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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7  20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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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이 보는 출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도 ‘말’은 바로 합시다

 

 

 

이연실(문학동네 편집부 국내5팀장)

 

2019. 11.


 

 

 

1. 출판인들이 쓰는 이상한 말

 

우선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들에서 나 역시 100퍼센트 자유롭진 못하다는 것을 밝힌다. 출판계에서 안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말들이 몇 있다. 이 말을 직접 쓰거나 접할 때면 나는 바쁘게 일하다가도 손이 멈춰지곤 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쉼표 하나, 조사 하나에도 전전긍긍하는 우리 편집자들의 언어가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조금 더 정확한 말을 쓰기 위해, 중복되는 말이나 모호한 말로 내용을 흩뜨리지 않기 위해 교정지를 빽빽이 메우는 우리가, 교정지 밖에서 독자들을 향해 쓰는 말 또한 좀 더 섬세하고 정확해져야 하지 않을까?

 

신작 출간 초기 판매를 끌어올리기 위해 출판사들에서 하는 마케팅으로, 작가의 친필사인본이벤트가 있다. 작가가 면지에 한장 한장 서명한 친필사인본 이벤트는 작가의 공이 들어가는 만큼 독자들의 호응도 좋다. 출간 초기 책에 대한 평가가 퍼지기도 전에 기꺼이 작가의 이름만 믿고 구매해주는 독자들에 대한 보답으로서도 이 이벤트는 가치 있다. 그런데 요새 자주 보이는 ‘엇비슷한’ 마케팅으로 ‘친필사인인쇄본’ 이벤트가 있다. 나는 이것이 좀 희한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사인 한 장을 받아서 도판으로 인쇄한 것이라면 ‘사인인쇄본’이라고 표현하면 족하지 않은가? 사인을 당사자의 친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글씨로 하는 법은 없다. 작가가 직접 한 권 한 권 육필로 서명한 책이라면 ‘친필’을 강조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친필’과 ‘인쇄’를 한 단어에 욱여넣은 ‘친필사인인쇄본’이라는 말의 감각은 조금 괴상하다. 나는 이 단어가 마치 ‘기계로 뽑은 수타 짜장면’처럼 억지같이 느껴진다.

 

단순히 말만의 문제가 아니라 독자들은 ‘친필사인인쇄본’을 친필사인본과 종종 헷갈린다. 필압(筆壓)까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생생한 사인인쇄본을 보고 ‘친필’이냐고 묻는 전화가 출판사로 심심찮게 걸려온다. 출판인들은 ‘친필사인본’과 ‘친필사인인쇄본’의 차이를 대번에 인지하지만, 독자들은 아니다. 이 오묘한 눈속임 같은 ‘친필사인인쇄본’이라는 말이 너무 싫어서 나는 기왕 사인본 이벤트를 할 거라면 가급적 나의 저자들에게는 친필사인작업으로 요청하곤 했다. 그러나 이것은 품과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고, 이 친필사인작업을 요청하기 어려운 상황들도 많았다.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친필사인인쇄본’ 이벤트를 내걸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친필사인인쇄본’이라는 말은 좀 비겁한 것 같다. 독자들을 교묘하게 헷갈리게 하는 이런 말은 서점과 출판계에서 자정해야 하지 않을까?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출판계에서 흔히 쓰는 카피 중에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라는 말 역시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출간 전 예약판매를 진행했고, 예판기간 중에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킨 책이라면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출판계에서 이 말은 관성적으로 쓰이고 있다.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도 아니고,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다.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 말을 이마에 붙이고 있는 모든 책들이 과연 정말 출간과 ‘동시에’ 돌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우리는 ‘베스트셀러’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시장의 법칙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성급하게, 허둥지둥 우리의 책에 베스트셀러 딱지를 붙이고 싶어 한다. 이런 조급증이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라는 정확하지 않은 말에도 스며 있는 게 아닐까?

 

나의 저자인 모 작가님은 내가 약간만 과잉된 카피를 썼다 하면 ‘약은 효능을 과장하는 광고를 하면 즉각 처벌받는데, 왜 책은 아무리 과장광고를 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느냐’고 말씀하셨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신 말씀이었으나, 책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명확한 구매효과를 입증할 수 없으므로 광고 한마디라도 더 삼가고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리라고 나는 받아들였다. 아무리 책을 파는 게 급선무일지라도 언어를 다루는 우리가 독자들에게 건네는 말은 조금 더 엄정해져야 하지 않을까?

