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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4  2021.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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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시대는 저무는가]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문해력,
검색이 ‘지식’이 되는 사회

 

 

 

정희진(문학박사, 여성학 연구자)

 

2021. 8.


 

우리 사회는 ‘쉬운 글’은 대중적이고, ‘대중적인 글’은 ‘민주적’이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의 문해력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다. 그러나 온라인 매체에서의 문해력 우려에 대해 발언할 경우, 불편해하는 이들이 많다. 낮은 문해력은 공동체의 생사가 달린 중요한 문제인데, ‘지적 평등주의’가 만연한 사회가 된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문해력에 대한 논쟁이 대단히 어렵다.1) 특히 문해력과 온라인과의 관계를 지적하면 ‘엘리트주의자, 꼰대, SNS 포비아, 디지털 문맹, 시대에 뒤처진 이’ 등의 비판이 쏟아진다.

 

 

1)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쓴 바 있다. 〈정희진의 융합〉, ‘문해력 최하위 한국’, 한겨레신문, 2021년 5월 11일자. 그리고 같은 칼럼, ‘첨단 산업, 종이신문’, 2020년 10월 27일자, 참조.

 

나는 SNS를 사용하지 않는데, 그 자체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험을 자주 한다. 한마디로, “왜 인터넷을 하지 않아서 당신 생각을 내가 모르느냐”는 것이다.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진리를 잘 보여주는 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 이전에, 자신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이자 착취 방식이다. 휴대전화 번호가 주민등록증을 완전히 대체한 현실이 대표적인 예다. ‘국민 증명’은, 국가가 무료로 발급하던 주민등록증에서 현재는 통신 회사에 돈을 내고 획득하는 시스템(스마트폰 번호)으로 바뀌었다. 열성적인 얼리어답터뿐만 아니라 이제는 누구나 자발적으로 이 시스템에 참여한다. 이제는 휴대전화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나는 대학 강사 시절 학생들의 성적을 입력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2G폰을 마련했지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결국 나는 전화기가 아니라 전화번호, 이 시대의 성원권을 산 것이다.

 

문해력은 학력(學力), 학력(學歷), 학벌, 능력주의와 무관한 개념이다. 오히려 정반대인 경우도 많다. 문해력은 문장 그대로를 이해하는 능력과 문장의 사회적 의미를 해독하는 능력인데,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찰과 반성은 다른 개념입니다. 성찰은 재귀(再歸), ‘reflection’의 잘못된 번역입니다.”는 전자에 해당하는 문장이고, 후자는 “젠더 갈등이 아니라 성차별이 맞는 말입니다. 백인과 아시아인의 관계도 갈등이 아니라 인종 차별이잖아요?”처럼 논의가 필요한 문장이다. 전자는 팩트에 가깝고, 후자는 가치관의 차이에 가까운 문장인데, 요즘은 전자조차 소통되기 어렵다.

 

우리 사회의 낮은 문해력은 사회주의권의 변화 이후 지난 30여 년간 자본주의의 작동 형식이 달라진 지구적 상황에, 한국적인 역사가 더해진 현상이다. 그간 자본주의는 단순히 발전, 성장했다기보다는 방식 자체 - 변태(變態) - 를 달리하면서,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일들을 겪고 있다. 실업과 팬데믹의 일상화가 그것이다. 동유럽의 변화 이후 지구상에 자본주의를 방해하는 세력은 사라졌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 글로벌 자본주의는 한계 없는 절대적(absolute) 자본주의로 무한 ‘성장’했다.

 

너무나 빠른 시간 동안 인간의 삶은 바뀌었다. 서구 자본주의 분석가들은 〈제국〉, 〈경제적 공포〉, 〈호모 사케르〉로 이어지는 ‘절망적’ 담론을 내놓았다.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 시대, 실제로 지구 멸망은 촌각을 다투고 있다. 팬데믹은 계속될 것이고, 코로나도 집단 면역 즉 암처럼 일반적인 질병으로 전환될 것이다. 인간의 조건이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언어로는 현실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근대 체제 앞에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포스트 휴먼, 포스트 국민국가, 포스트 트루스…’ 포스트는 이후(以後)가 아니라 여파(aftermath) 혹은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인 상태를 말한다.

 

적절한 비교가 될지 모르겠지만, 한국 여성의 고등 교육률은 세계 최상위권이다. 그러나 노동 시장 진출률과 그 질은 100위 밖이다. 여성 교육이 고용으로 연결되지도 않고, 젠더 폭력 같은 성차별도 해소하지 못한다. 이처럼 인과 관계가 있어 보이는 듯한 사회적 현상들이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문해력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문맹률이 낮고, 우리는 대한민국이 문명국이라고 생각한다. 인구 비율로 보면 미국 박사 출신이 자국인 미국보다도 압도적으로 많은 세계 1위이며, 아카데미와 칸 영화제에서 대상도 탔다. K-팝은 말해 무엇 하리. 그래서 문해력이 세계 최하위권이라는 현실, 교육열에 비해 실제 학력(學力)은 낮고, ‘지식인’은 사라졌고 재생산되지 않으리라는 현실을 인식, 수용하기 힘들다. 특히 인문학 계통 지식인의 재생산 구조는 붕괴된 지 오래다.

