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7 2023. 09.
[출판과 ESG]
김보은(어라우드랩 대표)
2023. 09.
나무를 심은 사람, 나무를 쓰는 사람
대학원에서 그린디자인(Green design)을 공부하면서 교수님이 내주신 첫 과제는 1953년에 발표된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Jean Giono)의 단편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을 필사하는 것이었다. 디자인대학원에서의 과제가 동화 같은 책의 문장을 필사하는 것이라니. 의아하면서도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지게 될 생각이 너무 궁금했다. 책 속의 인물 엘제아르 부피에(Elzéard Bouffier)는 황무지에 매일 세심하게 고른 건강한 도토리 100개를 심었다. 그렇게 10만 개를 심으면 그중 2만 개만이 싹을 틔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는 고독하게 매일 30년 동안 나무를 심었고, 그 황무지는 숲이 되었다.
나는 나무를 쓰는 사람이다. 종이는 나무로 만든다. 나는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수많은 인쇄물을 만들었다.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 우리는 ‘나무’를 피상적으로만 인식했던 것 같다. ‘나무’는 씨앗에서부터 싹을 틔워 그 땅에서 오랜 기간 자라났을 ‘나무’인데 말이다. 이 ‘나무’로 만든 종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재료이기도 하다. 가격이 저렴하여 제작하는 데 부담이 적고, 플라스틱보다는 친환경적이라는 인식으로 더 쉽게 제작하고, 또 쉽게 버린다.
종이 한 장 차이
2015년부터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나누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디자인 작업을 할 때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디자인의 기획 단계부터 제작물이 쓸모를 다하고 버려지는 상황까지 고려한 전 과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조금 더 나은 선택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원료의 제작에서부터 제품의 폐기까지 여러 차이를 발생시키는 재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종이에서부터 그 고민을 시작했다.
* 전 과정 평가: LCA(life-cycle assessment)라고도 한다. 제품이나 시스템의 원료 채취 단계, 가공, 조립, 수송, 사용, 폐기의 모든 과정에 걸쳐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디자인 작업 과정에 반영하여 고려해보고자 했다.
당시만 해도 재생 종이나 비(非)목재 종이에 대한 정보들은 각 제지사와 유통사의 홈페이지나 홍보물들에 흩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것들을 활용하기 편하도록 먼저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정보를 우리 내부에서 활용해오다가,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는 디자이너와 창작자들이 이 정보를 함께 사용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종이 한 장 차이: 지구를 존중하는 창작자와 디자이너를 위한 친환경 종이/인쇄 가이드』(어라우드랩, 2020)라는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은 국내에서 구입할 수 있는 재생 종이와 비목재 종이의 정보(제작 규격, 평량, 고지율(재생 종이에 들어가는 폐지 함유율), 환경 정보 등)와 우리가 고른 60종의 종이 샘플북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이 한 장 차이: 지구를 존중하는 창작자와 디자이너를 위한 친환경 종이/인쇄 가이드』
“종이 한 장 차이야” 우리는 흔히 아주 작은 차이를 이야기할 때 이렇게 말한다. 책 제작에 사용되는 종이 한 장은 어느 정도의 차이일까.
『제로의 책』(강현석 외, 돛과닻, 2022)은 표지와 내지 모두 재생 펄프 함유율이 100%인 종이로 제작했다. 이 책 1,000권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종이를 생산하기 위해 가정용 냉장고 14.1대의 연간 소비량과 동일한 에너지, 가정용 세탁기 10.8대의 연간 소비량과 동일한 물을 소비했다. 그리고 자동차 0.5대의 연간 배출량과 동일한 탄소를 배출했다. 우리가 만약 재생 종이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18.4그루의 나무를 베야 했고, 가정용 냉장고 23.3대의 연간 에너지 소비량과 가정용 세탁기 11.9대의 연간 물 소비량을 사용하고, 자동차 1.3대의 연간 탄소 배출량과 동일한 탄소를 배출했을 것이다.1)
종이 한 장의 차이는 에너지 소비량과 탄소 배출량을 차치하고도, 엘제아르 부피에가 꿋꿋하게 심고 싹을 틔워 오랫동안 자라난 그 ‘나무’ 18.4그루의 차이이다.
책의 발자국, 에코 퍼블리싱을 위한 선택들
재생 종이를 선택한 것만으로 환경에 대한 책임을 다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책의 형태로 우리에게 오기까지 책은 여러 공정을 거친다. 종이의 원료가 되는 나무에서부터 인쇄, 제본, 후가공, 유통 등의 과정에서 에너지 및 자원을 사용하고 탄소발자국을 남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간단하게도 줄이는 것일 것이다. 각 공정에서 사용하는 자원의 양을 줄이고, 유해 물질의 사용을 줄이고, 필요하지 않은 공정은 거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작업들을 좀 더 면밀히 살피고 환경적 감각을 잃지 않도록 과정별로 고려할 수 있는 사항들을 정리해 보았다.2) 원료-제작-운송-사용-폐기의 과정으로 정리했고, 책을 구상하는 단계에서 할 수 있는 선택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기획 단계와 에코 퍼블리싱의 정보들을 서로 공유할 수 있도록 정보 공유의 단계를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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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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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 용도에 적합한 기능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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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의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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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 기획/디자인 단계에서 패키지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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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있는 공급자, 책임 있는 제조사/제작사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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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의 행동 변화를 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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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료(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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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 펄프/비목재 펄프의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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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 에너지로 생산된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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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 배출 저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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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계 표백의 최소화(예: 무표백, 대체 염소 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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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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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용도에 적합한 제작 방법 선정(예: 디지털 인쇄, 옵셋 인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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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과정에서 버려지는 종이의 양의 최소화(예: 판형,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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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적은 생산 단계(예: 박, 형압, 코팅의 후가공 필요성 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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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물질이 적은 잉크, 접착제 사용(예: 무용제 잉크, 콩기름 잉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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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부속품 최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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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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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부피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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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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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 기간/용도에 적합한 내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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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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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팅 등 분리 불가능한 소재, 첨가물의 최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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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분해 가능한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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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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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별 분리가 쉬운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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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분리 배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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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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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별 가능한 재료와 환경 정보 표기
환경적 책임을 다한다는 것
하나의 환경적 기준을 정답처럼 이야기할 수는 없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 권의 종이책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공정을 거쳐야 하고, 그 과정에서 어느 것이 가장 환경 침해가 적은지 정량적으로 평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책의 전 과정에서 많은 것을 고려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종이를 사용했고, 탄소를 배출했다. 그리고 그 책은 언젠가는 버려진다. 그렇기에 책을 만드는 데 제작자의 환경적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책을 만드는 데 있어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종이로 만든 재생 종이로 책을 만들고, 그 책이 다시 종이로 돌아오는 순환이다. 그렇기에 재생 종이를 사용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종이의 재활용을 어렵게 하는 후가공이나 불필요한 부속품을 사용하지 않는다.
