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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9  20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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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독서러들의 세계]
책벌레, 우리는 그들을 “프로 독서러”라고 부른다

 

 

 

박사(북칼럼니스트)

 

2023. 11.


 

사람에게 “벌레”라는 호칭을 붙이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무뇌충, 설명충, 진지충, 급식충, 틀딱충, 한남충, 맘충…. 온갖 혐오표현들이 ‘충(蟲)’ 자를 붙이고 돌아다니고 있다. 사람들의 말 속에 어찌나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는지, 각종 ‘충’ 자를 이 잡듯 쏙쏙 잡아내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러다 멈칫할 때가 있다. 벌레 비유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호칭이 있기 때문이다. “책벌레”라는 이 오래되고 자연스러운 이 호칭은 혐오표현일까? 책장과 종이 사이를 돌아다니는 책벌레의 삶이야말로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아닐까? 벌레라는 호칭이 그들에게는 욕이 아니라 목표이고 명예인 게 아닐까?

 

그래도 사람을 벌레에 비유하는 게 좋을 리 없으니, 그들을 “프로 독서러”라고 불러본다. 그런데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두 프로 독서러라고 하기는 어렵다. 책을 좋아하는 방식과 층위는 무척 다양하니까, 독서가 취미인 사람과 독서가 삶인 사람을 같은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프로 독서러, 책벌레의 다른 이름

 

‘프로’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하거나 그런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좀 더 자연스러운 해석으로는 “그 일로 돈을 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프로’라는 말과 ‘독서러’라는 말은 좁은 의미로 해석하면 붙여 쓰기 어려운 단어다. 책을 읽는 데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책을 읽는 것만으로 돈을 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그렇다. 하지만 조금 넓게 생각해보면 꽤 적절하다. 삶의 모든 면면에서 책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라면 프로 독서러라고 부를 만할 것이다.

 

독서와 삶은 아주 밀접한 사이는 아니다. 책 한 줄 안 읽어도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더구나 독서는 건강에 좋지 않다. 오랜 시간 몰두해서 책을 읽다보면 거북목과 척추 전만증, 고관절 이상, 녹내장, 비문증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기 쉽다. 책 읽는 데는 손과 눈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다. 아무리 독서가 인생에서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지 떠들어보아도,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몸은 독서에 걸맞지 않다.

 

프로 독서러는 이런 말을 들으면 책을 멀리하기는커녕 자신이 걸릴지도 모르는 병과 독서의 올바른 자세에 관한 책을 찾아보는 사람들이다. 책 속에 길도 답도 있다는 것은 그들의 오랜 믿음이다. 계속 책을 읽을 수 있는 몸 상태를 어떻게 하면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도 당연히 책 속에 있을 것이다. 그들이 건강을 위해서 실천하는 많은 조치들은 “어떻게 하면 오래 책을 읽을 수 있을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눈 건강을 위해 루테인을 먹고, 관절 건강을 위해 걷기 운동을 하면서 오디오북을 듣는다. 그들에게 ‘장수’란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는가의 단위이고, ‘근력’이란 벽돌 책을 들고 오래 읽을 수 있는 힘을 뜻한다.

 

다행인 것은 프로 독서러들이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지든 그 분야에 관한 책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는 온갖 다양한 분야에 관한 지식과 의견을 담은 책을 펴냈고, 보완하고 반박하는 책을 이어서 또 펴냈다. 지층처럼 쌓여 있는 책의 산은 책벌레들의 삶을 버티게 해주는 척추와 같다.

 

책으로 가득 찬 라이프스타일

 

책은 프로 독서러의 삶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의식주만 해도 그렇다. ‘의’와 ‘식’에 대한 다양한 책과 그 책을 읽는 독자들에 대해서는 일단 접어두도록 하자. ‘주’에 있어서 책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못해 가히 폭력적이라 할 만하다. 오카자키 다케시(岡崎武志)의 『장서의 괴로움』(2013)에는 지나친 책 수집 때문에 집이 무너질 뻔하거나 바닥이 꺼진 장서가들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책을 너무 많이 쌓아둔 탓에 2층 건물 전체가 기울어진 시인이자 잡지 편집자 시미즈 데쓰오(淸水徹男), 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방바닥이 꺼진 서재의 주인인 철학자 구시다 마고이치(串田孫一) 등…. 목조 건물이 많은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다행히 책 때문에 집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지만, 온통 집안을 책에 점령당한 이들의 생활은 남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늘 새끼발가락이 얼얼한 상태다. 부딪칠 책 모서리가 널렸기 때문이다.

