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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  20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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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북디자인, 혹은 불완전한 파편과 어떤 단상들

 

 

 

김현호(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2018 서울국제도서전 특별전 〈잡지의 시대〉 기획)

 

2018. 12.


 

얼마 전, 앞으로는 기회 닿는 대로 한국 단행본들의 북디자인을 열심히 칭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실제로 열심히 그렇게 떠들어대면서 살고 있다. 나는 지금 한국의 동료들이 만들어내는 책들이 꽤 예쁘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책들의 디자인이나 물성, 혹은 만든 이들의 노동과 기예에 대한 찬사를 본 기억은 많지 않다.

 

대신 책의 모양새에 회초리를 드는 이들은 언제나 차고 넘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왜 요즘 한국의 무선제책 단행본은 이렇게 후가공이 화려하고 물성이 과도한가.(외국의 페이퍼백을 보라, 얼마나 수수하고 단출한가) 물론 그 말들은 자주 서로 충돌한다. 왜 한국의 양장본들은 이렇게 내구력이 약하고 쉽게 뜯어지는가.(외국의 사철 양장본들은 얼마나 단단하고 오래 가는가) 한국의 책들은 왜 이리 들기 무거운가, 한국의 책들은 왜 이리 갈수록 얄팍하고 작아지는가, 한국 책들의 본문 서체는 왜 이리 갈수록 커지는가, 혹은 작아지는가.

 

물론 원한다면 그 이유를 충분히 오래 설명해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책을 소장용 양장본과 보급형 문고본으로 동시 출간할 수 없는 한국의 출판시장 규모에서, 무선제책 단행본과 아지노 양장본이 감당해야 하는 고충에 대해 함께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꾸중의 말들이 대답이나 설명을 기대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간혹 드물게 잡지나 신문에서 북디자인 특집을 준비하기도 한다. 언제나 명망 있는 디자이너나 안목이 훌륭하다는 출판사 대표가 지면에 초대된다. 그들은 책이 얼마나 심원하고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차분하게 서술하고, 그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좋은 북디자인이란 어떤 것인지 자신의 생각을 펼쳐놓는다. 그리고 근래 출간된 것들 중에서 그 기준에 잘 들어맞는 몇 권의 책을 골라낸다. 어째 그들이 선택한 몇 권의 책들은 꽤 자주 겹쳐서, ‘받을 만한 사람이 계속 받게 되는’ 방송국의 연말 시상식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그런 방식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을 품고 있다. 어떤 지점에 도달한 책과 도달하지 못한 책을 구분하고 성취를 이룬 디자이너의 이름을 쭉 이어나가면, 우리는 책들이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우리 곁에 와 있는지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걸까? 예를 들어 정병규 선생을 비롯한 이전 세대 디자이너들을 거쳐 지금 왕성하게 활동하는 여러 작업자에게 가닿는 가느다란 선들의 궤적은 물론 아름답다. 그러나 서로를 참조하고 복제하며 제멋대로 무성하게 자라나는 수많은 책들의 디자인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정보이거나, 심지어 일종의 시각적 영웅사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지금 우리가 만나는 북디자인이 필연적이거나 최상의 것이 아니라고 믿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 종류의 믿음은 전통적으로 변화의 중요한 동력이 되어왔다. 하지만 지금 서점의 매대를 이루는 북디자인의 풍경은 분명 일종의 현상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책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정보이며, 책을 만들고 소비하는 여러 주체의 욕망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모습이다. 나는 특정한 북디자인을 선택하거나 지지하는 것보다는, 지금의 북디자인으로부터 책에 대해 무엇을 더 배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있다.

 

이 글은 요즘 서점에서 인상적으로 본 북디자인의 몇몇 단면에 대해 다룬다. 아니, 차라리 어떤 성기고 불완전한 파편이나 단상이라 하자. 디자인 노동을 하지 않고 옆에서 바라보는 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평범한 여성의 얼굴을 표지에 넣은 책들

 

서점에 자주 간다. 직업상의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서가 사이를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도서관보다 서점을 훨씬 좋아했다. 분류 코드가 부착되고 커버가 벗겨져서 얌전히 놓인 도서관의 책들보다는 평대에서 띠지를 두르고 손짓을 하는 서점의 책들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서점의 신간 평대는 독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책들의 격전지다. 불과 얼마 전의 책들과 요즘 신간의 모습을 비교한다면 그 변화의 폭과 양상은 놀라울 지경이다. 어떤 책이 독특한 미적 성취와 상업적 성공을 함께 이룬다면, 그 스타일은 순식간에 복제되고 상호 참조되어 해당 분야의 평대를 빠르게 채운다. 그 과정에서 한때 인기를 끌던 북디자인 스타일이 폐기되기도 하고,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스타일이 등장하기도 한다.

