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7 2019. 11.
[2030이 보는 출판]
조팀장
2019. 11.
1.
기억에 남는 풍경 #1. 어느 출판사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대표가 내게 질문은 하지 않고 본인 얘기만 했다. 주옥같은 말씀으로 가득했던 30분 출판 특강. 공짜로 많은 걸 배우고 나와서 기분이 나빴던 건 아니지만, 당최 나를 왜 면접장에 불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야 특강의 이유를 알았는데, 그건 내가 이력서에 썼던 희망연봉이 그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기억에 남는 풍경 #2. 어느 출판사에서 어떤 이유로 퇴사를 하게 되었는데, 본부장이 나를 부르더니 자기가 왜 그랬는지 변명만 길게 늘어놨다. 꼰대들은 그렇게 전임자의 방만 경영이나 회사 시스템을 탓하고서 자기도 피해자인 양 불쌍한 얼굴을 한다. 그런데 나한테까지 그런 쓸데없는 변명을 구구절절 하는 모습이 진짜 불쌍하게 보여, 화가 나기보다 동정심이 일었다. 그의 작전은 분명 먹혀들었다.
두 사례에서 보듯 꼰대들은 말이 많다. 가르치려 들거나 변명하려 든다. 듣는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을 품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계몽의 대상에 불과하다. 하긴, 그 세대의 진보 지식인들은 내가 대학에 다닐 때도 조용히 공부하고 졸업해서 삽 들고 안전한 삶의 길을 모색하라고 조롱했고, 토플 책을 덮고 짱돌을 들라고 훈계했다. 물론 영리하게도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짱돌을 버리고 토플 공부를 했고 그 토플 점수로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졸업 전에 취업도 했다.
말과 글을 다루는 업계답게 선생 노릇을 하려는 분이 많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은 쏙 빼고, 세상 모든 일에 참견하며 날카롭고도 아프게 까댄다. 정치적으로 누구보다 진보적인 그들이지만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거나 외주 비용을 제때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평소에는 출판인임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연봉을 줄 때는 어려운 업계 사정을 말한다. 우습게도 다들 자기 회사가 업계 최고 수준이라고 믿는다.
이런 그들이니 90년대생과 케미가 잘 맞을 리 없다. 솔직하고 자유롭고 단순한 그들이 당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선생 중 일부는 그들에게 빈정대고 모욕감마저 준다. 내가 아는 몇몇 90년대생 능력자들은 그런 선생들에게 잘못 걸려 상처만 가득 안고 회사를 떠났다.
2.
건방진 말이란 걸 알지만 해야겠다. 출판 업계에 필요한 건 선생이 아니라 비즈니스를 할 줄 아는 선수다. 학생이 아니라 직장인인 우리는 이제 배우는 건 좀 그만하고, 돈을 벌고 싶다. 돈을 벌려면 어떻게든 장사가 되어야 한다. 선생이 아니라 선수가 필요한 이유다. 한 출판사도 계간지를 폐간하고 선생 노릇을 하던 기획위원들이 나가면서 살림살이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선생이 아니라 편집자가 원고를 고르니 집 나간 독자가 돌아오는 것 아닌가.
이런 맥락에서 나는 사업을 할 줄 아는, 독자를 만족시킬 줄 아는 유능한 선배 출판인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단순한 매출 압박으로, 그러니까 부하직원들을 잘 쪼는 식으로 한 철 장사를 해나가는 곳을 말하는 게 아니다. 대표 혼자 잘나서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는 곳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꾸준히 되는 집들을 보면, 리더가 직원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판을 잘 깔아준다. 권한을 위임하고, 실패가 허락되는 분위기를 조성하며, 누구든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보다 자기 직원이 더 귀한 줄 알고 직원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물론 이 모든 건 매출이 든든하게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는 걸 조직 구성원 모두가 잘 알기에, 첫 번째 과제인 매출에 철저히 초점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는다.
