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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2  20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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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 기획이 뜬다]
인생의 모든 ‘띵’ 하는 순간,
식탁 위에서 만나는 나만의 작은 세상

 

 

 

김지향(세미콜론 편집팀장)

 

2020. 07.


 


요리책들

 

출판 편집자의 주요 업무는 ‘편집’이기도 하지만 ‘기획’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기획의 시작은 개인의 필요나 취향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분량 면에서는 짧고, 형태 면에서는 아담한 에세이 시리즈를 만들겠다는 것은 나의 오랜 의지였다.
작년에 이직해온 ‘세미콜론’은 민음사 출판그룹의 만화․예술 브랜드였지만 두어 해 전부터 『실버 스푼』과 같은 굵직한 요리책을 필두로 라이프 스타일 쪽으로의 분야 확장을 꾀하고 있던 참이었다. 여전히 세미콜론 하면 만화와 그래픽 노블을 주력으로 출간하는 브랜드로 시장과 독자는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미콜론을 새롭게 알릴만한 시도들이 시급하고 절실했다. 오래도록 머릿속에서만 그려오던 시리즈에 대한 구성에 ‘반짝’ 하고 전구가 켜졌다.

 

먹고사는 일은 지루한 동시에 숭고하다. 매일 챙겨 먹어야 하는 끼니는 번거로운 동시에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기쁨이다. 잘 먹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 이상으로 삶의 커다란 행복이 된 지 오래다. 살다가 때때로 마주하는 ‘띵’ 하는 순간! 머리가 띵 하고, 배 속이 띵 하고, 그 무엇보다 마음이 띵 하는, 바로 그때! 그렇게 온몸을 찌르르르 통과하는 기쁘고 노엽고 슬프고 즐거운 삶의 장면마다 우리는 음식과 함께해왔다.

 

쿡방, 먹방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넘어 유튜브까지 그 인기가 대단한데, 왜 음식 에세이는 크게 성공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음식 에세이’를 작정하고 잘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냥 말고, 정말이지 잘. 그저 ‘맛있는 음식’이나 ‘맛집 소개’가 아닌, 개인의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 그리고 삶의 태도까지도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 엄숙하거나 무겁지 않게, 산뜻하면서도 가볍지 않게. 그 적절한 지점을 찾느라 기획안을 공들여 쓰고 또 고치고 또 고쳤다. 정밀하고 정교한 콘셉팅이 필요했다.

 


샐러드와 책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싶은 마음

 

따뜻한 국밥 한 그릇으로 마음의 허기를 달래고, 쨍하게 시원한 냉면 국물 한 모금으로 가슴에 맺힌 화를 식히고, 입안이 얼얼하도록 매콤한 음식 한 젓가락에 지옥의 문턱을 밟았다가, 다디단 디저트를 한입 베어 물고 금세 천국을 경험하기도 하는 우리들이 아니었던가. 늘 곁에 있는 음식과 함께 쌓여가는 영롱한 이야기들을 수집해두고자 이 시리즈의 기획은 출발했다. ‘먹는 이야기’를 하되 ‘먹는 이야기’에 한정되어서는 안 되었다.

 

한 권의 책에는 하나의 음식이나 식재료, 혹은 여러 음식을 하나로 아우르는 데 모두가 납득할 만한 주제를 가급적 선명하게 선정해나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각 권마다 주제가 되는 키워드가 놓이게 될 예정이다. 키워드 선정 규칙이랄까, 조건은 다음 네 가지 중 하나에 해당하면 된다. 하나, 구체적인 음식 한 가지(예를 들면, 짜장면). 둘, 평소 자주 쓰는 식재료(예를 들면, 양파). 셋, 상징성을 가질 만한 음식의 범주(예를 들면, 해장 음식). 넷, 음식과 관련된 특정 주제(예를 들면, 조식).

 