 

 

 

2. 베스트셀러 조작만큼 나쁜 스테디셀러 조작

 

이번에 내가 비판할 일들로부터는 난 자유롭다. 편집자 생활을 시작한 이래 나는 한 군데의 출판사에 몸담아왔고, 내가 속한 회사에서 이 일은 절대금기였다. 그러나 지금 출판계에서 이 일은 너무나 만연해 있고 심지어 요즘은 이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는 이들조차 거의 없어졌다. 바로 ‘쇄수 부풀리기’다.

 

요즘 서점에 가보면 출간된 지 얼마 안 된 책들이 100쇄 200쇄를 찍었다고 홍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출간된 지 몇 개월도 안 된 책이 100쇄를 찍은 기적적인 경우도 본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중쇄란 말 그대로 이전의 쇄가 거의 소진되어 새 책이 필요한 경우에 찍는 것이다. 사전에도 ‘쇄’란 “책을 똑같은 내용으로 다시 출간할 때, 그 출간횟수를 세는 단위를 나타내는 말”(고려대한국어사전)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런데 웬일인지 요새 일부 출판사들은 한 번에 한 쇄씩 찍지 않는다. 이를테면 10쇄와 11쇄를 한 날에 동시에 인쇄한다. 분명 같은 날에 인쇄에 들어가는데도, 쇄수를 바꾸고 발행일에도 며칠쯤 차이를 둔다. 굳이 안 해도 될 ‘판권갈이’를 해가면서 이 번거로운 짓을 하는 이유는 책의 전국 판매부수를 명확하게 카운트할 수 없고, 발행부수도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이 업계에서 출판사들이 홍보에 써먹기 좋고 자체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수치’가 바로 쇄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쇄’는 출판사가 하루에 몇 쇄씩 자의적으로 고무줄처럼 쭉쭉 늘려도 되는 것이 아니다. 출간 후 오랜 기간 동안 쇄를 거듭한 책은, 그 책이 곧 스테디셀러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베스트셀러 위주의 세상에서 독자들이 스테디셀러를 알아볼 유일한 명확한 기준은 판권에 기록된 ‘쇄’다. 비단 발행부수가 압도적으로 많지 않더라도, 단 한 번도 베스트셀러 차트 상위권에 진입한 적이 없는 책이라 할지라도 수년, 수십 년간 차근차근 거북이처럼 쇄를 늘려온 책은 좋은 책으로 존중받고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고 ‘쇄’는 판권면에서 바로 이런 스테디셀러를 독자들에게 조용히 웅변하는 역할을 하는 수치이다.

 

출판계의 악습인 사재기는 베스트셀러를 조작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위로 여겨지고 처벌받는다. 나는 ‘쇄수 부풀리기’가 스테디셀러를 조작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사재기’만큼 지독한 악습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이렇게 ‘쇄수 부풀리기’를 하는 책은 베스트셀러들이 대부분이다. 단기간에 많은 부수를 찍는 베스트셀러가 시간과 뭉근한 독자들의 애정을 필요로 하는 스테디셀러의 자리까지 탐내며 쇄수를 늘려가고 있는 것이다.

 

작가, 독자, 출판인 모두가 행복해지는 말이라는 ‘중쇄를 찍자!’의 본뜻이 어쨌든 ‘쇄수만 최대한 늘리고 보자!’는 아닐 것이다. 판권에 기록된 쇄는 책의 나이테와도 같다. 책의 나이테를 무리하게 임의적으로 늘린 ‘쇄수 부풀리기’를 그저 홍보의 한 수단이라고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고 본다. 베스트셀러는 종종 마케팅으로도 만들어지지만, 스테디셀러는 오직 독자들의 꾸준한 지지로 시간을 견뎌낸 책들만이 누려야 마땅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3. 현장편집자들에게 더 많은 소통과 배움의 기회를

 

지금까지 나는 출판인들이 책을 만들고 알리는 과정에서 바로잡았으면 하는 작지만 중대한 잘못에 대해 말했다. 이번엔 이 판에서 일하는 우리 자신들을 위한 얘기를 해보려 한다. 2018년 나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글로벌 출판 전문인력 양성과정의 ‘콘텐츠 기획 역량 향상’ 부문의 대상자로 선정되어 미국 뉴욕에 다녀왔다. 지나치게 긴 이름이 매우 ‘공공기관 사업’스럽지만, 실제로 내가 이 사업의 대상자로 선발되어 뉴욕에서 보고 경험한 것들은 너무나 유용하고 재밌고 충격적이었다.

