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28 2021. 12.
[출판인 이야기, 편집자로 산다는 것]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2021. 12.
1.
병실에 가족이 누워 있을 때, 한쪽 구석에서 교정지를 보던 내가 있었다. 10여 년 전 일이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상황을, 그런 가정의 일을 사무실에도, 저자들에게도 알리기 어려울 때였다. 수시로 드나드는 의료인을 응대하고 환자에게 필요한 처치를 돕는 게 눈앞의 현실이었는데, 교정지 속 현실은 동서양의 몇 백 년 시공간을 넘나들고 있었다. 나는 두 가지 차원의 현실에 살고 있었다. 어느 한 가지도 소홀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몸과 마음을 조금이라도 아낄라치면 발을 헛디디게 되는 두 현실은 팽팽했다.
‘고전은 내게 구원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문장을 몸에 새긴 저자의 글들은 고전을 읽으며 거대 공간과 거대 시간을 사는 방법을 배웠다고 고백하며 시작된다. 연일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현실에 살고 있지만 고전 덕분에 다른 꿈을 꿀 수 있었다고.
원고에서 인용한 문장이 눈길을 잡았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주인공 아드소는 말한다. “수많은 지성에서 비롯한 비밀의 보고, 그 비밀을 만들어냈거나 전승한 사람들의 죽음마저 초월한 존재”가 책이라고. 시간을 견딘 책들의 힘을 생각했다. 그리고 병동의 현실이 어떤 시간으로 건너가고 흘러갈지 알 수 없어 무기력하고 답답한 마음을 차분히 쓸어내렸다.
병원 로비의 새벽은 몹시 어둡고 조용했다. 접수와 수납 등의 행정적인 절차에 따른 호출 벨소리가 끊이지 않던 낮의 자극적인 기계음, 그 속에 섞인 사람들의 탄식과 한숨, 안도의 들숨과 날숨들…… 병원의 낮과 새벽은 완연히 달랐다. 잠을 이루지 못해 몽롱한 내게는 매우 비현실적인 새벽이었다. 현실 사이에 틈입한 낯선 시공간에서 내 삶을 들여다보았다.
아직도 가끔 새벽의 그 공간을 떠올린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가늠할 수 없어 막막해질 때 조용히 칼을 벼리듯 마음을 다스리던 기억을 갖고 있다. 책 만들며 사는 사람의 마음은 무엇일까. 책 만들기에 마음을 다 담지 못해 허방 짚는 날에는 진실을 깨닫는다. 책의 현실을 살지 못하면 삶의 현실이 삐걱댄다는 것을. 창밖으로 차가운 눈발이 날려도 책 속에서 피어나는 봄꽃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의 두 계절을 살아가는 사람이 출판인이다.
2.
오래전, 출판사와 인쇄소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웃이 있었다. 내게 직업을 물었다가 ‘출판사 편집자’라는 답을 꺼내자 자신의 명함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이런 질문은 거의 없다. 편집자들이 일에 대한 성찰이 담긴 흥미로운 책들을 직접 써서 출간하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과장되지만 출판 일을 짐작할 만한 에피소드가 등장하고 출판인을 이슈로 한 뉴스도 나온다. 웬만한 사람은 출판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있다. 이제 좀 알게 된 상황이어서 받을 수 있는 질문은 그래서 이렇다.
플랫폼에 글을 자유롭게 실을 수 있고, 독자 펀딩으로 책을 출간할 수 있고, 판매도 인터넷서점이나 각자의 개인 매체에서 할 수 있다. 출판사는 이제 뭐 하는 거지? 조직적으로 할 만한 일은 없지 않은가?
아니오, 여행지에서는 민박할 수 있고 또 요리를 집에서도 할 수 있지만 정갈한 숙소나 궁극의 맛을 낸다 싶은 식당은 삼백육십오 일 열려 있잖아요. 그리고 확연히 그 성격은 다르고요.
나는 독립 출판은 민박과 집밥으로, 출판사 일은 전용 숙소나 식당의 요리로 비유하며 상냥하게 답한다. 그리고 바로 아차, 이건 적절한 비유가 아니지 싶어서 민망했다. 어디까지나 출판 일의 전문성을 강조하고 싶었을 뿐인데, 너무 비근한 예를 들었다.