여기서 중요한 것은, 책마다 메인 테마로 삼을 수 있는 ‘한 가지’이다. 때로는 음식이 아니어도 되지만 음식과 필연적인 관련성은 있어야 하며, 전체적인 구성을 하나의 주제로 아우르는 데 충분히 납득이 갈 만한 것이어야 한다. 장르 불문 이유 불문 여러 음식을 분식집 메뉴판처럼 늘어놓는 방식은 의식적으로 지양하고자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조건은, 각자 선정한 주제에는 기본적으로 애정이 바탕에 깔려 있을 것.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 더욱 할 말이 많아지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캐치 프레이즈가 저절로 따라붙었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시리즈의 브랜딩과 정체성을 정교하고 선명하게 다듬는 작업이 매일 반복되었다. 시리즈 가제목이었던 ‘띵푸드’에서 발음이 거칠기도 하고 지나치게 직관적인 단어인 ‘푸드’를 걷어내고 ‘띵’만 남기는 데까지 8개월여 소요됐다. 음식 에세이라는 상징성을 정면으로 담아낼 것인가, 조금 더 명료하고 간결하면서 산뜻하게 다가갈 것인가의 고민이 깊었기 때문이다. 그에 걸맞은 외피 디자인과 시리즈 로고를 만들어 나가는 데에도 굉장한 공을 들였다.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여러 가지 판형을 실제 크기로 잘라 다양한 사람들 손에 들려보았다. 어느 비율이 되어야 적당히 한 손에 안정적으로 들어오는지가 관건이었다. 시리즈를 대표할 로고에서는 한글 ‘띵’이 직관적으로 읽혔으면 했고, 동시에 시각적으로 안정적인 도형의 형태로 보일 수 있기를 바랐다. 이런 편집자의 ‘심플하면서도 화려하게’ 같은 주문을 디자이너는 모두 인내해주었다. 그러면서도 ‘모서리가 없어서 어색한 빈자리가 생기지 않는 동그란 식탁’이라는 시각적 콘셉트에도 부합해야 했다. 뒤표지는 앞표지의 확장 변형의 느낌으로 오브제를 활용한 패턴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시리즈가 여러 권 누적되어 뒤표지만 늘어놓고 보았을 때 각 권의 고유한 개별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연속적인 연계성을 주고자 한 디자이너의 의도가 충실히 반영되었다.

 


띵 시리즈

 

그러는 와중에 작가를 섭외하며 리스트를 구축해나갔다. 시리즈인 만큼 론칭과 동시에 공개될 근간의 목록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제일 처음 기획안 한 장만 보고 기꺼이 써보겠노라 큰 결심 해주신 작가님, 그리고 먼저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한 사람을 믿고 계약하신 작가님, 그 후 두 사람을 믿고 계약하신 작가님, 또 그 후 세 사람을 믿고 계약하신 작가님… 그렇게 먼저 계약한 작가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렇게 짧은 시간에 열일곱 명의 작가가 차례로 줄을 섰다. 각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음식은 무엇인지 스스로 돌이켜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퍽 흥미로웠다. 나는 이 음식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걸로 한 권의 책이 될까?’하고 의아해하다가도 오히려 할 말이 넘쳐서 작은 판형에 모두 담을 수 있을지를 걱정하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큰 나의 마음을 마주하는 순간은 작가 개개인에게도 반갑게 다가왔다. 이렇게 한 상 가득 풍성하게 차려낸 이야기 식탁에 이제 독자들이 둘러 앉아주기만 하면 되었다.

 

목표로 설정해둔 출간일을 목전에 둔 어느 날,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내부에서는 론칭 시기를 미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컸다. 인류의 안전에 대한 우려와 동시에 왜 하필 이 시점에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원망하는 마음도 일었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오프라인 서점에 나가 책을 살펴보는 독자의 수가 현저히 줄었다는 분석도 하루하루 쏟아졌다. 그러나 나는 배수의 진을 친 이순신 장군의 마음으로 시리즈를 론칭했다.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시대의 흐름을 읽으면서 비슷하지만 다르게

 

다행히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배본 바로 다음 날 ‘2쇄 화급 요청’이 들어왔다. 그것도 1쇄보다 부수도 더 많았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등 다수의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다루어주었다.

 

그중 〈매일경제〉의 기사 제목에서 나는 잠시 멈칫했다. “제2의 ‘아무튼 시리즈’ 나온다” 고백하건대 나는 ‘아무튼’ 시리즈의 열혈독자다. 가장 먼저 출간된 ‘피트니스’에서부터 2020년 6월 기준 가장 최근에 출간된 ‘스윙’까지 한 권도 빠지지 않고 모두 가지고 있다. 에세이의 장점을 고스란히 껴안고 있으면서도 콤팩트한 문고본 사이즈, 명확한 콘셉팅, 경쾌한 디자인 등에서 나의 관심 분야가 아니더라도 전 권을 사 모으는 재미를 주었다. 제철소, 위고, 코난북스 이렇게 세 출판사에서 하나의 시리즈 라인을 공유한다는 것도 너무나 신박한 시스템이었다. 〈아무튼, 아무튼〉을 쓰고 싶을 지경이었다.
‘띵’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아무튼’ 시리즈를 통해 독자로 얻은 즐거움을 편집자로 나 역시 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음을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혹시나 그대로 모방하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띵’ 시리즈 론칭을 준비하는 1년 동안은 의식적으로 ‘아무튼’ 시리즈는 펼쳐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신간이 출간되면 차곡차곡 사서 책장에 꽂아두고 곁눈질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2의 아무튼”이라 소개받았다는 건 나로서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리고 기사에서 함께 소개된 끝말잇기 형식을 차용한 ‘말들의 흐름’ 시리즈와 최근 새롭게 론칭한 드렁큰에디터의 ‘먼슬리 에세이’ 시리즈도 몹시 기대가 된다. 두 시리즈의 근간 목록을 보고 있자니 왜 내가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아, 두 브랜드의 준비 기간 동안 담당자들이 흘렸을 피, 땀, 눈물이 고스란히 보여서다.)
아무튼 ‘띵’ 시리즈는 ‘아무튼’처럼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낸 성공적인 시리즈를 롤 모델로 삼은 것은 분명하다. ‘아무튼’ 외에도 ‘쏜살문고’를 비롯한 여타 문고본들, 그리고 수많은 일반 단행본 시리즈와 외서들까지 두루 폭넓게 참고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띵’ 시리즈만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위해 내용적 콘셉트부터 외양에 이르기까지, 아주 디테일한 곳곳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리고 그 고민은 지금 끝난 것이 아니라 시리즈가 계속해서 출간되는 한 지속될 것이다. 기쁘게, 기꺼이.