 

작가 앤 패디먼(Anne Fadiman)의 『서재 결혼 시키기』(1998)는 그런 프로 독서러들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프로 독서러 둘의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의 결합, 혹은 두 집안의 결합을 넘어선다. 서재를 결혼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읽다보면, 결혼이라는 것을 과연 해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물론 대부분의 어려움이 그렇듯 돈이 있다면 좀 더 쉽게 해결될 것이다. 20만 권에 달하는 책을 보관하기 위해 도쿄에 ‘고양이 빌딩’을 세운 작가이자 평론가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처럼 말이다.

 

프로 독서러들은 만나면 늘 “책을 버려야 하는데”를 주제로 장탄식을 나누지만, 누군가 대대적인 책 정리를 한다는 소문을 들으면 득달같이 달려가 책 목록을 뒤져보는 사람들이다. 커피의 맛보다 그곳에 구비된 장서의 질로 카페의 수준을 가늠하고, 집값보다는 그 동네에 도서관과 서점이 몇 개 있는지로 지역의 상태를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프로 독서러에게는 공간의 분위기보다 그곳에 비치된 책의 제목이 더 중요하다.

프로 독서러에게는 공간의 분위기보다 그곳에 비치된 책의 제목이 더 중요하다.

 

 

인생의 모든 것을 책으로 배우는 사람들

 

그런 한결같음이 미련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프로 독서러들에게 책은 인생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거대한 뇌와 마찬가지다. 그곳에 빨판을 대고 그때그때 삶에 필요한 것을 쪽쪽 빨아들인다. 책은 지식의 보고라지만, ‘모든 것’에는 지식뿐 아니라 감정도 해당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지식과 감정, 객관과 주관을 포함하여 인생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책으로 배운다.

 

한때 “연애를 책으로 배웠어요.”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사실 프로 독서러들은 연애만 책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림책 작가 키티 크라우더(Kitty Crowther)는 자신의 독서를 “단어를 모으는 행위”라고 말한다. 감정을 가리키는 단어를 모으면서 그는 “이전까지 몰랐던 감정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감정의 이름을 배우면 모호한 감각에서 정확한 감정을 가려낼 수 있다. 그렇게 안팎의 세계는 풍부해진다.

 

책에서 연애를 배운 이들이 연애를 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아마도 대부분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프로 독서러가 다른 프로 독서러를 만났을 때 각별한 마음이 되는 건 책의 마술 중의 하나다. 비슷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서재에 있는 책 목록이나 지금 읽고 있는 책에 대한 정보를 나누면서 상대방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된다. 연애를 책으로 배우는 건 쉽지 않지만 프로 독서러끼리 책을 매개로 연애를 하는 건 꽤 성공률이 높다. 사랑의 밀어보다 독서 토론이 더 많이 오갈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 말이다.

 

연애가 아니더라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건 다르지 않다. 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가면 가장 먼저 책장을 살펴보고, 밖에서 만나면 들고 다니는 책의 제목을 눈여겨본다. 좋아하는 책이 같다면 신이 나고, 내가 싫어하는 책을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이 달라 보인다. 프로 독서러들은 인간관계에 분명한 기준이 있고, 이 기준은 실패하기 어렵다. 기준이 정확하다기보다는 기준에 맞추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기준에 맞는 사람이 없다면 프로 독서러는 과감하게 인간관계를 포기한다. 외로울 틈이 어디 있겠는가. 책이 있는데.

 

기준이 좁고 분명한 것이 좋은 점도 있다. 프로 독서러들은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 안다. 무엇을 축하해야 하는지, 선물은 어떤 것을 하면 좋은지, 무엇 때문에 괴로운지 금방 알아챈다. 앤 패디먼의 남편 조지는 그에게 생일 선물로 9kg의 책을 안겨준다. 30만 권의 책이 들어차 있는 헌책방에서 일곱 시간을 보낸 뒤 그는 행복하게 9kg의 책을 골라들고 나오는데, “낡은 책 9kg은 싱싱한 캐비아 1kg보다 적어도 9배는 맛있다.”라는 그의 말에 프로 독서러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프로 독서러들 사이에서는 화젯거리가 떨어질 날이 없다. 그들은 서로에게 책을 추천하면서 공감대를 더 두툼하게 쌓아간다. 그들의 인간관계에 있어 책은 식빵과 식빵 사이의 잼과 같다. 상대와 나를 달콤하게 찰싹 붙여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책 때문에 이견이 생기면 그만큼 차갑고 매정하게 돌아서지만.

