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21 2021. 05.
[사람과 책을 연결하는 사람들]
이혜인(경향신문 문화부 출판 담당 기자)
2021. 5.
책을 좋아한다. ‘활자중독’, ‘독서광’, ‘취미는 독서’ 같은 확고한 수식어를 차마 스스로에게 사용하지는 못하겠으나, 책을 좋아한다는 정도까지는 괜찮을 것 같다. 타고난 범생이 인생에서 책은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일탈’이었으니까. 학창 시절 마음이 헛헛하면 도서관에 갔고,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은 오프라인 서점에 간다. ‘유·무료 독서모임 경험 다수’인 독서인구다.
책 안에 담긴 활자보다는 책의 물성 자체를 좋아한다. 그 어떤 신문 헤드라인보다도 강렬하게 눈길을 사로잡는 제목, 손에 쥐는 순간 이미 그 분야 지식인이 된 것처럼 만들어주는 지적 중량감, 각 책의 특성에 맞게끔 잘 골라진 종이 질, 작가의 개성이 담겨 있는 다양한 문체…
그러니까 내가 신문사에 입사하고 몇 년이 흘러 출판 담당 기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때부터 그 자리를 아주 조금씩 욕심내 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뭐? 하는 일이 하루 종일 책을 만지는 건데, 그중에서 제일 좋은 책이 뭔지 고른 다음에, 그 책을 업무의 일환으로 읽고, 그걸로 기사를 쓴단 말이야?!’ 회사에서 하는 일이 그렇게 즐겁기만 할 리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출판 담당 기자는 언젠가 한 번은 꼭 해보고 싶었던 ‘꿈의 자리’였다.
얼마 전 부서 내 업무 조정으로 경향신문의 출판·학술 담당 기자가 됐다. 세 달째에 접어드는 지금, 출판 담당 기자의 일상은 기대만큼 즐겁고,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다. 이제 막 적응기를 마친 출판 기자의 일상을 정리했다.
출판 기자는 이런 일을 합니다
일간지 ‘출판 기자’ 혹은 ‘책 담당 기자’는 어떤 일들을 할까. 언론사마다 조금씩 다른 부분은 있겠으나 가장 주요한 업무는 역시 신간 소개다. 경향신문은 매주 토요일 자 신문에 세 개 면을 할애해 책 면(Book)을 만든다. 출판 담당 기자는 신문사로 배송되는 모든 책을 검토해 책 면의 밑그림을 짜고, 필자를 배분하고, 책 1면의 메인 자리에 들어가는 프런트 기사를 쓴다. 소설·시·그림책·문학 작가가 쓴 에세이류는 문학 담당 기자가, 비문학으로 분류되는 나머지 책 전부는 출판 담당 기자가 맡는다. 한 주에 100~200권가량 들어오는 책을 꼼꼼히 검토해 책 면을 짜야 한다.
책 소개 기사는 꼭 책 면에만 실리는 것이 아니다. 문화면에 실리는 출판계 트렌드 기사로도 신간을 소개한다. ‘대선 시계 빨라지자 정치인 자서전도 많아져’, ‘20대 남성들에게 다시 부는 자기계발서 열풍’, ‘주목할 만한 퀴어에세이 *권’ 등이 요즘 눈에 띄는 책 트렌드 기사였다. 서평이 아닌 저자 인터뷰 형태로도 신간을 소개한다. 저자의 설명이 곁들여지면 더 좋은 책일 것 같다거나, 저자가 왜 이런 책을 썼는지 주목해볼 만하거나, 책 면에 자리가 부족한 관계로 미처 실리지 못해 인터뷰 기사로 돌려야 하는 경우 저자 인터뷰로 책 소개 기사를 쓴다.
다음으로 주요한 업무는 출판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기사로 소화하는 것이다. 도서정가제 논란, 송인서적 공동 인수 등 출판계에서도 여러 가지 사건이 벌어진다. 최근(4월 말 시점)에는 김일성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가 출간됐는데,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가 판명 나기 전에 대형서점에서 고객 보호 차 선제적으로 판매를 중단했다는 것이 뉴스가 됐다. 출판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의외로 독자들의 관심이 높다.
각 학계에서 나오는 주장이나 논쟁들을 다룬 기사를 쓰는 것도 주요 업무 중 하나다. 경향신문은 출판 담당 기자가 학술도 함께 담당하기 때문에 출판계와 학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챙긴다. 페미니즘, ‘위안부’ 이슈, 역사 왜곡 논란 등은 출판 및 학술 담당 기자가 주로 다루는 주제다.
출판 담당 자리에는 언제나 책이 이렇게 쌓여 있다.
