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25 2021. 09.
[출판계 주류의 변화]
이지용(문화평론가)
2021. 9.
최근 몇 년 동안 SF에 관한 논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단순히 대중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모호한 기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지표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 출판되는 작품의 수가 유의미한 지표 내에서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고, 신인 작가를 발굴하기 위한 공모전이나 발표된 작품들의 의미를 조명하기 위한 시상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SF의 경우, 전문 작가를 발굴하기 위한 신인 공모전이 매해 새롭게 생겨나 기존의 공모전과 함께 회차를 더해 가고 있다.
판타지의 경우 전통적인 출판 시장에서 드러나는 움직임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웹소설을 중심으로 콘텐츠 IP로서의 성장세가 괄목할 만하다. 웹소설 플랫폼 기업이 진행하는 공모전에서 판타지 콘텐츠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제 특이한 현상도 아니다. 판타지는 이미 메인 장르로 자리 잡았다. 독자들의 검증을 받은 스토리는 웹툰과 종이책 출판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매체 전환을 통해 IP로서 경쟁력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으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소위 시장이나 문화적 흐름의 대세라고 칭할 수 있을까?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던져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SF와 판타지는 새롭게 등장한 것인가?’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을 토대로 ‘SF와 판타지가 주목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재질문해 볼 수 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모으면 비로소 ‘SF와 판타지가 보여주는 가능성’이 한 때의 유행인가 혹은 지속적인 미래로 가기 위한 저변 확대인가를 진지하게 전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 질문들을 하나하나 마주해 보자.
SF와 판타지는 새롭게 등장한 것인가?
왜 갑자기 SF와 판타지가 주목받게 된 것일까? SF와 판타지는 새롭게 등장한 것일까? 먼저 답을 이야기하자면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던 SF와 판타지라는 장르 혹은 문법에 대해 이제야 그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 장르 모두 이미 한국의 문화 예술 지형도 내에서 자리한 지가 꽤 되었기 때문이다. SF는 1900년대 초반, 구한말부터 번역 및 창작이 시작되었다. 1990년대 이전까지 소설로 한정했을 경우 주목할 만한 창작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지만 아동 문학 및 만화·애니메이션 등으로 매체를 확장하면 이미 충분하게 창작되고 소비되어 오던 이야기 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전적 환상물과 선을 긋고 장르 판타지로서 맥락만 이야기하더라도 판타지는 1990년대 이후 대중들이 가장 활발하게 즐기던 이야기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게임이나 만화·애니메이션과 같은 다른 매체 경험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해당 시기의 스토리텔링은 대부분 멀티미디어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형태였기 때문에 판타지 문학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한국에서 판타지 장르는 이전에 대중적으로 인기 있던 무협 및 로맨스와 같은 주변 장르들의 요소를 대거 흡입하면서 융화된 형태로 나타났다. 광의로 정의된 장르 판타지 내에서 동양풍의 무협적인 요소나, 로맨스 판타지, 게임 판타지 등의 다양한 맥락이 형성되는 것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SF와 판타지는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21세기에 들어서 주목받은 특별한 현상이라고 인식해서는 안 된다. 이미 『드래곤 라자』와 같은 판타지 소설은 공식 집계되지 않은 데이터를 포함하여 판매 부수가 1,000만 부를 훌쩍 넘기며 시장의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장르의 외연을 조금 넓혀 보면 『퇴마록』이나 『묵향』과 같은 작품들 역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0년대에 진입해서도 『달빛조각사』와 같은 작품이 기록한 판매 부수는 과연 텍스트를 소비하는 독자층이 적은가에 대해 재고를 하게 만든다. SF의 경우 2015년도 이전까지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받은 출판물은 없었지만, 마니아층이 꾸준히 유지되고 사회적 분위기가 변화하며 더 이상 낯선 이야기가 아닌 익숙한 형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때문에 한국에 현재 나타나고 있는 SF와 판타지에 관한 관심은 짧게는 30여 년 동안 다양하게 얽혀 있던 사회문화적인 경험이 이제야 주목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SF와 판타지가 주목을 받는 이유
출판 시장으로 한정하여 냉정하게 원인을 검토하다 보면 기존 출판 시장을 구성하고 있던 전통적이고 좁은 의미의 문학 혹은 이야기 형식이 현시대에 경쟁력을 잃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SF나 판타지 모두 1990년대 이후 고정적인 창작자와 소비자가 존재해 왔다. SF의 경우 한정적인 마니아층에 대한 자조적인 비판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마니아 문화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출판 시장에서 간헐적으로 조명 받던 SF 장르는 인터넷 공간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으로 옮겨져 창작되고 소비된다. 한국의 대중문화로서의 SF가 1990년대 PC 통신의 출현과 함께였기 때문에 이러한 전환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도서 대여점의 시대가 저물고 출판물 유통시스템이 변화함에 따라 판타지 장르 또한 인터넷 플랫폼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창작자와 독자층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판타지의 경우 인터넷 플랫폼, 현재 웹소설이라 명명되는 콘텐츠로 전이를 경험하면서 이전의 장르적 특징과는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변화들이 기존의 주류 문학에서 가지고 있는 이야기 형식의 경쟁력 감소와 맞물려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SF와 판타지 모두 1990년대 이후의 문화 경험에서 가장 대중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현재 소비자들에게 해당 장르는 더 이상 마니아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게임이나 만화·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접해 왔던 익숙한 감각이고, 그러기에 대중문화 시장에서도 경쟁력이 확보된 것이다.