 

한국 사회의 낮은 문해력 문제는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의 결합이다. 현재 플랫폼 자본주의는 시간이 많은 실업자를 온라인 소비자로 주체화(종속적 주체)시켰다. 나는 환원론이나 인과론에 반대하지만, 문해력 문제는 자본주의의 변화 과정의 필연적 산물이다. 지금 여론의 문해력에 대한 우려는 한국이 더욱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는 또 다른 발전주의 때문이지, 사회 변화를 추구해서가 아니다. 식민 콤플렉스, ‘선진국’, 기술자본주의에의 욕망은 한국 사회의 발전주의에 대한 연구와 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산업자본주의-금융유통자본주의-플랫폼자본주의로의 변화2)는 교육, 노동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간단히 말해 공부가 취업이나 근대적 의미의 자기실현으로 연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엉덩이 훈련’이 필수적인 공부를 할 이유가 없어졌다. 모든 공부는 외롭고 지루함을 견뎌내야 하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스포츠나 연예계에서 성공한 이들도 엄청난 연습을 하지만, 그들은 명성과 돈을 쥘 가능성이 있다. 공부는 그렇지 않다. 왜냐면, 다른 방식으로 ‘공부’하는 시스템이 생겼기 때문이다.

 

 

2)
물론 자본주의 이행과 단계를 이렇게 단순화시킬 수는 없다. 지역마다 다르며 국가 내부에도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어조’인 예단과 거대 담론에 대한 성찰은 홍훈, “인지자본주의와 기본소득”, 〈녹색평론〉, 179호, 2021년 7/8월호, 녹색평론사, 참조.

 

온라인은 공부하는 방법과 지식에 대한 개념을 바꾸었다. 심지어 요즘은 표절도 의미가 바뀌었다. 인용 없음이 아니라 다운로드다. 흔히 코로나 시대 비대면 학습이 학력 저하의 원인이라고 하지만,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교육 방송을 통해 공부하는 비수도권 지역의 입시생이나 방송통신대학 재학생들처럼 ‘의지를 가진’ 수용자는 온라인 교육도 대면 교육만큼 효과가 있다. 문제는 온라인이 공부 자체가 된 현실이다. 검색이 공부가 된 것이다. 이제 검색은 가장 보편적인 공부 방식으로 등극했다. 온라인의 장단점을 논하는 양비론적 시각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요지는 “장점도 있다”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나 검색은 공부를 하거나 정보를 얻는 방법이 아니다. 이미 내 머릿속에 입력된(발견된) 것을 구체화, 확인하는 과정이다. 검색은 입력창(入力窓)에 아는 것을 넣는 행위다. 모르는 것은 입력할 수 없다. 모르는 것은 다른 경험이 없다면 영원히 모르는 세계다.

 

읽는 형식이 아는 내용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온라인으로 보면 신문사 혹은 포털 사이트에서 메인에 올린 기사나 자신이 검색한 것만 읽게 된다. 당연히 광고와 관련이 있다. 빅데이터 시대는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보는 기사만 올린다. 우리는 남들이 선택한 정보만 보게 된다. 그래서 매체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비슷해지거나 극단적으로 달라진다. 두 경우 모두 페이크 뉴스가 섞여 있다.

 

인터넷과 관련하여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표현이 “정보의 바다”다. 바다?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인터넷은 단어 뜻 그대로, 바다가 아니라 특정 정보만 담는 그물망들의 간격(inter-net)이다. 우리가 찾는 정보는 이미 누군가 쳐놓은 그물 안에만 존재한다. 정치권과 포털 사이트 간의 협력(?) 스캔들이나 자본의 정보 통제는 일상적인 현실이다. 인터넷은 항구에 정박된 여러 가지 선박들일 뿐이다. 그런 배에서는 고기를 잡을 수 없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다. 아는 만큼‘만’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아는 방법과 모르는 방법, 자체에 대한 고민이다. 서가에서 모르던 책을 ‘꺼내 읽는 것’과 모니터에 ‘아는 책을 입력하는 것’, 후자는 이미 공부가 된(?) 것이다. 인터넷 정보를 맹신하면서 자기 생각은 없고 고집 센 사람들만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에고 인플레이션(ego inflation)의 시대에 소통이 잘 될 리 없다. 아니, 소통은커녕 오프라인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온라인에서의 악행과 관종 행위로 돈을 버는 시대다. 초등학생들은 유명 유튜버가 꿈이다. 누가 공부를 하겠는가.

 

기술 발전으로 인한 만성적 실업, ‘한 명이 10만 명, 아니 10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시대’에 그 ‘한 명이 아닌 나’는 모두 비참한 잉여이다. 이제 노동이나 공부가 사회적 성원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지금은 소비 주체이거나 온라인 사용자가 시민이다. 시민들은 모두 스마트폰을 쥐고 (보는 자세로서) 고개를 숙이고 살아간다.