 

근래 들어 서점의 평대의 모습을 가장 크게 바꾼 것은 젊은 여성을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을 표지에 넣은 책들이 아닐까? 다소 굵은 획으로 간결하게 그린 이 일러스트레이션들은 주로 단정하거나 유머러스한 서체, 밝고 차분한 컬러와 함께 사용되어 일종의 스타일을 형성하고 있다. 표지에 놓인 여성들은 과거와는 달리 보는 이를 유혹하거나 성적 매력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들은 수수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그저 독자를 바라본다.

 


평범한 여성의 얼굴을 표지에 넣은 책들

 

이것이 그리 대단한 변화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나이든 남성의 얼굴 사진으로 가득한 서점의 평대를 떠올려보자.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과거에 실재했던 풍경이다. 그 기이한 모습은 책이라는 형태의 지식과 서사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구조가 대단히 불균형적이라는 것을 누설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탁월한 석학이나 문인이 된 여성들도 적지 않지만, 어째 그들의 나이든 얼굴은 표지에 잘 등장하지 않는다. 책이 상품치고는 조금쯤 특별하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중장년 남성들과 젊고 예쁜 여성들의 얼굴 사진으로 가득한 책 표지들을 조금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최근의 일러스트레이션 표지들을 보고 있으면 복잡한 생각이 든다. 이것은 분명 ‘남성은 쓰고 여성은 읽는’ 기존의 구도에 대한 어떤 반작용으로 보인다. 이미 독자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 여성들은 자신이 현실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 인물과 서사를 요구하며, 출판은 그것에 대답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을 예견하는 징후 중 하나는 2012년부터 이봄 출판사가 소개한 일본의 여성 만화가인 마스다 미리(益田ミリ)의 ‘여자 만화 시리즈’의 연이은 성공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고민과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내용만큼이나 평범한 외모의 여성 주인공들이 차분하게 그려진 표지는 보는 이들의 눈을 묘하게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아무래도 싫은 사람



수짱의 연애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지금 한국에 출간되고 있는 여성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쓴 어떤 책들은 분명 탁월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몇 년 전 마스다 미리의 표지에 비해 충분히 다양성을 지닌다고 하기 어려운 책들도 있다. 얼마 전, 같은 일러스트레이션을 사용한 두 권의 다른 책이 출간되는 ‘교통사고’가 있었다.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그림체의 표지가 많이 보인다. 아마 직접 일러스트레이션을 발주하지 않고 스톡 이미지 사이트에서 구입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출판사들의 단행본 생산 시스템이 대개 일러스트레이터 한 명을 추가로 고용하는 비용과 시간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취약하다는 구조적 문제를 보여준다. 여러 일러스트레이터의 실험을 통해 스타일이 충분히 확장되지 못한다면, 이 표지들은 금세 지나간 유행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굳이 덧붙이자면, 좀 더 다양한 여성의 사진을 책 표지에서 보기 어려운 것은 여전히 아쉽다. 일러스트레이션이 그려내는 보편적인 여성보다는 사진으로 드러난 개별 여성 작가의 모습이 더욱 필요한 시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이행성에서 출간한 록산 게이(Roxane Gay)의 『헝거: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은 정교하고 강인한 사유와 문장만큼이나 중년의 흑인 여성인 저자의 장난스러운 얼굴 사진을 쓴 띠지가 매력적이었다. 밝게 웃는 나이 든 한국 여성 작가들의 사진도 표지에 더 자주 등장하면 좋겠다.