결국 현재의 SF와 판타지를 향한 대중의 반응은 작품의 내용이나 그 작품을 만든 소위 유명 작가의 탄생으로만 설명할 순 없다. 그 기저에 흐르고 있는 소비자들의 ‘익숙함’이 가장 근본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장르의 수용성은 익숙한 관습과 코드를 학습하는 것이 기반이 되는데, 2021년 현재의 익숙함은 주류 문학이 보여주던 전통적인 서사 문학의 이야기 형식들이 아니라 1990년 이후부터 대중화된 SF와 판타지 콘텐츠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캐릭터와 세계관, 그리고 사건의 전개 형식인 것이다. 최근 대중들로부터 조명을 받는 SF와 판타지 작품들이 기존 서양에서 이식된 고전적 장르 형식에 충실하기보다는 현재 우리나라의 동시대적인 감각들과 배경, 캐릭터를 스토리텔링 내에서 구현했다는 점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SF와 판타지가 보여주는 가능성
결국 대중들은 현실에 대한 다양한 감각을 그동안 학습해온 SF와 판타지의 스토리텔링, 즉 장르적 관습과 코드를 통해 경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한국 SF에서의 이야기 맥락은 현실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고, 판타지의 에피소드는 사회 변화에 그 어떤 매체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문학의 가치가 시대를 통찰하고 은폐된 것을 사고함에 있다고 할 때, SF와 판타지를 통해서도 그 가치를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정한 갈래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여겼던 문학적 역할을 SF와 판타지 같은 장르가 부여받게 되었다.
이야기가 우리의 주변을 통찰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첨단 과학 기술로 둘러싸여 있고, 그것을 통해 일상을 영위하는 현대에 더 이상 과학적 사고 실험은 특수한 영역이 아니다. 환상이 현실의 이면을 통찰하고,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는 세계에 이미 접어들었음을 인지할 때 판타지가 재현하는 세계의 경이감과 환상성을 현실 도피라고 치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특히 과학 기술의 발달로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무너지는 시뮬라크르(simulacre) 속 다양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장르 형식이 더욱 필요하다. SF와 판타지는 오히려 가장 현실적이고 일반적인 감각과 맞닿아 있다. 그 감각에 대중이 반응하는 것이고, 거기에 문화적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미래의 가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현상인가? 한때의 유행처럼 지나가는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장르 문학은 전망이 밝다. 우선, 창작자들이 안정적으로 확보되고 있다. SF 분야 신인 공모전이 매해 늘어나고 있고, 판타지 역시 웹소설 플랫폼 공모전을 중심으로 스타 작가가 탄생하고 있다. 웹소설 작가가 되기 위한 강좌도 개설되었다. 온라인 서점이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 ‘한국 문학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작가’에 SF 작가들이 상위권으로 언급되는 현상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최근 몇 년간 신춘문예에서도 SF나 판타지 작품이 증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지난 30여 년 동안의 문화적 내재화를 통해 현대 한국에 대한 사회적 감각들을 빠르게 흡수하고 이를 익숙한 이야기 형식으로 내어놓는 작업이 반복되면서 소비자층과의 조응이 확대되고 있다. 장르에 익숙했던 창작자와 소비자층의 동반 확장은 해당 영역이 가지고 있는 경쟁력들을 조금 더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대적 변화에 따른 부응을 들 수 있다. 한국의 현대 SF와 판타지 작품들은 2010년 이후 사회적 변화에 빠르게 반응해 왔다. 페미니즘과 기후 문제, 차별이나 장애의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이슈에 과감하고 영리하게 반응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한국의 문화를 논의할 때 해당 장르의 텍스트는 간과할 수 없는 데이터가 되어가고 있다.
SF와 판타지는 이후의 가능성을 더 진지하게 논의해 볼 수 있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안정적으로 확보되고 있는 창작자들과 장르 문법에 익숙해진 소비층의 확대, 그리고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는 내재적 가능성까지 이들 장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대중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에 대한 어리둥절함에서 벗어나 학술적이고 비평적인 영역을 비롯한 다양한 층위에서의 접근과 분석, 그리고 의미 부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 장르에 대한 이해를 통해 주변부에 머무르고 있는 또 다른 문학적 가능성 역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SF와 판타지가 지난 시간 동안 계속해서 한국 문학 내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최근에야 그 전체를 발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지용(문화평론가) 문화평론가, 건국대학교 학술연구교수, DGIST 기초학부 겸직교수. 『한국 SF 장르의 형성』, 『비주류 선언』, 『블레이드 러너 깊이 읽기』, 『인공지능이 사회를 만나면』 등의 저서, 공저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