 

그간 책 뒤표지 추천사에서나 보았던 뉴욕의 ‘퍼블리셔스 위클리’ 사무실로 아침에 출근하면, 난다 긴다 하는 뉴욕의 출판인들이 우리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지금 뉴욕의 출판시장과 그들이 도모하고 있는 놀라운 일’에 대해 들려주었다. 우리 또한 한국 출판인들의 현실과 고민을 무수히 털어놓으며 핑퐁처럼 토론과 질문을 주고받았다. 점심을 먹으러 멀찍이 나가는 시간조차 아까워 가까운 치폴레에서 허겁지겁 브리또를 입에 쑤셔 넣고도 다음 세션에서 만날 출판인들과 단 몇 분이라도 더 여유 있게 대화하고 싶어 후다닥 돌아왔다. 말로만 듣던 사이먼앤드슈스터(Simon & Schuster) 같은 초대형 글로벌 출판기업부터 직원이 열 명 안팎인데도 기획력으로 단단히 무장하고서 뉴욕 한복판에서 여유 있게 살아남은 소규모 출판사들의 사무실까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영어에 서툰 내가 작년에 내가 이렇게 뉴욕의 출판 현장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글로벌 출판 전문 인력 양성 과정’ 교육 대상자를 선발하는 분들 가운데, 현장기획편집자의 역량을 평가하는 데 유려한 영어회화 능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분들이 있어서였다고 생각한다. 합격 후 뉴욕에서 현지출판인들과 소통할 때는 동시통역이 지원되었다. 영어에 능숙한 다른 편집자들조차도 현지출판인들과의 대화와 각종 세미나에서 출판용어나 전문용어들의 정확한 뜻을 동시통역으로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체크할 수 있어 좋았다고들 했다.

 

사실 지금 내가 기획편집일을 해나가는 데 유려한 영어회화가 필요한 순간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흥원에서 내가 다녀온 과정 외에 출판계의 해외 연수나 해외 교육 과정의 문은 ‘외국어 능통자’들에게만 열려 있다. 우리말과 글을 다루는 기획편집자의 역량을 평가하고 지원한다면서도 영어실력이 필수조건이 되는 아이러니―자연히 국내도서 기획편집자들보다는 해외편집자들에게 기회가 집중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지난해 내가 얻은 이 잊지 못할 경험과 배움의 장이 나는 앞으로도 더 크게 가급적 많이 열리길, 이것이 내가 누린 드물고 특별한 경험에 그치지 않길 바라본다.

 

돌아보면 출판계에서 후배들을 위해 남다른 관점으로 ‘새로운 판’을 깔아주는 선배들은 자주 뜬금없이 욕을 먹거나 고난에 직면했던 것 같다. 2019년 내가 참석한 출판인 행사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것은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시작한 ‘출판정담’이었다. 출판인 하면 대번에 떠오르는 사장님들, 너무 익숙한 원로급(?) 편집자들 말고, 한창 현장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편집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자리다. ‘출판정담’ 행사는 참석자를 모집하기 시작하면 불과 몇 시간 만에 정원이 마감될 정도로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켰고, 나도 큰 도움을 받았다. 새로운 시도이다보니 ‘출판정담’을 준비하는 실무자들의 노고가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때 이해할 수 없는 억측과 오해의 말도 떠돌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터져 나온 이야기들은 바로 나의 이야기였고, 내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장 이야기였다.

 

책도 안 팔리고 먹고살기는 점점 힘들어지지만 우리에겐 각자의 출판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할 자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당장 우리의 생계를 잇게 해줄 책 한 권을 근근이 만드는 일, 그리고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그 책들을 사주고 추천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출판인들에겐 우리의 일이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더 넓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멋진 사건들이 일어나야만 한다. 매년 역대 최악의 출판 불황이 갱신될지라도 책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무궁무진하며, 이 판이 그래도 재미있고 희망적이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계기들이 필요하다.

 

출판단체를 이끌어가시는 분들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관점과 방식으로 후배들을 위한 새 판을 깔아주는 일을 계속해주시길 부탁드린다. 더 많은 현장편집자들의 이야기를 더욱 폭넓은 관점과 시야로 발견해주고, ‘사람’에게 투자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주시길 바란다. 젊은 우리는 더 많이 소통하고 더 넓은 세상에서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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