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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3  20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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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학출판의 현황과 전망]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73년의 역사를 말하다

 

 

 

곽진희(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출판실장)

 

2021. 7.


 

지금도 기억 저편에 대학을 갓 졸업하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이하 출판문화원)에 첫발을 내디뎠던 때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중·고등학교 시절 백일장에 나가 운 좋게 몇 번의 수상을 하고 교지 편집을 담당했던 경험만으로, 책을 만드는 일을 하면 행복하겠다는 막연한 동경심으로 시작된 나의 출판 입문은 그야말로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근거 없는 자신감과 호기심으로 출판에 몸을 담근 지도 어느새 3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나는 가끔 후배들에게 어떤 족적을 남겨야 출판을 먼저 시작한 선배로서 소명을 다했다고 할 것인가를 되짚어보곤 했는데, 그에 대한 해답을 주신 분이 지금은 은퇴하신 언론학자 차배근 교수님이시다.

 

차 교수님께서는 만날 때마다 내게 실장이 출판문화원의 역사를 정리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다며 마치 숙제를 안겨 주시듯 말씀하셨다. 그때마다 ‘과연 내가 정리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40년 남짓 출판계에 몸담았다고 해서 출판문화원의 역사를 기록할 자격이 되는 것일까?’ 수없이 되뇌곤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당시 원장님이셨던 국문학자 정병설 교수님께서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사를 출간하자는 제안을 하시는 바람에 얼떨결에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정병설 교수님께서 출판문화원사 출간에 마중물을 붓는 역할을 하신 셈이다.

 

물론 지나간 73년이란 시간의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망실된 서류를 찾고 흩어진 기억들을 하나하나 퍼즐 맞추듯 끼워 나가면서 출간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정 원장님의 끊임없는 격려 덕분에 지금의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73년사』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망팔(望八)이 지났으니 73년이란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이 있었을지는 먼지가 뿌옇게 쌓인 빛바랜 서류 뭉치와 누런 원고 뭉치를 보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200자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어느 원로학자의 원고는 글쓴이의 학문적 고집이 읽혀질 만큼 힘이 실려 있었으며, 살짝만 건드려도 부스러질 것 같은 직원의 ‘신상조사카드’는 당시 직원들의 담당 업무와 직위를 알 수 있게 했다.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73년사

 

흥미로운 사실은 ‘직원 신상조사카드’ 란에는 기본적인 인적사항 외에도 친지 주소와 재산 상황을 알 수 있게 동산과 부동산, 보증인, 월수입 등이 적혀 있고, 주거지 위치를 알려주는 약도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그랬다가는 회사가 갑질을 한다고 비난이 쏟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사생활을 침해하는 일이라고 매스컴을 타는 곤욕을 치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출판문화원의 이사장은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총장이 맡아 왔으나, 실질적인 운영은 지배인이라는 직위를 가진 실무자(류시부, 니혼대학 법학부 졸)가 직접 맡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지배인이라는 직위는 현재 출판계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용어로 아마도 당시에는 편집이나 기획 업무보다는 영업에 관한 요구가 더 컸던 것 아닌가 싶다.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의 책은 우리 미래의 문화재’라는 슬로건 아래 국내 최초로 대학출판의 획을 그은 출판문화원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함께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3년 전인 1947년에 “서울대학교 교수의 학술연구와 대학 학사의 지원 및 출판문화의 향상 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취지하에 설립된 국립 서울대학교출판부는 『신세기(新世紀)의 원자세력(原字勢力)』(박철재1) 역, 1948년 11월)을 시작으로 대학출판의 신호탄을 올렸다. 이 책은 1937년 퓰리처상을 받은 과학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였던 데이비드 디츠(David Dietz)의 원저인 Atomic Energy in the Coming Era(1945)의 번역서이다. 이는 당시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전 세계적으로 원자핵 무기에 대한 공포심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그 위력을 과학적으로 밝힌 책이라고 할 수 있다.