 


헝거

 

 

 

2. 작은 책을 연구하는 디자이너들

 

고작 칠팔 년 전의 일이다. 다니던 출판사에서 작은 책들을 만들었다가 항의 전화를 꽤 받은 적이 있다. 요약하자면 충분한 지적 포만감이 느껴지지 않는데, 가격은 가격대로 그리 싸지도 않다는 불만이었다.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항의 전화까지 걸던 그때의 독자들은 작은 책들로 가득한 요즈음의 신간 평대를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책들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가장 보편적인 판형이던 신국판(153×225mm) 크기의 신간은 대폭 줄었고, 국판(148×210mm)나 사륙판(127×188mm), 심지어 문고판(105×148mm)의 책들이 서점을 채운다. 이 현상에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계보나 의미를 이 글에서 추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책을 잘 디자인하고 만들어내는 것이 최근 북디자이너들에게 집중적으로 주어진 도전이라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실제로 작은 책을 잘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작은 책의 표지는 큰 책들의 옆에 놓였을 때도 밀리지 않도록 강렬한 인상을 지녀야 한다. 또한 이들은 유독 총서로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한 권 한 권의 개성과 총서로서의 조화를 고려해야 한다. 또한 신국판에 익숙한 디자이너와 편집자들에게 문고판의 본문을 적절하게 조판하는 것은 아직 낯선 일이다. 이미 어느 정도의 모범적인 해답이 마련된 신국판과는 달리, 문고판의 글줄 길이나 마진, 행간, 서체의 크기 등은 독자의 읽기 습관을 상상하며 새롭게 연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는 한국 출판에서 작은 책들의 역사가 한동안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판면 디자인을 재구성하며 변화해온 신국판과는 달리, 문고판의 디자인 연구는 저렴한 읽을거리에 대한 독서 대중의 수요가 사그라든 이후 수십 년간 거의 중단되다시피 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일본의 이와나미나 프랑스의 크세주, 영미권의 펭귄 등과는 달리 한국의 출판계가 문고판의 장점을 살릴 설득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유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열린책들 등 몇몇 출판사가 분투했지만 역부족으로 보였다.

 

지금의 작은 책들은 예전의 작은 책들과 성격이 사뭇 다르다. 소장 욕구보다 읽기 욕구가 우선이던 과거의 박리다매식 문고판은 오늘날의 디자이너들에게 아마도 그리 참고가 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주로 무겁지 않은 내용을 담는 요즈음의 작은 무선제본 책들은 밀도 있는 내용을 빼곡하게 채워 넣던 열린책들 세계문학 문고판과도 다르며, 대중소설 매대에서 명맥을 이어 가던 사륙판 양장본들과도 이질적이다. 즉 디자이너들이 참고할 만한 자료가 충분치 않은 상황이다.

 

그러므로 작은 책을 만드는 디자이너들의 도전을 목격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분명 지금 새로운 스타일이 탄생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본 결과물은 땅콩문고를 비롯한 유유출판사의 책들과 민음사의 쏜살문고였다. 쏜살문고의 책들을 상당수, 그리고 유유출판사의 책들을 전부 작업한 이기준은 소매에서 끊임없이 다른 카드를 꺼내 놓는 마술사 타입의 디자이너다. 그가 작업한 초기 쏜살문고의 표지들을 보았을 때, 계속 다른 책들을 집으며 작업자의 이름을 확인하던 기억이 난다. 한 사람이 전부 디자인했다고 하기에는 놀랄 만큼 다채로웠고, 한편으로는 특유의 화사한 톤과 유머가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다. 반면 땅콩문고를 비롯한 유유출판사의 책들에서 그는 한 출판사의 시각적 아이덴티티가 지니는 범위를 효과적으로 설정하고, 그 안에서 다양한 변주를 시도한다.

 

무엇보다 땅콩문고와 쏜살문고의 큰 장점은 작은 책을 제작하는 하나의 간결하고 경제적인 사양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시중에 나와 있는 작은 책들은 오히려 큰 책보다 더 잘 펼쳐지지 않거나 뻑뻑한 경우가 많다. 대부분 본문 용지로 신국판에서 사용하던 95~100g/㎥ 정도의 모조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편집자와 디자이너들의 고민이 있다. 그들 역시 작은 책을 만들 때는 더 얇거나 부드러운 종이를 써야 넘기기 편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얇은 종이를 쓰면 그렇잖아도 작은 책이 더 왜소해 보일까 봐 걱정이고, 중질지를 개량한 두껍고 부드러운 종이들은 왠지 탁하고 조잡한 인상을 준다. 위에서 언급한 작은 책들의 표지가 지녀야 하는 ‘강렬한 인상’과 이 표지들은 어째 잘 맞물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민하다 결국 두껍고 매끈한 모조지를 선택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땅콩문고와 쏜살문고의 표지에 이기준이 사용한 화사하고 부드러운 컬러는 중질지 계열의 본문이 지닌 탁하고 어두운 인상을 잘 보완해준다. 이는 선택할 수 있는 용지의 폭이 적다면 거기에 맞는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당연한 전제를 상기시킨다. 다른 디자이너들은 어떤 타개책을 고민하고 있을까? 서점의 평대를 지날 때마다 작은 책들에 대한 그들의 도전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중이다.

