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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6  2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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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작가 전성시대]
한국 문학의 새로운 바람, 여성의 힘

 

 

 

허희(문학평론가)

 

2020. 11.


 

 

바야흐로 여성 작가 전성시대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누가 사는가? 올해 한국 소설을 구매한 사람은 70%가 여성이다. 20대·30대·40대 여성들이 고루 여성 작가의 작품을 손에 들었다(〈한국소설 판매 역대 최다… 신진작가·청소년·SF 인기〉, 뉴시스, 2020년 9월 22일). 표면적으로 보면 여성 작가가 쓴 글을 여성 독자가 (수동적으로) 읽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더 깊게 들여다보면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여성 독자가 여성 작가의 글을 (적극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명 없이 오늘날 한국 문학장을 살피는 일은 불가능하다. 여성 작가 전성시대의 도래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작품 자체에 국한된 내재비평보다는, 작가 및 독자와 미디어 환경을 염두에 둔 출판비평의 시각에서 대략적인 스케치를 해보려 한다.

 

베스트셀러를 검토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공통점이 명확해 보인다고 해서 이를 하나의 원리로 환원시키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올해 교보문고 기준 한국 소설 베스트셀러 목록에 9명의 여성 작가가 이름을 올린 것은 맞다. 하지만 여기에 포함된 여성 작가 모두가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여성의 독립적인 목소리를 담은 이야기를 써서 여성 독자의 지지를 얻어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분석하면 오류가 생긴다. 거기에 부합하는 소설은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2019),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2019),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2020) 정도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2014)는 1980년 5월의 광주를 경험한 열다섯 살 소년 동호를, 손원평의 『아몬드』(2017)는 감정 처리에 곤란을 느끼는 열여섯 살 소년 윤재를, 이희영의 『페인트』(2019)는 국가가 설립한 센터에서 자란 열일곱 살 소년 제누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황영미의 『체리새우 : 비밀글입니다』(2019)는 열다섯 살 소녀 다현이 중심인물이지만 학교 내부의 집단 따돌림 문제와 어긋난 관계 회복을 모색하는 소설이고, 이도우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2004)과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2018)는 젠더 갈등을 초점화한 작품이 아니라 남녀의 섬세한 로맨스를 전면화하는 소설이다. 그러므로 여성 작가가 쓴 소설을 곧바로 여성 서사로 치환하는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베스트셀러는 ‘작품성’만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출판계 또한 시장인 한에서, 이곳에서도 다양한 동역학이 작용한다. 예컨대 『아몬드』의 차트 역주행이 그렇다.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받으면서 2017년 이미 화제가 됐던 이 소설이 2020년에 재조명받은 까닭은 두 가지 요인 덕분이다. 하나는 올해 이 작품이 아시아권 작품으로는 최초로 ‘일본 서점 대상 번역 소설상’을 받았다는 점, 다른 하나는 글로벌 팬덤을 구축한 아이돌 그룹 BTS가 리얼리티 방송에서 이 책을 소개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작품 외부 요소의 고려 없이 여성 작가의 약진을 논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여성 작가가 집필한 소설을 여성 문학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는 데 그칠 게 아니라(그것은 헤밍웨이와 카프카를 남성 작가로 뭉뚱그리는 잘못과 다르지 않다), 장르와 주제 등에 따라 세부적으로 분류해야 한다. 원작의 드라마화나 영화화로 인한 상대적 수혜, 그리고 유명인들의 추천에 의한 판매량 증가의 특수한 우연을 범례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물론 왜 특정한 소설이 지금 영상화되었는지, 어째서 유명인이 수많은 작품 중 이것을 골랐는지 하는 이유를 따져보는 작업은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여성 작가 전성시대를 거론하는 자리에서 더 부각되어야 하는 것은 작년과 올해 출간돼 인기를 끈 ‘여성 작가의 여성 서사’, 즉 페미니즘의 자장에 놓이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일의 기쁨과 슬픔』, 『시선으로부터』이다.