 

책으로 이루는 워라밸

 

책을 읽는다는 것만으로 돈을 벌기는 어렵지만, 책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이들 중에는 프로 독서러가 많다. 수많은 작가와 평론가, 편집자, 서점 주인 등 책을 쓰고 만들고 유통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직업을 선택하기 이전에 이미 프로 독서러였다. 책을 읽는 것은 자연스럽게 책을 쓰는 것과 연결된다. “책에 대한 사랑”이 전제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놀라운 점은 그들은 일할 때뿐 아니라 쉴 때도 책을 계속 읽는다는 것이다.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일을 하면서 책을 읽다가 쉴 때는 다른 종류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읽는 책의 장르는 바뀔지언정, 독서 자체는 멈추지 않는다. 여행 갈 때 들고 가는 책, 휴가 갈 때 들고 가는 책, 일할 때 읽는 책, 화장실에 비치해 놓는 책, 자기 전에 읽는 책…. 각각의 경우마다 성격과 길이별로 분류된 책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다. 쉴 땐 쉬라고 한다면, 그들은 놀란 눈으로 말할 것이다. ‘쉬고 있는데요? 이보다 어떻게 더 편하게 쉴 수 있나요?’

 

프로 독서러들만큼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들은 책을 읽으며 일하고 쉴 때도 책을 읽으며, 새로운 취미가 생기거나 여가 활동을 해야 할 때 또한 책을 찾아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새로운 취미에 관심이 생기면 책 검색부터 시작한다는 암묵적인 원칙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스포츠? 책을 찾아보자. 만드는 취미? 책을 찾아보면 있겠지. 여행을 가자고? 일단 책부터 찾아보고. 수집, 덕질, 사회 공헌 등 어느 분야이든 이에 관해 다루는 책이 없는 분야는 거의 없다. 프로 독서러들에게 책은 거대한 방주와 같다. 혹은 평생을 살아온 마을과도 같다.

 

어디에 가든 꼭 책을 들고 다녀야 하는 것도 프로 독서러들의 특징

어디에 가든 꼭 책을 들고 다녀야 하는 것도 프로 독서러들의 특징이다.

 

 

시작도 즐거움, 결국은 즐거움

 

유용함을 떠나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주는 즐거움도 꼽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프로 독서러에게 책을 왜 읽는지 묻는다면 가장 먼저 떠올릴 특징이다. 카즈키 미야(香月美夜)의 『책벌레의 하극상』(2015)은 책을 무척 좋아하던 주인공이 죽은 뒤 책이 없는 세계에 다시 태어난 상황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중세시대를 닮은, 한편으로는 마법이 일상적인 판타지의 세계를 살아가는 주인공의 오직 하나의 목표는 “책을 읽는 것”이다. 책의 내용은 상관없다. 씩씩한 주인공은 “읽을 수 있는 책이 없다면, 만들면 되지.”라는 단순한 목표를 향해 일로매진한다. 진흙 판을 구워서 글을 새기거나 식물로 종이를 만드는, 책을 제작하기 위한 기초적인 작업부터 차근차근 끈기 있게 밀고 나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책, 그게 도대체 뭔데?’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목표에 공감하는 프로 독서러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책이 아니어도 읽을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인터넷 사이트와 SNS, 문자만으로도 일용할 글자들은 충분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여전히, 끝끝내 책이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쌀벌레가 쌀을 먹어야 하듯이 책벌레는 책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들 덕분에, 언제부터인가 사양산업이 아니었던 적이 없는 출판계는 여전히 오늘도 성업 중이다. 아마도 쉽게 사그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프로 독서러들, 그들이 느끼는 책 읽는 즐거움은 꽤 끈질기니까.

 

박사

박사 북칼럼니스트

각종 일간지를 비롯해, 월간지와 주간지에 책과 문화와 관련한 글을 기고했다. KBS TV “책읽는 밤”, KBS 라디오 “신성원의 문화읽기”, SBS 라디오 “책하고 놀자”, MBC, 교통방송 등의 다양한 방송에서 책과 문화를 꾸준히 소개해 왔다. 현재 KBS 라디오 “김태훈의 프리웨이”에서 책을 소개하고 있으며, 오디오클립 “글쓰기 바이블”에서 강원국, 백승권과 함께 글쓰기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한양여자대학교에서 강의했고, 온라인 강의사이트 백미인에서 강의 중이다. 저서로는 『치킨에 다리가 하나여도 웃을 수 있다면』(허밍버드, 2019), 『은하철도999, 너의 별에 데려다줄게』(파람북, 2019), 『빈칸 책』(홍시, 2019), 『지도는 지구보다 크다』(궁리, 2009), 『가꾼다는 것』(너머학교, 2017) 등이 있다.
catwing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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