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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4  2021.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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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시대는 저무는가]
동시대를 향유하는 가장 편안한 방식에 관하여

 

 

 

허단(은행나무 라이킷(Lik-it) 팀장)

 

2021. 8.


 

좋아하는 일화가 있다. 1948년 베를린 여행 중이던 시몬 드 보부아르1)가 종이를 움켜쥔 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알베르토 자코메티2)가 말을 건넨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죠?” 보부아르는 글을 쓰고 싶은데 도무지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괴로움을 털어놓는다. 이에 자코메티는 말한다. “뭐든 써 봐요.”

 

 

1)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1908~1986).
2)
스위스의 조각가이자 화가(1901~1966). 대표 작품으로 《걷는 사람》이 있다.

 

출간 즉시 세상에 충격을 던져주었던 『제2의 성(Le Deuxième Sexe)』(1949)의 탄생에 얽힌 작은 에피소드다. 책의 시작은 그랬다. 처음에 보부아르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적으려다 무언가를 규정 내려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고 끝내 역사 속 여성을 다루는 사상서를 완성했다. 선구적인 명저의 이 소박한 출발, 보부아르가 집필의 시작점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과 생각을 다루고자 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나날이 독서 인구는 줄어드는데 종이책의 변방에서 쑥쑥 성장해온 웹 플랫폼과 소셜 미디어가 시장에 침투하면서 출판계의 고민도 커졌다. 분야와 상관없이 신간의 두께는 얇아지는 추세다. 그중에서도 특히, 최근 몇 년간 에세이와 시집이 강세를 보였다. SNS 피드를 오르내리는 감성, 힐링 문장의 손바닥만 한 쓸모와 함께. 에세이 편집자로서 출판 시장 내 흐름에 관한 어떤 의견이랄지, 방향을 제시해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고 얼마간 부담을 느낀 것도 사실이지만 이내 덤덤해졌다. 편집자로 다년간 일하며 지녀왔던 기본적인 생각에는 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와 비교하자면 전반적으로 종이책의 인기는 예전 같지 않다. 문단의 권위는 시들해졌으며 문학뿐 아니라 인문학에 대한 열기도 식었다. 온·오프라인의 베스트셀러 목록만 봐도 단번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유명 유튜버나 셀러브리티, 인플루언서의 인기는 출판 시장까지 옮아왔다. 독자의 신뢰와 지지를 바탕으로 두터운 팬덤을 보유한 단독 저자의 수는 현저하게 줄었고 드물게 스타 작가가 등장해도 생명력이 길지 않은 실정이다. 쉽게 말해, 시대정신(Zeitgeist)이라고 할 만한 것이 사라진 오늘날 어느 신인 작가를 가리켜―번역물인 경우를 제외하고―‘혜성처럼 등장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면 그리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시청률이 높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소개된 도서가 전파를 타기 무섭게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재테크와 자기계발서 분야는 유명 유튜버의 저서가 일찍이 상당한 인기몰이를 한 바 있고 이러한 현상은 현재진행형이다. 에세이 분야라고 다를 것이 없다. 영상 콘텐츠로 차근차근 입지를 다져온 저자의 라이프스타일, 특정 주제에 관한 방법론을 갈무리한 것이 책으로 출간되는 중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개인의 삶이, 그로부터 빚어진 이야기가 뜨거운 관심을 받는 것이 출판 시장의 한편에서 변화를 촉발하는지 혹은 시대적 요구가 개인의 삶뿐 아니라 시장 전체를 뒤흔드는지, 순서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영상 매체를 기반으로 입지를 다진 아이콘의 영향력이 막강해졌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종래의 에세이는 소설가나 시인 등 등단을 거쳐 ‘문필 활동이 본업’인 작가의 소품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 작가의 전작을 좇는 장서가의 수집 대상이거나 순수하게 글맛을 보려는 독자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콘텐츠를 책으로 엮을 때 에세이라는 장르 외에 마땅한 선택지가 없는 저자들이 시장에 대거 유입되면서 도서의 생산과 소비의 양상 또한 달라졌다. 에세이의 ‘굿즈화’가 과거보다 좀 더 강화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심심치 않게 관찰할 수 있다.