 


피터 카멘친드



산책



저, 죄송한데요



반도덕주의자



법앞에서 프란츠 카프카



책 먹는 법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 한 사람만을 위한 서점



고양이의 서재



프라하로 여행하는 모차르트


 

 

 

3. 가난한 생태계의 잡지들

 

우리가 ‘책’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디자인과 물성이 모두 동일한 방향과 진폭으로 변화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예를 들어 인문서들의 본문 서체는 점점 커지는 반면, 여행서들의 본문 서체는 반대로 작아지는 추세다. 에세이 매대의 책들은 빠르게 몸피가 줄어들지만, 컴퓨터 매대의 책들은 여전히 크고 묵직하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하나의 장르를 세심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도 서로 충돌하는 다양한 스타일과 맥락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거친 일반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최근 몇 년간 서점에서 가장 달라진 풍경은 아무래도 잡지 매대의 그것인 듯하다. 이는 잡지라는 상품의 존재 방식 자체가 최근 몇 년간 급격히 변화했다는 데 기인한다. 전통적으로 잡지는 광고를 실어 나르는 기계로 고안되어왔다. 눈을 사로잡는 커다란 판면에 사진과 텍스트, 일러스트레이션, 나아가 광고와 기사를 시각적으로 잘 배치하려면 아트 디렉터라는 독특한 직군이 필요했다. 그들은 매체와 기사의 방향을 설정하는 편집장과 사진가,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 등을 조율하며 잡지의 시각적 성격을 규정해왔다.

 

그러나 인쇄 광고 시장이 웹과 모바일 등의 뉴미디어 플랫폼에 형편없이 패퇴하면서 잡지의 생태계는 이전과 전혀 다르게 바뀌는 중이다. 한때 놀라운 발간 부수를 자랑하던 잡지들이 맥없이 폐간되거나 페이지를 줄인다. 발언권이 강해진 광고는 거침없이 기사의 영역을 침해하고, 그것을 견디지 못한 에디터들은 잡지를 떠난다. 아트 디렉터의 업무는 축소되거나 디자인 팀장, 심지어 편집장에게 넘겨진다.

 

이런 척박한 상황에서 새로운 잡지들이 연이어 생겨나는 것은 다소 기이한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광고 시스템의 붕괴는 역설적으로 강렬한 욕망을 지닌 한두 명의 에디터가 자신의 잡지를 창간하는 일을 가능하게 했다. 즉 광고 영업과 수주를 위한 인력을 채용하지 않고 적은 부수만 찍는다면, 그리고 광고가 아닌 콘텐츠를 적절한 가격에 판매할 수 있다면 최소한 잡지를 창간하는 시도는 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일반적으로 잡지는 단행본보다 목소리가 크고 에너지가 넘치는 매체다. 지금 평대에 놓인 새로운 잡지들은 한껏 목소리를 높여 독자와 동료들을 불러 모으는 중이다. 성공한다면 살아남을 것이고, 실패한다면 쓸쓸한 죽음을 맞을 것이다.

 

이 잡지들 역시 물리적인 크기가 작다. 잡지의 판형 변화는 단행본의 그것보다 어쩌면 훨씬 더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잡지에 있어서 판형은 그것이 싣는 콘텐츠의 성격 및 작업자들과의 협업 방식을 상당 부분 결정하기 때문이다. 즉 단행본을 만드는 작업이 필자의 원고에 잘 맞는 판형과 물성을 선택하는 것이라면, 잡지를 만드는 일은 고정된 판면에 어울리는 콘텐츠를 만들고 찾아서 배치하는 것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판형이 커지면 거기에 담길 콘텐츠는 더 다채롭고 역동적이어야 하고, 작아지면 좀 더 차분하게 읽힌다.