 

 

1)
한국 최초의 과학행정가로,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주임교수를 역임하고 정부 수립과 함께 1948년 문교부 관리로 들어갔다. 1955년 제네바 원자력 평화이용 국제회의 한국 측 수석대표, 원자력연구소장 등을 역임하면서, 건국 이후 초창기의 과학교육 발전에 기여하였다. 고무가 모든 물질 중에서 가장 탄성(彈性)이 큰 이유를 분자구조에서 규명한 것은 그가 남긴 업적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오랜 시간 대학출판부의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다가 〈동아일보〉(1952년 5월 14일 자)에 “국립서울대학교에서는 외국 저명한 학술서적을 번역 출판하여 대학교재의 쇄신을 기하고자 금번 사계의 권위 교수를 망라한 출판위원회를 구성하였다고 한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바로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원고심의 기구인 현재 출판위원회의 시발점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신세기의 원자세력(좌), 한국농촌가족의 연구(우)


신세기의 원자세력(좌), 한국농촌가족의 연구(우)

 

서울대학교는 한국전쟁 휴전 이후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재건했다. 이즈음 슈나이더(Arthur E. Schneider)2) 박사에 의해 1956년부터 대학 내 인쇄공장 설립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다가, 마침내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 1962년 5월 출판부에 인쇄공장을 설립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활자 주조, 문선 케이스 정리 등 시설 확충이 이루어진 1962년 11월에 가서야 인쇄기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1998년 활판인쇄가 종료될 때까지 1천 종3)의 도서를 발간함으로써 우리나라 학술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2)
슈나이더 박사는 미네소타대학 임학과 교수로, 1954년부터 1961년까지 7년을 서울대학교에 머물렀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재건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미네소타대학은 한국과 일본의 대학 재건을 맡았다. 슈나이더 박사의 기록은 현재 미네소타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서울대학교 기록관에 복사본 일부가 남아 있다. 서울대학교는 1961년 슈나이더 박사의 공로를 기려 명예 법학박사학위를 수여했다.(『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73년사』, 2020, p.153 참조.)
3)
당시 김용덕(전 동양사학과 교수) 출판부장은 “1천 종 돌파는 우리보다 근대 대학의 역사가 훨씬 앞선 일본도 겨우 두 개의 대학출판부만 달성했다”고 말했다.(『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73년사』, 2020, p.110 참조.)

 

한편 서울대학교출판부가 독립법인으로 공식 출범한 것은 1961년이며, 독립법인체로 등기를 마친 후 처음 출간한 책은 『한국농촌가족의 연구』(고황경 외, 1963)이다. 출판부 설립 초기에는 논문집, 학술지, 연구서 등에서부터 고전 도서 영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출판했는데, 1972년부터는 서울대학교 부설로 있던 한국방송통신대학의 교재 출판도 함께 진행했다. 그 작업은 1년에 두 번씩(1, 2학기) 199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여러 군데로 흩어져 있던 단과대학들을 관악산 아래 종합캠퍼스로 이전해 오면서 대학출판부도 1979년 동숭동 사옥에서 관악캠퍼스로 이전했다. 이후 1980년 ‘출판실’을 ‘출판부’로 명칭을 변경하고 1983년에는 한국대학 최초로 전산조판기를 설치하여 전산화 작업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 사이에도 국제화 추세에 발맞춰 1982년에는 하와이대학출판부와, 1983년에는 워싱턴대학출판부와 공동으로 출판 및 판매를 모색하면서 외연을 확장해 나갔는데, 그 결과물이 Postwar Korean Short Stories(김종운)와 Securities Regulations in Korea(신영무)이다.

 

출판문화원은 관악캠퍼스로 이전해 오면서 학내구성원(학생, 교수 등)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그동안 인쇄 제작 납품에 주력해 오던 것에서 벗어나 학술출판을 전담하는 출판실과 인쇄소로 조직을 이원화함으로써 출판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인쇄소 업무는 점차 축소되어 갔다. 1998년 활판인쇄가 종료되면서 출판문화원은 다시 한 번 전환점을 맞게 된다. 컴퓨터 조판을 도입하고 인쇄부문을 아웃소싱하기로 결정하면서 비로소 기획과 편집, 마케팅, 디자인, 홍보 등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2009년에는 ERP 시스템을 도입하여 재고관리를 투명하게 하는 등 회계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각 부서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전산화를 이루었다.