 

사법고시, 학력고사, 신춘문예 같은 제도는 많은 문제를 낳았다. 지금은 로스쿨, 수시전형, “누구나 작가”인 시대로 대체되었다. ‘덕분에’ 이전 제도로 훈련된 이들의 지식은 사라졌다. 나(필자)를 지칭할 때, “작가”라고 하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이중적 의미에서 이 말이 싫다. 내게 작가는 이청준이나 박경리 같은 소설가를 의미한다. 그런데, 나는 소설을 쓴 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한편, 모든 사람이 작가인 시대가 반드시 바람직하기만 할까. 말할 것도 없이 작가마다 엄청난 스펙트럼이 있다. 그런데 그 작가 중에서 남녀 불문 ‘젊음과 외모’, ‘가벼운’ 글을 주로 쓰는 작가들의 책이 팔린다. 소설을 비롯한 요즘 책들은 쓴 책을 출판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요구와 지향에 맞게 기획된다.

 

내 문제의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한국 사회의 낮은 문해력의 원인은 플랫폼 자본주의의 발달 때문이다. 온라인 문화가 그 핵심 구조이고, 문해력 저하는 결과다. 그러나 ‘IT 강국’이라는 자부심에 넘치는 한국의 아류 제국주의, 신애국주의는 온라인 매체에 대한 언급 자체를 “표현의 자유 억압”, “지식인 중심주의”라고 비난한다. 신상이 털릴 수 있다. 나는 이런 피해를 입은 지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현상을 정확히 보여준다. “우리(네티즌)는 이제까지 사회적 발언을 하지 못했다. 당신 같은 지식인(나의 지인)은 신문에 지면을 갖고 있다. 대신 우리에게는 SNS가 있으니, 이는 평등하다”는 것이다.

 

일단, 나는 한국 사회에 ‘지식인’의 존재와 개념이 사라진 지 오래라고 생각하고, 누구나 아무 발언이나 할 수 있는 현실이 표현의 자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 네티즌의 사고방식은 전체주의적 평등 개념이다. “중앙일간지라고 불리는 종이 신문의 필자로 ‘픽업’되지 못하면, 나는 SNS에 글을 쓰겠다. 그리고 당신과 나는 동등한 지식인 아니, 내가 더 힘 있는 인플루언서”라는 얘기다. 키보드 워리어, 페이스북의 ‘좋아요’ 갈등, 관종과 셀럽 문화, 익명의 혐오, ‘바람직한’ 의미의 연대가 모두 온라인상에서 일어난다. 코로나 이후 줌을 중심으로 온라인의 위력은 더욱 가속될 것이고, 팬데믹과 온라인은 쌍생(雙生)할 것이다.

 

사실, 문해력을 향상할 방법은 없다. 온라인 서점의 등장은 인류를 새로운 중세로 이끌었다. 중세와 다른 점은 그 때 세계의 주관자는 신이었지만, 지금은 자본이라는 차이뿐이다. 세계 최고의 스마트폰 보급률을 자랑하는 한국 사회. 사람들은 정보, 지식, 앎, 팩트를 동일시한다. 맥루한의 통찰대로 모든 매체는 몸의 확장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구입한 기계의 기능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온라인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사람일수록 ID는 제1의 자아다. 현실에서 사회적 성원권을 부정당한 이들일수록 그들만의 부족 사회를 형성한다.

 

대안이 없지는 않다. 학력, 학벌 사회를 학력(學力) 사회로 바꾸고, 학교 공부의 의미가 입시가 아니라 공동체 성원으로서 기본 자질을 형성하는 장으로 바뀌어야 한다. 어차피 입시는 취업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공부는 하고 싶은 사람만 하고, 학교 성적 여부로 차별이 없어야 한다. 그러려면, 공부의 동기와 열정이 10대에만 한정되지 않는 평생 공부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이 큰 틀이다. 한자 병기도 중요하다. 한국어 단어의 80%는 한자다. 한자를 모르고 문장력이나 표현력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자 교육을 필수로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병기하자는 주장이다. 여기 내가 ‘대안’이라고 썼지만, 스스로 민망하다. 불가능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발전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없는 한, 문해력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한국은 발전주의, 기술 강국을 열망하다가 문해력으로 망하는 사회가 될지도 모른다. 문해력은 ‘발전주의가 바람직한가, 아닌가’ 자체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사회적 판단력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왜 인간인가’는 언어 능력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인간이 추진하는 자본주의는 인간을 다른 종으로 만드는 경지에 이르렀다.

 


정희진

 

정희진(문학박사, 여성학 연구자)

문학박사, 서평가, 여성학 연구자. 저서로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처럼 읽기』, 『낯선 시선』, 『혼자서 본 영화』, 『아주 친밀한 폭력』,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현재 전 3권)』 등이 있고, 그 외 60여 권의 편저, 공저, 역서가 있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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