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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8  20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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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인 이야기, 서점은 항상 열려있다]
한밤중의 서점에서

 

 

 

박수진(교보문고 북뉴스 에디터)

 

2021. 12.


 

미드나잇 북스토어

 

조금 전만 해도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북적거리는 기척이 가득하던 서점은 밤 10시가 지나자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서점 출입구에는 셔터가 내려졌고 직원들도 모두 퇴근했다. 밤 12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드넓은 교보문고 광화문점에는 딱 세 명만 남아있을 예정이다. 네, 그중 한 명이 바로 저예요!!!

 


한밤의 서점

 

'한밤의 서점에서 (대충) 나 홀로'라는 낭만적인 사건은 별로 낭만적이지 않은 메타버스에서 시작되었다. 요즘 메타버스나 가상 스토어 같은 단어를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알아보니 의외로 기술적으로나 비용적으로나 접근이 어렵지 않은 거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도를 먼저 해보는 것이 인지상정이랄까, 대형서점의 자존심이자 책임감 같은 거랄까. 이런 감언이설로 회사를 설득해서 광화문점 전체를 3D 촬영해 매장 전체를 360도로 둘러볼 수 있는 가상 서점을 구현하게 된 것.

 

가상 스토어 제작을 위해서는 해당 공간을 360도 회전 카메라를 이용해서 구석구석 꼼꼼하게 촬영해야 한다. 이렇게 촬영한 공간이 가상 스토어로 박제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저분한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고 서가에 꽂힌 책들을 일렬로 세우고, 매대에 누운 책들의 칼각을 맞추는 세심한 손길이 필요하다. 네, 그게 광화문점에서 새벽에 제가 한 일이에요!!! (적어 놓고 보니 이 일도 낭만적인 구석은 별로 없네요.)

 


교보문고 광화문점 가상 서점 이미지

 

그 조용한 밤, 수많은 서가를 하나하나 살피며 책들을 정리하면서 혼자 계속 감탄했다. "와! 이런 책도 있었어?" 특히 평소에는 자세히 볼 일이 없던 벽면 서가, 여기가 정말 재밌는 곳이었다. 취미/실용 코너를 보라. 세상에는 이토록 재미나 보이는 취미생활이 많았다. 이 취미들을 하나씩만 시도해 봐도 어디 가서 이야깃거리가 한 바가지는 될 것이다. 역사 코너를 보라.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도 다 역사가 있고 이야기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소설 코너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쭉 읽다 보면 가슴이 막 벅차오른다. 세상에는 이토록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하는구나. 게다가 소설은 직접 읽어보기 전엔 어떤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것이라 내가 펼쳐 보지 않은 책들로 가득한 서가 앞에 서니 거대한 뽑기 기계 앞에 선 것처럼 두근두근하는 것이다.

 

서점, 특히 대형서점은 단순히 '많은' 책이 있는 곳이 아니다. 서로 '다른' 책들이 '많이' 있는 곳이다. 이렇게까지 다양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 책들이 여기 서점의 서가에 꽂혀 있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그 다양함이 위로가 된다. 저자는 세상에 어떤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썼을 것이다. 출판사는 그 책의 독자가 있다고 판단을 했기에 비용을 들여 책을 출판했을 것이다. 서점은 그 책이 팔릴 만한 책이기 때문에 진열을 하고 판매를 하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까, 서점에서 내가 원하던 책을 찾아냈다면, 그건 당신의 취향과 관점과 필요를 이해하는 다른 누군가가 적어도 3명은 존재한다는 의미다. 심지어 그 책을 산 다른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4명 이상과 연결된 존재군요! 이렇게 생각하면 책을 사는 일이 너무 멋지고 낭만적인 일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열린 서점

 

그날 밤 텅 빈 서점을 구석구석 둘러보다 새삼스럽게 발견한 또 다른 사실은, 서점에는 학습서와 취업/수험서 공간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었다. 평소에 오프라인 서점을 갈 때면 (광화문점 기준) 인문 - 정치/사회 - 경제/경영 - 문학 - 예술 - 취미/실용 순으로 분야별 신간 매대를 쭉 돌고 마지막으로 문구류 코너로 가는 동선을 선호하는 터라 몰랐었다. 학습서와 취업/수험서 공간에 이렇게나 광대하고 이렇게나 많은 책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흔히 전통적인 '독자'라고 하면 문학이나 인문서 독자를 생각하게 된다. 매주 발표되는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도 학습서와 취업/수험서는 집계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다. 독자라 함은 '읽는 사람'이란 뜻인데 문제집을 '읽지'는 않으니까 당연하다 생각하기 쉽다. 그렇다면 이런 책을 찾는 사람들은 '독자'가 아니라 '고객'일까? 이건 좀 이상한 구분 아닐까?