 

2007년 지금의 자연과학대학 연구동 신사옥으로 이전하면서, 문화콘텐츠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확대해 나가기 위해 2009년에 다시 ‘출판문화원’으로 명칭을 승격 변경하였다. 2010년에는 인터넷의 급격한 성장과 변화하는 출판시장에 발맞춰 네이버·다음 카카오와 e-콘텐츠를 제휴하여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독자에게 더 많은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세계시장 진출을 위해 2007년 출판문화원 주관으로 한·중·일 대학출판부협회 국제도서전을 개최하였으며, 해외 유통 전문 에이전시와 제휴를 통해 해외시장으로의 유통을 확대해 나가면서 국제화를 꾀하였다. 동시에, 일찍부터 전자 콘텐츠로의 진입을 서둘러 2021년 현재 600여 종의 전자책을 유통하고 있다. 이러한 발 빠른 대처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온라인 강의가 활성화됨에 따라 국내외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세라드케이(CERAD-K)


세라드케이(CERAD-K)

 

 

대학출판부의 특성상 채산성이 낮은 학술서 출판을 지속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우수한 학술서는 채산성을 고려하지 않고 조건 없이 출판한다는 것을 기본 취지로 삼고 있는 출판문화원으로서는 더욱더 어려움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치매진단 평가도구인 『세라드케이(CERAD-K)』(우종인·이동영 외, 2003) 종이책과 신경심리검사 평가결과를 자동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축적할 수 있게 개발된 앱(App)이 시장에서 큰 호평을 얻으면서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가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노년층의 인지장애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됨에 따라, 2017년 정부에서는 치매국가책임제를 시행하였는데, 이때 치매검사 진료비를 국가가 지원하게 되자 세라드케이 검사자 수요가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 판매가 크게 신장하여 수익 부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목 관련 교재와 4차 산업혁명 관련 전문가로, 유튜브 ‘패권의 비밀’ 영상의 조회 수가 400만 건을 넘은 김태유 교수의 『패권의 비밀』(2017), 그리고 주경철 교수의 『대항해시대』(2008) 등 역사 분야 도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채산성이 낮은 학술서를 꾸준히 출간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이외에도 출판문화원은 한류의 확산으로 한국어 교육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2015년부터 서울대학교언어교육원과 지속적으로 한국어 교재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전문 학술서 외에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고급 교양서를 기획, 발간함으로써, 풍요롭고 깊이 있는 전문 지식의 대중화에 기여하기 위해 제2브랜드인 ‘스누북스’를 론칭하고, 환경운동가 마크 라이너스가 쓴 『과학의 씨앗』(조형택 역, 2020)을 출간하기도 했다.

 


패권의 비밀


패권의 비밀


대항해시대


대항해시대


과학의 씨앗


과학의 씨앗

 

이처럼 출판문화원은 수익 창출만을 좇는 출판사가 아닌 대학 내 학술·문화기관으로서 학술도서 출판을 주된 영역으로 삼고, 국문·외국문 학술전문도서를 포함하여 다양한 총서와 각종 기획도서, 대학교재 등 지금까지 약 3,400여 종의 도서를 발간하였으며, 현재 약 2,200여 종의 도서(600여 종 전자책 포함)를 유통하고 있다.

 

특히 한국어 교재 시리즈, ‘미적분학’ 등 대학 교수 현장에서의 효율을 향상시키는 양질의 대학교재를 발간하기도 한다. 또한 SNULT, New TEPS 수험서 등 대학 현장에서만 활용할 수 있는 교재를 넘어, 학습 의욕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언제 어디서든 활용할 수 있는 도서를 발간하는 데에도 힘쓰고 있다.

 

73년이란 긴 시간을 쉼 없이 숨차게 달려온 출판문화원은 앞으로도 학술출판의 중심에 서서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준비해 나갈 것이다. 또한 한국 대학출판의 선구자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출간하는 모든 책이 미래의 문화재가 되어 우리의 후속세대에게 읽힐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동시에, 학술계와 출판계가 필요로 하는 지식을 창출하고 최고의 지식을 전파해 나가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할 것임을 밝히며 이 글을 마친다.

곽진희

 

곽진희(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출판실장)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에 1986년 입사해 현재 출판실장으로 근무 중이다.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edit@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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