 


아무튼 시리즈

 

각 권마다 주제가 바뀐다는 점에서 잡지 같기도 하고, 한 사람(혹은 두 사람)의 에세이로 온전히 채워진다는 점에서 일반 단행본 같기도 한, 무크지의 경계선에 이 책들이 놓여도 좋겠다. 그러면서도 시리즈의 고정된 포맷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제각기 자유로운 디자인과 내용 구성을 통해 작가의 개성을 충분히 담아내고자 하였다.

 

책의 모두(冒頭)에는 담당 편집자의 ‘Editor's Letter’를 싣는다. 이것은 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기도 하지만, 단행본에서는 새로운 시도가 될 것이다. 독자에게 건네고 싶은 ‘말 그대로’ 편지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비하인드 편집 스토리를 소개하거나 짧게나마 책을 안내하는 문장들로 채워질 예정이다. 이것은 편집자의 목소리를 통해 조금 더 가까이 독자와 소통하고 싶은 출판사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먼저 묶인 두 권 『조식 : 아침을 먹다가 생각한 것들』과 『해장 음식 :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마신 다음 날에는』에 이어 『그리너리 푸드 : 오늘도 초록』까지 총 세 권이 출간되었으며, ‘프랑스식 자취 요리’와 ‘치즈’가 다음 순서로 예정되어 한창 편집 중에 있다.

 


오늘도 초록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출간 후 가장 큰 고민은 오프라인 행사를 진행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코로나19 이전의 시대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섬뜩한 말도 들었지만… 무려 새로운 시리즈가 론칭되었고 두 권이 동시에 출간되었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평소 같았다면 론칭 기념 북 토크를 기획했을 것이며, 작가님과 조찬 모임이든 해장 모임이든 음식을 나눠 먹는 자리가 마련되었을 것이며, 여러 동네서점을 순회하며 미니 사인회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 책을 읽어준 독자와 직접 만나 그 눈동자에 눈 마주치며 목소리를 들었을 테지만, 지금 상황에서 무리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 대안으로 SNS를 이용한 라이브 방송의 형태를 선택했다. 대면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겠으나 독자와 소통하기 위한 차선책으로는 썩 나쁘지 않았다. 1권 『조식』은 주말 오전 느즈막히 일어나 아침인지 점심인지 싶은 시간에, 2권 『해장 음식』은 화요일 저녁 느즈막한 8시쯤으로 정해 사전 안내 후 진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보통 평일 저녁 시간대로 고정되어 있는 북 토크 시간을 책의 성격에 조금 더 맞춰 유동적으로 조정해본 것이다. 오히려 거의 일방적인 강연에 가까운 오프라인 북 토크보다 실시간으로 달리는 댓글을 통해 양방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친필 사인을 받고 싶어 하는 몇몇 독자를 위해서는 사인본을 소량이나마 준비해 동네서점 몇 곳에 비치하고 안내했다.

 

또한 이벤트 경품으로 흔히 손쉽게 이용하는 커피 기프티콘 대신 ‘미깡 쿠폰’을 발행했다. ‘미깡 쿠폰’이란 책에 수록된 미깡 작가님의 단골 해장국집에 선결제를 해놓고 쿠폰 형태로 발행하여 이벤트에 당첨된 독자가 직접 식당을 방문해 드실 수 있도록 사장님과 협의한 것이었다. 혹여나 매장 내 식사가 걱정스러운 분들을 위해 포장해서 가져가실 수 있도록 조치도 해두었다. 코로나19로 매출이 많이 줄어 위축되어 있던 식당에 작은 도움이나마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오프라인 행사가 없어 아쉬운 독자들에게 작은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포개졌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갔다.

 

앞으로 차례차례 세상에 나올 이 시리즈들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뜻밖의 ‘재난지원금’ 같은 위로를 줄 수 있다면 더없이 커다란 보람일 것이다. 혹시 몰라 이야기해두지만, 이 시리즈는 여러 오프라인 서점에서 재난지원금 사용으로 구매가 가능하다. (그래도 서점별로 상황이 다를 수 있으니, 방문 전 문의해보면 좋겠다.)

김지향(세미콜론 편집팀장)

민음사 출판그룹 ‘세미콜론’ 편집팀장. 점심 먹고 나오는 길에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저녁 식탁을 치우면서 내일 점심은 뭐 먹지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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