 

최근 2~3년간 출간과 동시에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은 『흔한남매 시리즈』(흔한남매, 미래엔아이세움, 2019),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박막례·김유라, 위즈덤하우스, 2019),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김옥선, 상상출판, 2021), 『따님이 기가 세요』(하말넘많, 포르체, 2021)는 모두 유명 유튜버의 기존 콘텐츠에 약간의 변형을 가한 도서다. 책 띠지에 카피로 실리는 ‘구독자 수’와 ‘누적 조회 수’는 저명인사의 추천사만큼이나 강력한 홍보 효과를 발휘한다. 해당 도서에 대한 독자의 소비는 과감하고 적극적이며,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지는 독자와 저자 간의 소통도 매우 활발하다. 책 홍보 방식 역시 신문 광고 등 지류를 통한 노출보다 저자 본인의 채널에서 선행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여기서 던지는 질문 하나. 그렇다면 왜 유튜버와 인플루언서는 종이책으로까지 활동 영역을 확장한 걸까? 나는 확실하게 오감을 충족시키는, 종이책이 지니는 물성적 가치 때문이라고 본다.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된 아카이브는 이미 생활의 전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지만 여전히 종이 기록물이 지니는 안정적인 느낌을 구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 권의 책은 시청각적 정보 제공에 특화된 영상 콘텐츠가 충족시키지 못하는 촉각과 후각적 기능을 수행하며 독자에게 보관과 소장의 기쁨을 구체적으로 안긴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자신을 널리 알리는 데 목적이 있는 해당 저자들은 출판 시장 역시 자기 채널의 일부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출판업자들과 비교해 그들은 ‘온라인이냐, 오프라인이냐’, ‘영상이냐, 텍스트냐’로 구분되는 시장의 속성에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하다. 단지 통합된 형태의 구독자 수가 중요할 뿐이며 더 많은 시청자 및 독자와 만나는 데 의미를 두는 것이다.

 

미국의 브랜드 마케팅 전문 업체 ‘퓨처캐스트(FutureCast)’의 대표 제프 프롬(Jeff Fromm)은 유아기부터 디지털과 밀착된 상태로 성장한 1996~2010년생을 Z세대라고 정의했다. 5개의 화면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Z세대의 집중력이 유지되는 시간은 8초에 불과하다. 이들을 사로잡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이전 세대보다 ‘나’라는 개인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만큼 ‘나’를 브랜드화하려는 욕구도 강하며 취향의 공동체를 다양한 소셜 미디어를 통해 능동적으로 꾸린다. 의사 표현에 거침이 없는 Z세대의 또 다른 특징으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제품에 대한 ‘탐색’과 ‘구매’ 사이에 ‘성공을 위한 탐색’ 과정이 필히 끼어든다는 점이다.3) 그들은 나의 선택을 타인으로부터 수시로 평가받길 원하며 선택의 당위를 문제 삼는다. 브랜드가 자신들이 내건 모토에 걸맞은 행동을 취하는지 살펴본 후 소비자를 대하는 브랜드의 소통 능력을 유심히 관찰한다. ‘평등’과 ‘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하는지 따져보며, 행동이 담보되지 않은 위선적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들은 크고 작은 자신의 선택과 아이덴티티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트위터에 실시간으로 업로드하는 산발적인 이미지와 한 줄의 코멘트로서 자신의 안목과 개성을 입증 받고자 한다. 이러한 Z세대의 욕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 시나 에세이 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의미 함축적인 텍스트인 것이다.

 

 

3)
『최강소비권력 Z세대가 온다』(제프 프롬, 홍익, 2018) 출간 기념 저자 이메일 인터뷰 참조, 동아비즈니스리뷰, 2019년 3월 Issue2.

 

Z세대 독자가 출판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크라우드 펀딩을 들 수 있다. 『언어의 온도』(이기주, 말글터, 2016),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백세희, 흔, 2018),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미예, 팩토리나인, 2020)은 독자들의 후원금을 받아 출간된 후 입소문만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과거의 독자가 ‘만들어진 출판물’을 수동적으로 받아보았다면, 이 새로운 독자층은 말 그대로 ‘작가를 만드는’ 시스템에 적극 개입한다. 출판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출간 전 독자의 반응을 살펴봄으로써 수요의 규모를 예측해볼 수 있고 선판매 부수를 미리 확보해 초판 소진에 대한 부담감을 확실하게 던다. 후원에 ‘성공’한 독자의 애착과 관심은 이후 해당 저자뿐 아니라 책을 출간한 출판사, 나아가 출판 시장 전체로 향하기에 건강한 방식의 마케팅이라 할 수 있겠다.