출판편집자는 저자의 원고를 체제와 형식을 갖춘 책으로 만들어 독자에게 전하는 매개자다. 이 ‘매개’에도 변화가 많다.
첫째로 저자 에이전시가 생겼다. 출판사가 저자를 설득하거나 지원하는 어떤 일들은 에이전시가 맡는다. 특별한 편집 의도를 구현할 게 아니라면, 자동 편집 시스템의 진화된 기술로 원고는 자연스럽게 체제가 잡힌다. 책이 발행되기 전 원고가 독자에게 먼저 공개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런데 왜 책 만드는 사람이, 출판사가 필요한가. 이 물음에서 출판 일은 시작된다.
저자에게 어떤 주제의 원고를 제안하지? 이 원고를 책으로 왜 내야 하지? 이유가 있다면 어떻게 그 이유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할 수 있지? 책의 주제에 적합한 문장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을까? 어떤 제작 사양으로 책의 가치를 높일 수 있나? 이런 질문에 답하는 사람이 출판인이다.
3.
성남 ‘안나의 집’으로 찾아가 김하종 신부를 만났다. 6년 전이다. 이탈리아인 사제로 한국으로 건너와 30년 가까이 노숙인들을 위해 매일 밥을 짓는 현장을 보았다. 조건 없이 밥을 대접하는 일, ‘따뜻한 밥 한 끼’의 힘을 믿으며 우리 사회의 약자와 함께 살아가는 일을 실천하는 신부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숙연했다.
그는 사제로서 굳건한 사명감으로 일하는 게 아니었다. 상처받고 울면서 흔들리며 해내는 일이었다. 노숙인의 아픔을 우리 사회가 껴안아야 한다는 것, 우리 사회 구성원의 경제적, 정신적인 문제를 외양만 얼핏 보고 의심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김하종 신부의 따뜻한 철학이 움직이는 세상이 거기 있었다.
신부의 삶을 책으로 내고 싶었다. 사회 불평등 해소를 주장하는 논리적인 책이 아니라 작은 목소리로 깨우친 우리 사회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 싶었다. 기획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책을 쓸 여력도, 자신을 알리고 싶다는 욕망도 없다. 지금 당장 밥 지을 쌀을 구하고 야채를 확보하는 일이 더 다급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드디어 올해 김하종 신부는 책을 내겠다고 마음먹었다. 6년 전과 무엇이 달라졌을까.
노숙인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바뀌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조용한 성찰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소통할 책이 필요하다. 김하종 신부 자신의 역사를 돌아보고도 싶었다고 한다. 후임을 위해서도 기록은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밥값이 더욱 필요해진 것도 사실이다. 책 한 권의 인세가 누군가의 밥 한 끼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김하종 신부의 소망이 책을 내게 된 동력이었다. 왜 책을 내야 하고,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가 분명했다. 『사랑이 밥 먹여준다』는 소통과 기록의 의미를 담고 세상에 나왔다.
『사랑이 밥 먹여준다』의 보이지 않는 독자의 존재감은 숫자로 표현되었다. 판매 부수나 매출이 아닌 밥공기의 숫자다. 출판인으로서 체감하는 이 책의 가치는 다른 책과 다르다. 공감과 연대의 책이라는 가치는 선명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저자의 삶이, 그 거쳐 온 세월이 빛이 되어주었다. 책이 아니었다면 더 확장되지 못했을 세계였다.
『사랑이 밥 먹여준다』
4.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국내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유명한 메리 올리버의 대표작으로, 조 바이든이 9.11 테러 8주년 추모식에서 낭독했고, 대학생들의 기숙사 방을 장식할 만큼 널리 사랑받은 시 『기러기』가 표제작인 시선집을 출간했다.
평생을 한 마을에서 은둔하듯 살았던 시인은 매일 숲과 바닷가를 거닐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를 썼다. 여행하지 않고,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발견한 자연과 예술의 경이를 표현했다.
