는 교육이 대학에 가는 것보다 더 절실할 것 같다. 차별과 혐오, 불평등이 난무하는 세계에서는 더 이상 어른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는 ‘착한 아이’는 필요 없다. 청소년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다른 종(種)과 더불어 사는, 공감과 연민의 감수성을 지닌, 약자를 돌볼 줄 아는 시민이 되고 싶어 한다. 우리는 크고 작은 역사적 순간에, 사회의 변화를 이끈 이들이 ‘청소년’이었음을 익히 알고 있다.
청소년 책이 청소년을 위한 책으로 시작해,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읽는 책으로 진화했다면 이제는 청소년의 목소리를 직접 담아내는, 청소년이 쓰는 책으로 나아가야 한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정보서든, 만화든, 청소년이 따로 또는 함께 쓰는 책의 저자로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경험을 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부끄럽지만 이제야 나는 절실히 깨닫고 있다.
입시 제도가 또 바뀌어 내년부터는 정시 비율이 높아지면서 독서와 입시의 연관성은 더 떨어질 거라 한다. 한때 논술고사로 책읽기 열풍이 불었을 때 당장 청소년 책 출판 시장엔 훈풍이 불었지만 그것이 청소년을 평생 독자로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책에서 멀어지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 변화는 청소년의 자발적 책읽기를 이끌어 내 평생 독자로 만드는 기회로 삼기에 좋을 수도 있다. 자기 목소리를 내려면 다른 이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이 우선이듯 청소년 스스로 책의 저자가 되려면 다른 저자의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잘 쓸 수 있다. 일주일에 한두 시간, 아이들이 책 읽으며 들을 노래 리스트를 만들고 그 시간 동안 BGM을 들으며 만화가 됐든, 그림책이 됐든, 시집이 됐든, 어떤 책이든 편하게 읽게 해주는 교실. 한 달에 한 번 동네 서점에 나가 학생이 직접 책을 고르게 하고 책을 사주는 학교. 아이들이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웃고 떠들고 편한 자세로 느긋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을 갖춘 도서관…. 대학 가려면 책 읽어라, 성공하려면 책 읽어라 같은, 책읽기의 실용성만 강조하는 꼰대 같은 잔소리보다 책과 가까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자연스레 만들어 주고 아이들을 환대하는 공간이 많아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스타벅스, 피시방, 올리브영 같은 곳보다 동네 서점이 더 많아져 아이들의 눈길이 머무를 수 있다면, 그것 하나로도 나는 완전 도서정가제를 적극 지지하고 싶다. 그 공간에서 각기 조금씩 다른 책 냄새를 맡고, 개성 넘치는 책 제목과 표지 그림, 북디자인을 눈으로 보고, 손에 만져지는 종이의 촉감을 느끼다 보면 어느 순간 책장을 펼치게 될 것이다.
누구나 책의 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에 청소년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가 많아지면 좋겠다. 청소년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청소년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콘텐츠를 기획하기 위해 더 많은 청소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책을 처음 만들던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시작해야겠다. 김태희(사계절출판사 편집자) 1997년부터 편집자 생활을 시작해 지금껏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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