 

‘텍스트의, 텍스트를 위한, 텍스트에 의한’ 출판이 더는 과거와 같은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운 현실에 관해 정리하자면 그렇다. 악조건이라고 불평할 것도 없는 것이 나로서는 이러한 매체의 혼잡, 세대교체에 의한 새로운 플랫폼의 유입과 흡수 과정을 통해 출판 시장이 또 한 번 크게 자정 작용을 거치고 순환한다고 본다. ‘예전만 못한’ 매출의 침체가 근본적인 문제인 바에야 작금의 변화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다시금 호황을 끌어낼 기회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또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지 않고 이미 배경이 굳어진 특정 저자군과 저자 섭외에 열을 올리는 출판사의 행보는 성장과 도약을 내다보는 과정에서 행해진 자연스러운 시도일 뿐 기획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시류에 집중한 나머지, 필력이 보장되지 않은 작가들의 저작물을 양산하면서—시간과 품을 들여 완성하는—오직 책만이 가지는 본연의 가치를 훼손하는 경우는 없는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끝으로 지난날 내 독서 생활의 변화를 되짚어보려고 한다. 문학을 전공하고 책을 만드는 편집자를 업으로 삼은 나는 비교적 소비에 적극적인 독자의 표본으로 놓기에 썩 나쁘지 않은 조건일 것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10대 시절의 독서량이 단연 지배적이다.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고 삶의 밑천이 된 폭넓은 독서가 그때 이루어졌다. 20대에는 어느 정도 기반이 마련된 취향에 기대어 다독이 아닌 열독과 탐독으로 보냈다. 좋으나 싫으나 직업상의 이유로 책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인 30대에는 구체적인 목적을 갖고 책을 대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정보를 수집하거나 공부가 필요해서, 그도 아니면 찰나에 머릿속을 비우기 위한 도피의 수단으로 찾았다. 책 한 권을 정독하지 않는 한, 도무지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강박적이던 오랜 독서 방식 역시 선별적이고 집약적인 속독과 적독으로 바뀌었다. 요약하자면 한 인간에게 책이 다가오는 형태가 시대와는 별개로 생애 주기에 따라 단순하고 명료해지는 측면이 있다는 얘기다. 성장기에 정서를 풍부하게 만들고 정신적 성숙을 도왔던 이 종이 매체에 발휘되는 인간의 끈기와 관대함은 육체의 노화와 더불어 점점 줄어든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와 함께 속도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변화는 필연적이다. 나 또한 현재적 관점에서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타깃 독자층’으로 분석된 날이 있었을 것이며, 그로부터 비껴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독자일 것이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은행나무출판사에서는 에세이 브랜드, 라이킷(Lik-it) 시리즈뿐 아니라 다양한 에세이를 기획·출간하고 있다. 라이킷 시리즈의 특징을 하나 꼽자면 ‘작은 판형에 담긴 묵직한 내용’이다. 나는 에세이라는 장르가 언제부턴가 ‘가벼움’의 표상으로 취급되는 데 깊은 의문을 품고 있다. 책을 만드는 입장에서, 에세이는 가벼워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한다. ‘가벼움’ 혹은 ‘무거움’은 텍스트가 지닌 기본 성질을 최적화시키는 과정에서 고민되어야 할 지점이지 장르적인 색채가 아니기 때문이다. 삶을 대하는 진취적인 자세와 더불어 탁월한 필력을 보유한 저자를 발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에세이는. 개인적 체험을 복기하고 당시의 느낌을 전방위적으로 묘사하며 오늘을 끝으로 닫힌 방의 문을 밀고 나가는 것. 개인이 놓인 시대의 초상을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구도로 그리는 것. 나는 에세이를 두고 작가가 자기 자신을 걸고 시도하는 첫 번째 실험이라고도 여긴다. 어렵고 복잡하고 딱딱하다는, 책에 대한 편견이 있다면 우선 에세이 한 권을 펴보라고 권하고 싶다. 한 인간의 내면에서 교차하는 질문을 따라가는 동안 당신이 직면한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름에 젖은 보부아르를 향해 그를 아끼는 친구가 공언했듯 뭐든 읽을 것을 종용한다. 귀찮음을 동반하는 아주 단순한 행위가 삶의 지평을 새롭게 열기도 한다. 글을 쓰는 작가와 글을 읽는 독자의 간격은 결코 멀지 않다. 어느 날에는 거짓말처럼 둘의 관계가 역전될 수도 있다. 책을 펴내는 자와 책을 후원하는 자의 경계가 모호해진 오늘처럼. 결국 내가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이다. 마음을 움직이는 콘텐츠를 선택하라.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편안함 속에 길이 있다. 작지만 단단한 에세이 한 권이 무한히 뻗어나가는 지식의 또 다른 영역으로, 장르를 불문한 책의 세계로 당신을 인도하길 기원한다.

허단

 

허단(은행나무 라이킷(Lik-it) 팀장)

1986년 부산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수년간 해외 문학 편집자로 일했고 지금은 은행나무출판사의 에세이 브랜드 라이킷(Lik-it) 시리즈를 만들고 있다.
nonmoi@eh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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