‘좋은 책’은 어떻게 고르나
출판 담당 기자를 하기 전에는 이렇게 많은 책이 세상에 나오는지 잘 몰랐다. 매체에서 소개할 법하다고 판단하는 것들만 출판사에서 신문사로 보내는 것 같은데도 한 주에 받게 되는 책의 양이 꽤 많다. 비성수기 시즌인 여름철을 제외하면 대략 100~200권의 책이 매주 온다. 문학 담당이 아닌 출판·학술 담당 기자에게 오는 책의 양만 이렇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두툼한 소포 용지에 포장된 책들이 책상 옆에 쌓여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책 봉투를 뜯어서 일렬로 가지런히 쌓아 둔다. 처음 2주 정도는 맨손으로 뜯다가 손을 많이 베였다. 지금은 다이소에서 얇은 작업용 장갑을 사 와서 꼭 그걸 끼고 책 포장을 뜯는다. 포장지를 벗은 매끈한 책이 쌓일 때마다 이걸 다 언제 분류하나 싶어 압박감도 조금씩 쌓인다.
다 뜯으면 이제 분류 시작이다. 책 1면 프런트 자리에 원고지 20매 분량으로 소개하는 메인 기사 후보군 4~5권과 박스 기사로 소개할 책들(4~5권)의 후보군 10여 권을 추려야 한다. 거대한 책 탑의 높이를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빠르게 초벌 분류를 시작한다. 재출간, 개정 증보판은 곧장 옆으로 내놓는다. 재출간·개정 증보판은 특별한 사건이 있거나 책의 많은 부분이 새로 쓰인 경우에만 신간으로 소개한다. 이미 세상에 나와 독자를 한 번 만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새로 만든 기준은 아니고 대대로 내려오는 기준이다. 신문에 쓸 책, 안 쓸 책을 쉽게 후다닥 분류할 수 있는 것은 딱 여기까지다.
최근에 경향신문 책 면 프런트 기사로 소개한 책들. 언젠가 다시 볼 일이 있을지도 몰라서 책장에 따로 모아 보관해둔다.
그다음부터는 여러 개의 기준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 펼쳐 놓고 책을 살핀다. 전임자에게, 부장에게, 동료 기자들에게 어떤 기준으로 책을 선정해야 하는지 묻고, 나의 가치관을 더해 몇 개의 기준을 만들었다. 최대한 공정하고 품위 있고 독자 친화적인 기준을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사실 매우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책을 고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내가 책 면을 맡고 한두 주쯤 지나자 주변 동료 몇몇이 “사람 한 명 바뀌었다고 책 면 구성이 바뀐 게 느껴지다니, 신기하네요”라고 말했다.
내가 책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깊이’와 ‘시의성’이다. 책을 손에 들고서 독자에게 지적인 깨달음이나 유희를 줄 만큼 깊이가 있는 책인지 생각해본다. 책의 난이도와 깊이는 별개다. 예를 들어 지난달 책 면에 소개됐던 원더박스 출판사의 『내 친구 압둘와합을 소개합니다』라는 책은 중학교 국어 교사가 한국에 사는 한 시리아 청년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인데, 청소년을 대상으로 쉽게 쓰여졌다. 난민, 이방인과 관련된 사회적 문제가 여전한 상황에서 읽어볼 만한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저명한 저자나 해외 베스트셀러 여부는 고려할 수밖에 없는 책 선정 기준이다. 해외에서 화제가 되면 국내에서도 출간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많다. ‘뉴욕타임즈 올해의 책 선정’ 등의 설명이 있는 책은 해외에서 실제로 얼마나 화제가 됐었는지 검색해본다. 아마존 사이트에 들어가서 평점을 얼마나 많이, 높게 받았는지 확인하고 해외 유수 언론들의 서평도 찾아본다. 해외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적어도 이 책이 별로는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맨 마지막 점검 기준은 ‘나의 책 취향이 너무 강하게 반영되지 않았는가’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과학책을 압도적으로 편애하고, 경제학책을 선호하며, 역사책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과학 및 경제 분야 책에는 더 깐깐해지려고 하고, 역사와 철학책에는 관대해지려고 한다.
치열한 나와의 토론을 거쳐 고른 책들은 책 회의에 올려진다. 경향신문은 매주 화요일 오후 5시쯤 문화부원 전원이 모여 책 지면에 들어갈 책을 결정한다. 선정한 책 목록과 간단한 개요, 선정 이유를 담은 짧은 발제문을 프린트해서 부원들과 공유한다. 치열한 토론과 설전까지는 아니지만 날 선 질문과 의견 교환이 오고 간다.
