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Vol.14  2020.09.

게시물 상세

 

[1인 1책 시대]
책을 다시 생각한다

 

 

 

이은지(문학평론가)

 

2020. 09.


 

 

 

플랫폼 노동이 된 글쓰기

 

카밀리앵 루아의 『소설거절술』(톨, 2012)은 저자가 두 권의 소설을 출간하기까지 수많은 출판사에 원고를 투고하고 받은 99통의 거절 편지를 엮어낸 것이다. 저자는 자신과 같은 무명작가에게 편집자가 이토록 갖은 수를 다 써가며 원고를 거절하더라도 실의에 빠지지 말고 용기를 내라는 취지에서 이 책을 펴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문청의 자기계발서’라고 해도 좋을 이 책의 메시지를 뒤집어보면 편집자가 좋은 저자와 좋은 책을 발굴하기 위해 얼마나 분투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출판사에 원고를 투고하는 것이 더 이상 작가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게 된 오늘날 『소설거절술』의 메시지는 절반만 유효하다. 1인 1스마트폰 보급이 정착되고 인터넷을 통한 상호작용이 일상이 되면서 글쓰기 또한 그러한 상시적인 피드백 대상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제 작가가 되는 것이란 장시간 책상 앞에 앉아 홀로 고뇌한 결과물을 또 다른 책상 앞에 앉은 편집자가 홀로 고뇌하여 출간 여부를 결정하는 지난한 과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앱을 통해 제공되는 다양한 글쓰기 플랫폼은 작가와 독자를 곧장 중개하고, 이 과정에서 흥행 여부에 따라 책 출간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프로세스를 만들어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김동식 작가를 들 수 있다. 첫 소설집 『회색인간』(요다, 2017) 출간 당시 언론에서는 그의 이력을 주목하여 다루었다. 등단은 고사하고 정식으로 문학교육도 받지 않은 그는 낮에는 주물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낮 동안 머릿속으로 떠올린 이야기를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리면서 독자의 호응을 얻었다. 독자는 맞춤법이나 이야기 구성 등에 대한 조언을 댓글로 달았고 작가는 이를 반영하여 이야기를 고쳐나갔다. 그렇게 축적된 수백 편의 엽편소설은 작품집으로 엮여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회색인간


 

 

웹소설 전문 플랫폼은 작가와 독자를 연계하는 이러한 프로세스를 보다 체계적으로 활용한다. 웹소설은 초기 일정 분량을 무료로 연재하면서 독자의 충분한 관심을 받아야만 후반부 유료 연재를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플랫폼 특성상 웹소설 작가는 서사의 방향이나 완급조절, 캐릭터나 사건 개연성 등 작품 전반에 대한 독자의 반응에 민감해야 하고, 독자의 조언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독자의 인기를 얻는 작품은 출판사와 출간 계약을 맺는다. 편집자의 안목이 아닌 독자의 반응을 통해 작가가 되고 출간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문피아 로고


 

 

 

 

굿즈가 된 책

 

이처럼 오늘날 책은 실물로 생산되기에 앞서 독자와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독자의 지지를 얼마나 얻느냐가 출간 여부의 중요한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달리 말하면 책은 더 이상 온전한 책으로써만 독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책이 되기까지의 모든 공정을 소비하는 ‘팬질’ 내지 ‘덕질’에 가까운 방식으로 만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그랬을 때 종이로 된 실물의 책은 그것이 제작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덕질한 이들에게 일종의 사은품처럼 최종적으로 주어지는 ‘굿즈’와 같은 것이 된다.

 


양준일 MAYBE: 너와 나의 암호말


 

 

인플루언서가 출간한 책이나 텀블벅을 통해 출간한 책이 큰 인기를 끄는 것도 같은 맥락의 현상이다. 인플루언서가 출간한 책은 애초에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구매에 나선다는 점에서 굿즈 성격을 강하게 띤다. 양준일과 김호중의 에세이가 순전히 팬심의 힘으로 온라인서점 예약 판매 1위를 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 경우 책의 내용보다는 그 책을 샀다는 행위 자체가 우위에 놓인다. 텀블벅의 경우, 자신이 평소 좋아하는 작가가 책에 참여하거나 책의 주제가 자신의 취향이나 정치적 지향에 맞을 때, 이를 지지하는 차원에서 후원 형식으로 책을 사전 구매하는 것이다. 텀블벅은 기존의 방식으로는 출간되기 어려운 책, 즉 대다수가 주목하는 소재가 아니어서 이윤을 기대할 수 없는 희소한 책을 출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책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책의 출간 여부를 개인의 미적 취향이나 정치적 지향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축소시킨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어쨌거나 텀블벅 후원은 책이 나오기도 전에 책을 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텀블벅 후원은 책을 읽으면서 겪게 될 독서 체험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관을 책이 강화해줄 것에 대한 기대를 지불하는 것인 셈이다. 즉 독서 후 자신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가 아닌, 현재 자기 자신을 보다 강화해주리라는 기대에서 텀블벅 후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현재 책은 독서의 소재가 아니라 좋아하는 대상을 덕질하는 상품으로써의 굿즈이거나, 자신이 지지하는 가치를 물질적으로 현시하는 행위에 가깝게 변해가고 있다(조국 백서와 조국 흑서의 흥행은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최근 출간되는 책이 예전보다 표지 디자인에 공들인다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표지 디자인은 책의 얼굴로서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서 중요하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는 특정한 책을 구매하여 소유하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서도 중요하게 되었다. 리커버판이 성행하는 현상 또한 같은 맥락이다. 리커버판은 굿즈의 연장선이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리커버판 발행을 통해 흥행이 보장된 책의 판매부수를 올릴 수 있다. 독자 입장에서는 동일한 책의 한정판 내지 특별판을 소유한다는 만족감과 더불어 책의 소유 여부를 과시할 수 있다. 즉 리커버판은 상품으로써의 가치 외에는 아무것도 보증하지 않는다. 표지만 바뀌었을 뿐 책의 내용은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브런치 작가 신청