 

이상 언급한 세 소설은 페미니즘에 공명하는 여성 독자의 호응을 얻고 있는 작품이다. 실제로 김초엽·장류진·정세랑 작가는 SNS를 통해 20~30대 페미니즘 작가로서 사회적 발언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그에 동감하는 수많은 여성 팔로워를 확보하고 있다. 이들이 쓰는 작품은 소설로서의 성취도 우수하고, 작가 본인의 평소 언행과 일치하는 메시지가 담긴다. 여기서 특히 강조할 부분은 후자다. 작가 본인의 평소 언행과 일치하는 소설의 메시지, 다시 말해 문인으로서의 삶과 문학이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양상이 팬덤을 형성해 세 작가를 부상시킨 것이다. 이와 더불어 세 작가의 소설이 남성(성)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제도를 비판하는 여성 서사에 중점을 두되, 개별 남성을 배제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자의 확장성을 갖는다는 점도 덧붙여둔다.

 

 

 

2020년 한국 소설 주요 문학상 : 100% 여성 작가 수상

 

한 해 동안 발표된 한국 소설을 후보로 심사하는 주요 문학상 수상 비율 역시 한국 소설 베스트셀러 통계와 궤를 같이한다. 우선 문예지에 실리는 단편 소설과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작품부터 남성 작가의 비중이 감소했다. 노태훈 문학평론가가 지난해 주요 문예지에 발표된 단편소설과 주요 출판사의 단행본 소설을 분석한 결과 남성 작가 작품은 단편 316편 중 92편(29%), 단행본 92권 중 31권(34%)에 불과했다(〈그 많던 남성 소설가는 다 어디로 갔을까〉, 동아일보, 2020년 10월 15일). 풀어서 설명하면 원고 청탁과 출판 계약이 여성 작가에게 쏠렸다는 말이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같은 기사에서 기자는 “남성 작가의 ‘실종’은 소설 독자의 70∼80%를 차지하는 20∼40대 여성의 소수자로서 겪는 차별, 변화하는 사회적 지위 등을 남성 작가들이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 결과”로 지적한다.

 


동아일보


〈동아일보〉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정확하지 않은 코멘트다. 남성 작가들의 역량 부족을 꼬집으면 해결책도 매우 단순해진다. ‘20∼40대 여성이 소수자로서 겪는 차별, 변화하는 사회적 지위 등’에 관한 소설을 남성 작가가 ‘잘 쓰면 된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젠더 감수성의 성숙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는 당연히 노력해 갖춰야 할 덕목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작가로서는? 쓰고 싶은 것을 쓰면 된다. 문학은 내적 윤리성을 심문하는 예술이지, 외적 도덕성을 설파하는 경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한니발 렉터와 같은 악(인)의 심연을 탐구하는 스릴러 소설 『양들의 침묵』을 쓴 토머스 해리스에게 왜 여성을 연쇄 살인 피해자로 도구화하느냐고, 그러하기에 이는 명백히 여성혐오적인 작품이라고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여성의 발을 탐닉하는 남성 인물이 등장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을 페티시즘으로 가득한 변태 소설이라고 치부하고 덮어버리면 그만일까.

 

법은 금지와 처벌을, 종교는 섭리와 당위를 역설한다. 문학은 법적일 수 있고 종교적일 수 있지만, 법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다. (입장에 따라 이견이 있겠으나) 문학의 근간은 자유와 해방이다. 이것을 나쁜 소설은 항목으로 규범화해 가르치려 들고, 좋은 소설은 맥락으로 제시해 질문한다. 세상에는 얼마나 다종다양한 인간(성)이 있는지요. 각자 처한 상황 속에서 결단하는 인물의 사고와 행동에 대해 독자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성 작가나 남성 작가 상관없이 일급 작가는 자기의 작품으로 이렇게 묻는다. 작가는 누가 뭐라고 하든 바로 그 일을 계속해 나가면 된다. 그러니까 현재 한국 문학장에서 여성 작가의 대두와 남성 작가 실종(?)의 연유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그중 하나는 주요 문학상 심사위원을 겸하는 유력 문예지 편집위원 등 문단문학의 운영자가 소설 독자의 70∼80%를 차지하는 20∼40대 여성의 소수자로서 겪는 차별, 변화하는 사회적 지위 등에 지대한 관심과 응원을 보내는 태도와 연관이 있다.