되는 집들은 이처럼 ‘매출 → 매출이 나오는 시스템 → 인재 양성 → 적절한 보상’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사활을 건다. 비싼 외서 판권이나 스타 저자, 심지어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보다 직원에게 투자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런데 과연, 이런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출판사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있을까. 사업을 하는 경영인이라기보다 선생 노릇에 익숙한 이들은 주로 환경을 탓하고 급변하는 세상을 탓한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쓸 만한 젊은 편집자가 없다며 공개적으로 한탄한다. 그 독설의 끝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걸 정녕 모르는 걸까. 사람들 말마따나 그 많던 3년 차 편집자는 다 어디로 간 걸까.
덕분에 80년대 중반생인 내 또래 팀장들은 대리급 편집자의 공백으로 매일같이 격무에 시달린다. 팀의 리더 역할과 허리 역할을 동시에 해내느라 뼈를 갈며 일하는데, 꼰대 선생들은 ‘Latte is horse’로 시작되는 훈계만 반복한다. 그런 혹사 끝에 성과가 나올라치면 온갖 이유를 대며 보상에는 인색하게 군다. 젊은 그들이 차라리 전직 혹은 창업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이유다.
대내외적으로 ‘좋은 복지’와 ‘평생 고용’을 약속하는 출판사라고 인력 이탈 사정이 크게 다른 것 같진 않다. 그런 환경에서도 직원들이 퇴사를 선택하는 걸 보며, 이번엔 젊은 세대의 ‘그릿 없음’이 도마 위에 오른다.
선생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젊은 세대가 원하는 건 단순하다. 기회와 가능성이다. 이렇게 일하면 성과를 낼 수 있는지, 내 기획과 아이디어를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는지, 성과를 내면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이 조직에서 자신이 미래를 꿈꿀 수 있는지, 지금 사장에게 충성했는데 행여나 앞으로도 대를 이어 충성해야 하는 건 아닌지.
하지만 대부분은 가혹한 현실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완전 소진되어 제풀에 나가떨어진다. 회사로서는 열심히 일해준 A가 나가서 조금 아깝고 안타깝기도 하겠지만, 뭐 그래도 큰 문제는 없다. B를 뽑아서 대체하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그렇게 자동차 부품 갈 듯 구성원을 갈아치우며 지금까지 달려온 조직이니까.
4.
선배 출판인들에게 가시 돋친 말을 쏟아놨지만, 어느덧 나도 선배보다 후배가 많아졌다. 조금만 잘못해도 아래위로 욕먹기 딱 좋은 중간관리자가 됐다. 90년대생과 함께 일하며 나의 성장과 그들의 성장을 동시에 도모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그런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앞서 비판한 선배 출판인처럼 되지 않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일까.
어려울 것 없다. 이미 앞에서 다 말했다. 말 많은 선생이 아니라 비즈니스 선수가 되는 거다. 후배들이 성과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래서 돈을 벌게 해주는 게 내 역할이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팀원들에게 인센티브를 받게 해주는 팀장이 되고 싶다. 내가 아는 한, 그런 팀장이 되는 데는 아주 현실적인 3가지 방법이 있다.
1. 정치력을 발휘해 목표 매출을 낮춘다.
셋 중 어느 하나라도 할 수 있다면, 그래도 괜찮은 팀장 아닐까. 최소한 가르쳐주는 것만 많은 선생보다는 훨씬 나은 리더가 되는 길 아닌가. 현재 내가 처한 상황에서 찾은 답은 고작 이 정도다. 이 글을 읽고 미욱한 나를 계몽하고 싶은 선생들이 많겠지만, 이럴 땐 어른답게 좀 참고 들어주는 것도 괜찮다. 반대로 내가 팀원들을 향해 마음먹은 것처럼, 나에게도 돈 벌 기회를 주실 분이라면 무슨 말씀이든 어떤 제안이든 대환영이다. 조팀장 11년차 편집자. 3년차 편집팀장. 어린이 출판으로 시작하여 실용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의 책을 만들어왔다. 공정성보다 실용성을 더 중시하는 80년대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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