책 표지는 유통이나 보관상의 손상을 줄이기 위해 비닐 코팅을 많이 하지만 코팅은 현재 재활용 시스템에서 분리 배출하지 않도록 되어 있으며, 이런 것들이 섞여 재생 종이의 품질을 떨어뜨린다. 책을 분리 배출한다는 인식이 낯설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교육학술정보원(Korea Education and Research Information Service, KERIS)의 조사 결과를 보면 2020년 한 해 동안 대학 도서관에서 폐기한 종이책만 해도 110만 1,500권이라고 하니3) 책을 제작함에 있어 버려지는 것에 대한 고민도 필요한 부분이다.
앞서 언급한 『제로의 책』은 책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런 부분을 고민하고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다. 표지라고 부르는 면을 만들지 않고, 표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목차를 넣었다. 여러 필자가 쓴 글을 표지라는 명목으로 우리가 해석한 디자인에 가두고 싶지 않다는 디자인적 의도도 있었지만, 책 제작에 필요한 종이의 양을 줄여보고자 한 시도였다. 관용적으로 비워놓던 표지 안쪽 면이나 속지, 간지 등 단 한 페이지도 빈 페이지를 두지 않았다. 버려지는 종이의 양을 최소화한 판형으로 계획하고, 저시력자를 위해 글씨의 크기를 키웠음에도 본문의 여백을 줄여 본래 계획한 페이지의 분량보다 오히려 줄일 수 있었다. 표지의 종이는 양장본 표지를 만들 때 두께를 두껍고 단단하게 하기 위해 속에 넣는 종이를 겉으로 그대로 사용했고, 표지와 내지 모두 100%의 재생 종이를 사용했다.
『제로의 책』 표지와 내지
하지만 이런 시도를 지속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현재 국내의 재생 종이 선택지는 매우 좁다. 디자이너로서 종이를 선택하는 것은 책을 보는 독자에게 이 책의 경험을 전달하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무척 까다롭게 고르게 되는데 재생 종이의 종류는 무척 적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표지용 종이의 선택권은 조금 더 넓어지긴 했지만, 본문용 용지의 선택은 거의 전무하다. 국내지의 경우에는 100%의 재생지를 찾기 어렵고 국내 환경표지 기준에 맞춰 몇 퍼센트 이상(종이의 평량에 따라 고지율 10~30%)이라고만 표기할 뿐 정확한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한 이유로 『제로의 책』의 본문 용지도 수입지에서 선택하게 되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물류의 이동이 멈추면서, 2쇄 제작을 앞두고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 책이 품절인 상태였지만 출판사에서도 100% 재생 종이를 사용하겠다는 마음으로 기다려 2쇄를 제작했으나, 얼마 전 3쇄를 진행하면서 안정적인 종이 수급의 문제와 경제적인 부분 때문에 재생 펄프 20% 이상의 종이로 변경하게 되었다.
기후 위기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가 환경에 빚을 덜 지는 책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선택할 수 있는 좋은 품질을 가진 다양한 재생 종이의 개발과 생산이 필요하며(간절히 바란다), 재생 종이가 더 좋은 종이라는 소비자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또한 고지율 10~30%를 넘어 기후 위기 시대에 맞는 새로운 환경표지의 기준이 다시금 필요하다. 더 다양한 기준에 대한 담론들이 우리 사회에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앞서 책의 전 과정에서 고려해볼 사항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책을 만드는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은 제작하는 책이 어떤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각 과정을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지켜보고,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가 고민해보며, 자신의 책 제작에 대한 환경적 기준을 만들어보는 것. 그것이 지금 기후 위기 시기를 살아가는 책을 만드는 사람의 환경적 책임일 것이다.
1)
『제로의 책』, 강현석 외, 돛과닻, 2022, 11p. 여기서 제시된 값은 미국 기준으로, Environmental Paper Network의 Paper Calculator를 통해 얻었다.
2)
『환경영향을 줄이는 종이제작물의 디자인체크리스트 연구』, 김보은,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2019
3)
“대학생 1년간 도서관 책 2권 대출…쌓이는 종이책 연 110만 권 폐기”, 〈중앙일보〉, 2022.02.09.
김보은 어라우드랩 대표 어라우드랩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디자인의 환경적, 사회적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그린디자인 석사 과정을 공부했으며, 졸업 연구 논문으로 『환경영향을 줄이는 종이제작물의 디자인체크리스트 연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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