책을 읽는 일은 어쩌면 메리 올리버의 세상 읽기와 닮은 것이다. 직접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 세상의 아름다움은 가까이에서도 발견된다.
이 시집을 만드는 것은 진심으로 감탄사를 내뱉는 일이다. 시의 경우, 문장을 다듬는 편집 일은 의미가 거의 없다. 시집을 세상에 내놓을 때 편집자는 스스로 받은 감동을 더해서 필연적인 운명처럼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하면 된다. 인문서를 만들 때처럼 왕성한 호기심을 품을 일도 없고, 실용서를 만들 때처럼 꼼꼼한 정보력이 앞서지도 않는다. 온몸으로 시어들의 맥락과 그 빛나는 언어 조탁에 감동하면 된다.
메리 올리버의 시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천 개의 아침』 시집을 출간하고 난 후 도착한 독자의 반응은 놀라웠다. 1935년생 시인 메리 올리버의 시적 감응은 시공간을 넘어 한국의 현 시대 독자에게 잘 전달되었다. 시인의 탐구는 오직 하나,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였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이름 있는 시인의 삶은 소박했고 야생에 길들여진 것이었다. 시인의 시는 삶의 오라(aura)로 더욱 빛났다. 독자들이 반응하지 않았다면 시선집 『기러기』를 이렇게 빨리 출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시를 좋아해서 시집을 만든다. 출판인이어서 원고를 먼저 읽는 기쁨이 컸다. 좋은 시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책을 읽든’ 널리 많이 읽히고 싶다는 열망이 솟았다. 시집 만드는 마음에는 독자에게 전달한 ‘거칠고 흥겨운’ 즐거움이 고여 있다.
『기러기』
5.
책 만드는 일을 지칠 줄 모른 채 36년째 하고 있다. 그 사이 활자 조판은 컴퓨터 조판으로 바뀌었고, 인디자인을 활용해 더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게 되었다. 유통은 디지털 대변혁에도 어리숙한 형태로 유지되어 안타깝지만 다양한 채널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전자책, 오디오북, 구독형 서비스 등을 생산하는 일에도 거리감이 없다. 책 행사나 저자 북토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그간 잘 드러나지 않던 독자를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출판인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학자가 아니다. 칼럼을 쓰고 보도 자료를 작성해도 작가는 아니다. 출판인은 호기심으로 무장한 채 저자의 원고를 탐험하고 오류를 바로잡고 종내는 독자와 그 모든 것을 공유하려 한다.
같은 원고로 작업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개정판 작업은 예외다)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출판 경험이, 시간의 축적이 새로운 세계를 쉽게 규정할 수 없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초보자의 심정으로 다가가는 데 출판 경력 햇수는 무용할 때도 있다.
내가 읽고 싶다고 책을 바로 내겠다고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돈을 지불하고 책을 구입하는 독자의 마음을 헤아리려면 고심할 항목이 많다. 그래서 출판인은 늘 질문하고 답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다고 항상 계산기를 두드리지는 않는다. 최근에 만든 김하종 신부의 책과 메리 올리버 시집을 떠올려보자. 기획 과정에서 투입과 산출을 정확히 계산할 새 없이 내고 싶다는 열망이 앞서는 출간 작업이었다.
한 권도 안 팔려도(그럴 리가 있겠는가) 좋다는 심정에 내달렸다. 우리가 직접 겪지 않은 그 삶에서 흘러나오는 단단한 통찰, 언어로 지은 집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문장들. 우리는 이 책을 읽고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우리 사는 세상은 저자들이 겪고 기록한 세계와 맞닿아 있고 그에 빚지고 있다.
다시 병원의 새벽 로비의 풍경을 떠올린다. 내 삶을 이끈 것은 광포한 현실과 나란히 살아 움직인 책의 세계였다. 막막한 현실에 꿈을, 온기 어린 손을 내주던 책의 세계였다. 곧 아침이 찾아오고 햇살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실 속에서 책에 잠시 마음을 내려놓았던 순간들, 스스로 힘을 냈던 그 마음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그 마음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1985년에 출판계에 입문하여 2000년에 ‘마음산책’을 창업했다. 문학, 예술, 인문서를 출간하며 36년차 편집자로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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