 

라이센스 패션지들이 주로 사용하는 국배판(210×297mm) 이상의 큰 판형에서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야말로 ‘무슨 일이든 벌어져야’ 한다. 사진이건 일러스트레이션이건 레이아웃이건 간에 변화무쌍하게 독자의 눈을 잡아끌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더 많은 자본과 시간, 다양한 작업자들이 필요하다. 지금 평대에 놓인 패션지들의 부피가 줄어드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잡지의 전성기였던 20세기에 확립된 스타일, 즉 훨씬 많은 내용을 판면에 집어넣을 수 있도록 빽빽하게 세팅된 레이아웃과 타입 세팅을 지켜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 등장한 잡지들이 작은 판형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히 인쇄 제작비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 혹은 우리는 그런 레이아웃을 감당할 만한 시간과 인적 역량이 충분하지 않다. 훨씬 적은 수의 작업자로 잡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잡지들은 적은 원고가 더 잘 읽히도록 여유 있게 조판한다. 페이지마다 새로운 시각적 요소를 만들기보다는 전체적인 디자인 원칙을 변주하며 잡지 전체를 만들어간다. 콘텐츠에서도 업계의 동향을 빠르게 전달하기보다 과월호를 좀 더 오래 판매할 수 있는 특집 위주로 구성한다.

 

즉 지금의 잡지는 척박한 생태계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진화한 모습을 하고 있다. 물론 진화는 종종 특정 영역의 퇴화를 수반한다. 가끔은 아름다운 인쇄물이 잔뜩 붙어 있는 거대한 스튜디오에서 사진가와 에디터들에게 쉴 새 없이 지시를 내리는 수십 년 전의 알렉세이 브로도비치(Alexey Brodovitch)를 상상할 때도 있다. 그 위풍당당한 풍경은 이제 그저 흑백사진 속이나 먼 나라의 어떤 곳에만 존재한다. 위대한 아트 디렉터의 시대는 이미 지났고, 아마도 잡지에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척박한 생태계가 주는 재미도 있다. 예를 들어 잡지의 표지와 본문 디자인이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수만 부를 찍던 잡지들이 필연적으로 어떤 보편적인 독자를 견인한다면, 지금의 잡지들은 생존을 위해 독자의 세분화된 취향을 훨씬 더 고민해야 한다. 영화를, 사진을, 장르 소설을, 스트리트 패션을,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을 좋아하는 이들은 ‘자신의’ 잡지가 어떤 모습이기를 바랄까? 그 물음에 반복해서 답하는 디자이너와 에디터의 노력이 오늘의 잡지 매대의 모습을 유례없이 풍성하게 만드는 중이다.

 

미스테리아



alone



PRISMOF


 

 

 

4. 나가며

 

이 글을 쓰기 위해 서점의 서가를 둘러보며 오랫동안 걸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호기심과 불안감이 뒤섞인 기묘한 감정이 엄습했다. 서점은 매년 수만 종씩 쏟아져 나오는 신간들과,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며 생존한 책들이 함께 놓인 뜨거운 시공간이다. 어제 막 출간된 것들과 작년에 나온 것들, 수십 년 전에 나온 것들, 외국에서 직수입된 것들이 뒤엉켜 ‘오늘의 북디자인’이라는 독특한 풍경을 구성한다.

 

고작 세 개의 파편들을 모아놓고 보니 다하지 못한 질문들이 마음에 버석거린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제호로 태명조나 견출명조를 작게 쓰는 표지들은 어떤 계기로 등장했던 걸까? 직접 손으로 글자를 그리는 레터링 작업들은 언제부터 이런 세련되고 명징한 아름다움을 획득했는가? 서점을 뒤덮던 손글씨 제호들은 어떻게 사라졌고, 무엇을 남겼는가? 초특태고딕은 책의 표지를 뚫고 본문에까지 스며들 수 있게 될까? 편집자들은 북디자인이라는 신호를 어떤 방식으로 발신하는가? 오래전의 정병규 선생처럼 편집자와 디자이너를 겸하는 뉴타입 작업자들은 지금 어떤 방식으로 등장하고 있는가? 나로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그저 천천히 서가 사이를 걷는 이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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