 

 

 

 

누구나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쓰기가 플랫폼 노동이 되고 책을 읽는 것보다 사는 것이 중요한 행위가 되면서 쓰기와 읽기의 성격도 변화하였다. 플랫폼을 통해 글쓰기의 진입장벽이 낮아지면서 일정 수준 이상 글쓰기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도 누구나 글쓰기에 뛰어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글쓰기에 뛰어드는 것은 단순히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글쓰기의 진입장벽이 낮아지기 전부터 상존해왔던, 작가에 대한 환상과 작가가 되고픈 욕망을 예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

 

탐독이 아닌, 구매와 소유를 위한 것으로 책의 성격이 변화했을지언정 지적인 생산물로써 책이 갖는 아우라는 여전히 유효하다. 책을 생산하는 작가라는 존재에게 부여되는 아우라 또한 유효할 뿐 아니라 전보다 훨씬 강렬해졌다. 작가에 대한 환상은 한 권의 책으로 집약된 지성의 성취를 누구나 쉽게 이룰 수 없다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다. 작가라는 존재의 아우라는 아무나 작가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형성된 것인데,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게 된 환경을 통해서 다수가 이를 성취할 수 있는 듯 적극적으로 독려하는 현상은 아이러니하다.

 

경제적 요인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기존의 임금노동을 통해서는 자아 성취와 경제적 안정을 이루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저금리・저임금・저성장의 뉴노멀 시대에 작가가 되고 책을 내는 것은 특별한 매력을 갖는다. 『언어의 온도』(이기주, 말글터, 2016)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백세희, 흔, 2018)처럼 인지도 없는 작가가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서 책이 흥행하는 경우, 일반적인 임금노동을 통해서는 불가능한 수준의 수익과 명예를 한 번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주 작가나 『공부머리 독서법』(책구루, 2018)의 최승필 작가처럼 자신이 직접 혹은 배우자를 통해 1인 출판사를 설립하여 직접 책을 내는 경우 책 판매를 통한 모든 수익을 고스란히 취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에는 적지 않은 위험 부담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이는 일반인을 글쓰기 시장으로 끌어들이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즉 예전보다 더 많은 이들이 글쓰기에 뛰어들고 작가가 되려는 현상은 작가와 책에 대해 여전히 존재하는 고전적인 통념, 작가 등단 경로와 책 출간 방식의 다변화, 책의 흥행과 이로 말미암은 강의 기회의 확대 등을 통한 경제적・사회적 지위 상승에의 기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이러한 현상을 악용하여 수강생으로부터 부당하게 이익을 편취하는 글쓰기 아카데미가 성행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결국 책의 내용이 아닌 책의 외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이다. 개중에는 특출한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읽으나 마나 한 내용의 책이, 예비 작가와 출판사와 대중의 요구를 절묘하게 충족시켜 흥행하기를 은밀히 바라며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온다.

 

 

 

읽고 싶은 것만 읽고, 읽히는 것만 쓴다

 

쓰는 것이 자유로워지면서 읽는 것의 진입장벽도 함께 낮아진다. 보다 많은 대중의 호응을 얻는 것이 중요한 플랫폼 특성상, 글과 작가가 기꺼이 먼저 대중의 요구에 맞추게 된다. 즉 글이 대중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글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인터넷을 통해 적극적이고 동시적으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면서, 대중이 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글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그 우열 또한 가릴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중의 호응을 얻는 유일한 척도는 다수가 선호하고 확신하는 ‘여론’을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여론은 이전보다 훨씬 사적이고 선별적이다. 독일 철학자 군터 게바우어와 스벤 뤼커는 『새로운 대중의 탄생』(21세기북스, 2020)에서 인터넷과 같이 완전히 개방적인 네트워크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는 주장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옳다고 확인해주는 것만 찾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여론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재생산 및 강화하는 것이 되고, 결과적으로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의 반영에 불과하게 된다.