 

책과 출판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어쩌면 우리는 전통적인 '책'과 '독서'와 '독자'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21세기의 책은, 읽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표지의 책을 구입해서 펼쳐 보지 않고 진열만 해둘 수도 있다. 학습서를 사서는 책 위에 온통 새까맣게 노트와 필기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책의 페이지를 잘라내서 종이 장식물을 만들게 하는 책도 있고 유아용 촉감책이나 사운드북도 '읽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 '책'이고 이 책을 손에 든 이들은 모두 '독자'의 자격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점, 특히 대형서점은 이렇게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열린 공간이 되어야 한다. 어떤 형태의 책이건 어떤 목적으로 그 책을 찾건, 원하는 책을 쉽고 빠르게 구할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은 대형서점의 오래된 야망이었다. 그 야망의 실현을 위해 분류와 진열, 물류와 배송 시스템을 갖추었고 말이다. 다만 이제까지 무의식적으로 '독자'와 '고객'을 다른 부류로 나누어 생각했다면, 앞으로는 '읽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독자라는 카테고리 안에 포함시켜 새로운 독자를 만들고 확장하는 방법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계속 존재하는 것의 책임감

 

읽지는 않지만 책을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읽지도 않고 책도 안 사는 사람들에게도 열린 곳이 되는 것은 대형서점의 책임이라는 생각을 한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 중에는 그곳에서 책을 사지 않은 사람이 책을 산 사람보다 더 많을 것이다. 일반 상점이었다면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가는 고객에게 눈치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서점은 관대하다. 서점은 책을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든지 환영한다.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 경험을 가진 사람은 책을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책에 호의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은 언젠가 그 자신이 독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직접 읽지는 않더라도 책 읽는 다른 사람들, 책을 쓰는 작가, 책과 관련된 생태계를 구성하는 여러 구성원들을, 적어도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책에 호감을 갖게 하는 것, 그것 역시 대형서점이 가지는 책임감 중 하나다.

 

인터넷서점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책임감도 있다. 책 한 권이 서점에 등록되기 위해서는 서지 정보뿐만 아니라 분류, 책 소개, 저자 소개, 목차 등 다양한 도서 정보들을 입력해야 한다. 책을 알리고자 리뷰도 쓰고, 저자 인터뷰도 하고, 기획기사도 쓰고, 영상 콘텐츠도 만든다. 그런다고 책이 더 많이 팔린다는 보장은 없다. 책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만들지 않아도 사실 크게 문제는 없다. 그래도 노력하고 있다. 책에 관한 콘텐츠가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더 낫고,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보는 사람이 있으면 된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내가 만든 콘텐츠를 봐 주는 사람들이 늘 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반응과 이익은 없는 일들이다. 오히려 비용이라면 비용이다. 공간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비용이며 매출에 큰 도움 안 되는 나에게 주는 월급까지. 그럼에도 나는 책에 대한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계속 하고 싶다. 서점은 온․오프라인 서점을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즐거운 추억을 선사하기 위해 계속해서 여러 행사를 기획할 것이다. 서점이 존재하는 의미와 그 책임감을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점이 있는 새벽

 

새벽 6시, 청소하는 분들이 출근하면서 고요했던 서점은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촬영을 마치고 주차장을 통해서 건물 밖을 나섰다. 광화문 거리는 아직 어둡고, 자동차도 사람도 드물게 지나갈 뿐 고요했다.

 

하지만 아직 잠들어 있는 도시 속에,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는 중인 서점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마음속에 ‘서점이 깨어나고 있다’는 문장을 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살짝 기분이 좋았다. 이제 곧 서점의 문이 열릴 것이다. 그 서점은 모두에게 열려있다.

?

 

박수진 (교보문고 북뉴스 에디터)

교보문고 북뉴스 에디터로 책에 관한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leftfield@kyobo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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