 

2010년대 중반 전 세계적인 미투 운동의 열풍과 그로 인해 드러난 문단 성폭력 사태를 지나오면서, 한국 문학장도 쇄신과 변혁을 요구받았다. 문단 내부에서 가시적으로 시행했던 방침은 문예지 편집위원과 문학상 심사위원의 성비를 동등하게 맞추거나, 아니면 여성의 비율을 더 늘리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한겨레문학상의 경우 작년과 올해 심사위원 전원을 여성 문인으로 위촉했다. 다른 무엇보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낸 여성 서사를 긍정하고 후원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주최의 조치다. 그렇게 ‘고학력 비정규직 여성의 일하는 이야기’인 서수진의 『코리안 티처』가 2020년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남성 편향으로 기울어진 기존 문학장의 균형을 바로잡으려면 이 정도의 강력한 무게추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문학장 내외부에서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다.

 

한국 문학장의 페미니즘적 정치성은 2010년대부터 이어진 젠더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시대정신과 조응한다. 그런 한에서 그동안 비가시화되었던 여성의 구체적 현실을 그려낼 수 있도록 문예지에서 여성 작가에게 단편 소설을 청탁하고, 문학상을 여성 서사에 수여하는 실천은 문학장에 속한 다수에 의해 용인된다. 되풀이하지만 문학장은 유기체로서 끊임없이 변한다. 문학장을 이루는 여러 주체의 역학 관계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과거에는 문학 권력을 작가가 보유했다면 현재에는 독자가 행사한다. 그러는 데는 미디어 패러다임의 전환, 곧 SNS의 영향이 컸다. 오늘날 출판사는 신문·라디오·TV 같은 구미디어가 아니라 트위터·페이스북·인스타그램·유튜브 같은 뉴미디어에 도서 홍보 역량을 집중한다. 그곳이 책을 읽는 독자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요즘 독자는 책을 감상만 하지 않는다. 책과 저자에 관해 SNS에서 활발히 논평한다. ‘좋아요’와 ‘공유(리트윗)’가 많이 된 의견은 작가와 출판사도 참고하고 반영할 수밖에 없다. 한국 소설 독자의 70%가 여성임을 주지한다면 소비자로서 그들의 견해가 상품을 만드는 생산자에게 환류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단 성폭력 사태로 인해 여성 독자는 삶이 문학을 배반하는 남성 문인에게 환멸감을 느꼈다. 문단 성폭력의 주범으로 밝혀진 남성 문인이 쓴 책을 버리면서 이들의 작품을 다시는 읽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위에 서술한 대로 삶과 문학이 들어맞는 여성 문인과 그 작품에 눈길을 보냈다. 상술한 바 (SNS를 통해 20~30대 페미니즘 작가로서 사회적 발언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그에 동감하는 수많은 여성 팔로워를 확보하고 있는) 김초엽·장류진·정세랑 작가의 팬덤이 대표적이다.

 

여성 작가 전성시대를 작가 및 독자와 미디어 환경을 염두에 둔 출판비평의 시각에서 대략적으로 한 스케치를 마치면서 첨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글에서는 논의 전개상 어쩔 수 없었으나, 미래의 한국 문학장에서는 ‘여류’라는 호칭을 거부했던 박경리 작가의 사례처럼 ‘여성 작가가 쓰는 여성 서사’를 우리 문학의 예외적이고 특별한 케이스인 양 다루지 않았으면 한다. 재론하되 그것은 헤밍웨이와 카프카의 소설을 세밀하게 구별하지 않고 ‘남성 작가가 쓰는 남성 서사’로 대강 뭉쳐 싸는 허물을 반복하는 일이다. 거명된 김초엽·장류진·정세랑·손원평·이도우·한강·황영미·이희영·서수진·최진영·정지아·김유담·강화길·백수린·최윤·강영숙·김숨·한유주는 여성 작가로 통칭될 수 있겠지만, 그 이전에 자신만의 스타일로 개성적인 소설을 쓰는 별개의 작가이다. 남성 작가 전성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성 작가 전성시대가 특이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에서 그들은 단지 작가일 테다.

허희(문학평론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2012년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했는데요. 현재는 문학 팟캐스트 〈낭만서점〉 진행자로 일하면서, 여러 방송에 출연해 책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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