 

이러한 네트워크 환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새로운 글쓰기 환경 또한 자신의 견해나 취향에 맞는 글을 선별하여 읽는 이들을 향해 열려 있다. 글을 쓰는 이는 읽고 싶은 것만 읽는 다수의 이들로부터 선택받기 위해 그들의 차원으로 내려가 그들의 욕망에 조응하여 글을 쓰게 된다. 더 많은 이들이 읽고 싶어 하는 것에 맞춰 쓰이는 글은 오로지 관심과 인기를 끌기 위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네트워크 특성상 관심을 받는 글은 관심을 받지 않는 글에 비해 더 많은 이에게 노출되고 읽히면서 점점 더 많은 주목을 받는다. 이러한 메커니즘 속에서 사람들은 단지 많은 사람들이 읽기 때문에 그 글을 읽는다.

 

나아가 사람들은 그저 읽기 위해 읽는다. 다수의 관심을 받고 인기를 끄는 것이 글의 존재 이유가 되어감에 따라, 글을 읽는 이에게도 무엇을 읽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단지 읽는다는 사실만이 중요하게 된다. 읽는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에고만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즉 당신이 ‘무엇’을 읽건, 당신이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무엇이든 쓸 수 있고 무엇이든 읽을 수 있는 이러한 상황은 좋게 표현하면 ‘글의 민주주의’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개방성과 평준화는 오히려 방향을 잃어버리게 하여 자기 자신을 거스르지 않는 것으로 끊임없이 회귀하게 할 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쓰고 싶은 것만 쓰고, 읽고 싶은 것만 읽으며, 읽히는 것만 쓰게 된다.

 

 

 

떠먹여주는 글의 홍수 속에서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헝가리 출신 사회학자 프랭크 푸레디는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청어람미디어, 2005)에서 오늘날 대중문화가 누구나 언제든지 소비할 수 있도록 핵심 내용을 숟가락으로 떠먹여준다고 비판한다. 과거 대중주의는 사회적 의제와 결합하여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는 역할이라도 했지만, 오늘날 대중문화는 오로지 참여와 상호작용 그 자체만이 유일한 목적이자 미덕이 되었다는 것이다.

 

프랭크 푸레디는 이처럼 대중에게 숟가락으로 떠먹여주는 문화는 ‘아부하는 문화’에 지나지 않으며, 문화가 유치해졌다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적 가치와 보편적 가치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는 문화는 유치한 문화에 불과하다. 이는 오랜 학습과 훈련을 거쳐 축적되는 보편적인 지식과 개개인의 파편적 경험에서 얻어지는 개별적인 지식을 동급으로 취급하게 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글의 민주주의’ 시대에 우리가 처한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게 되고 보다 많은 이에게 읽히는 것이 책의 목적이 되면서, 책은 대다수에게 쉽게 호소할 수 있는 개별적이고 평이한 지식의 무수한 판본에 불과하게 되었다.

 

프랭크 푸레디는 영국 문화비평가 조시 애플턴을 인용하여 즉각 떠먹여지기를 거부하는 지식의 저항성을 옹호한다. 난해한 회화를 감상자가 보자마자 단번에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기존 세계와 궤를 달리하는 나름의 독자적인 논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진입장벽으로 둘러싸인 회화나 책이 당신을 거부하는 것은 그것이 당신의 주관적 의식의 반영물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갖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 진입장벽을 넘기 위한 노력을 통해 비로소 당신은 자신의 주관적 반영에 불과한 세계를 넘어 객관적 지식을 습득하고 발전할 수 있다.

 

더 많은 이들이 쓰고 읽게 된 ‘글의 민주주의’ 시대에 오히려 지식을 전달하는 책의 본래적 기능은 퇴행하고 있다. 읽으나 마나 한 책을 수십 권 읽으며 현재의 자기 자신에 자족하는 것을 반복하기보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책 한 권을 갖고 오랜 시간 씨름하는 것이야말로 책이 제공하는 본연의 체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책 시장은 대중문화의 가벼움과 대량생산의 풍요를 따라가며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는 지극히 대중추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책은 좀 더 무겁고 접근하기 어려운 것, 따라서 이에 접근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자기 자신을 벗어나고 넘어서는 밑거름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머물러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없이 가벼워서 책의 외양만 갖추고 있을 뿐 더는 책이 아닌 책만 넘쳐나는 ‘멋진 신세계’를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이은지(문학평론가)

2014년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했다.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동료 평론가들과 비평의 화두를 고민하고 기획하는 〈요즘비평포럼〉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르몽드 웹진 코너 〈르몽드 문화톡톡〉의 필진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문화 및 사회현상에 대한 대중적인 비평에 관심을 갖고 있다.

 

커버스토리 다른 기사보기 View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