그간 문화부를 여러 차례 경험했기에 출판 담당이 아닐 때도 책 회의에 참석해 왔다. 그 시기 구성원들의 성향에 따라 책 회의 분위기와 선정 도서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현재의 경향신문 문화부 책 회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균형’이다. 이왕이면 한 면에 각기 다른 주제와 분야의 책이 소개되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지난주에 프런트로 과학책을 선정했다면, 이번 주에는 웬만하면 과학책이 아닌 다른 분야의 책을 선정하려 하는 식이다. 한 출판사의 책이 여러 권 소개되는 것도 지양한다. 해외와 국내 저자의 책 비율도 적절히 안배하려 한다. 한 시간가량의 책 회의를 통해 책 면이 확정된다.
이제 남은 것은 마감뿐
책 분류보다 더 압박스러운 것은 원고지 20매짜리 프런트 기사 마감이다. 토요일 자 지면이지만 사전제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수요일 하루 동안 책 한 권을 읽고 목요일 오후 2시쯤까지는 마감을 해야 한다(하지만 보통 3~4시 사이에 넘긴다). 아침부터 책을 붙잡고 앉긴 하는데 다른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결국 수요일 늦은 오후가 돼서야 책을 제대로 읽기 시작한다.
나에게 얼마 있지 않은 성실함은 이상하게도 책을 읽을 때 발현된다. 프런트 감으로 선정되는 책은 아무래도 내용이 다소 어려울 수밖에 없다. 기본이 400쪽 분량, 600~700쪽 분량의 책도 종종 선정된다. 부원들이 “이 책은 어쩔 수 없이 발췌독 해야겠네”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이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발췌독을 하면 자신감이 떨어져서 도저히 개요를 세울 수가 없다. 눈에 띄는 문장에 밑줄을 쳐가면서 정석대로 완독 한 번, 개요를 세울 때 밑줄 쳐놓은 부분을 다시 읽는 탐독 한 번을 거치고서야 서평을 쓴다.
얼마 전 열린책들에서 나온 총 744쪽짜리 『세계를 창조하는 뇌 뇌를 창조하는 세계』가 프런트로 선정됐을 때는 슬플 지경이었다. ‘이걸 언제 다 읽지…’ 집에 가서 긴장된 마음으로 책을 펼치고 읽다 보니 의외로 술술 읽혔다. 예시도 많은 데다가, 자간도 넓고, 심지어 뒷부분 100쪽 정도는 각주 모음! 고생해서 읽은 책은 그만큼 기억도 오래가서 읽는 보람이 있다.
하루 반나절 되는 시간 동안 한 권의 책을 정독하고 20매의 글을 쓰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고통스럽고 압박스럽지만 동시에 매우 소중하고 보람찬 경험이다. 이번 주는 조세 불평등 이야기에 빠져들었다가, 다음 주에는 뇌과학에 대해 고민하고 있고, 그다음 주에는 사이버전에 대해서 전문가인 척 글을 쓰는 것을 살면서 언제 또 경험해보겠는가. 기껏해야 486 정도의 CPU를 가진 나의 뇌에 강제로 책이라는 SSD칩을 장착해 매주 용량을 넓히는 느낌이다. 20매를 마감하고 탈진 상태가 된 목요일 저녁, 집에 돌아가서는 보상심리에 힘입어 ‘귀신이 고칼로리’인 음식을 밀어 넣는다.
책 면 기사 마감이 있는 날엔 회사에 좀 더 일찍 나와 자리에서 마감을 한다. 집에 있으면 집중이 안 돼 마감을 더 늦게 하게 된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진정한 마감은 다른 신문이 책 면에 어떤 책들을 선정했는가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대부분의 신문사는 금요일 자 신문에 책 면을 두고 있다. 금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집어 들고 다른 신문의 책 면을 허겁지겁 체크한다. 내가 선택한 책들을 대부분 크게 썼다면 ‘역시 다들 좋은 책은 알아보는구나’ 하면서 안도한다. 다른 곳은 안 썼는데 나만 유달리 힘을 주어 쓴 책이 있다면 ‘나의 안목이 특별하군’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내가 너무 내 취향만 생각한 것은 아닌가’라며 조금 위축되기도 한다.
아마 출판 담당 기자를 그만두는 날까지 ‘이 책은 반드시 소개해야만 한다’는 정답을 알게 되는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그저 좋은 책을 소개하고자 하는 마음만 지금처럼 잘 유지하면서 고민과 좌절과 보람 사이를 오고 가는 수밖에 없다. 책 무더기 속에서 행복한 허우적거림을 반복하면서. 이혜인(경향신문 문화부 출판 담당 기자) 경향신문 기자. 2011년 기자 일을 시작해 사건·사고, 금융, 보건복지, 영화 등의 분야를 맡아 기사를 썼다. 지금은 문화부에서 출판, 학술, 종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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