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3 2023. 05.
[책생태계 ‘노동’을 말한다]
이연호(책이있는글터 서점 대표)
2023. 05.
필자는 ‘노동’의 문제를 조리 있게 설명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전문가가 아니다. 30년 넘게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서점 대표일 뿐이다. 필자가 운영하는 ‘책이있는글터’는 대개의 중형 서점들이 그렇듯 십여 명 안팎의 직원들이 역할 구분 없이 섞여 일하고 있는 곳이다. 중형급 서점을 중심으로 볼 때 ‘서점의 노동’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도서를 입고하고, 판매하고, 반품하는 등의 일상 업무는 일반 소매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근대적 의미의 ‘근육질 노동’이다. 반면 서점의 역할과 관련해서 생겨나는 업무는 지역 사회에서 문화의 중심 역할을 위한 ‘문화적 노동’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서점 내에서는 업무의 경계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운영자나 노동자 모두 도서 판매점으로서의 ‘서점의 일’과 문화공간의 업무를 지칭하는 ‘서점의 일’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더욱이 서점의 핵심 직원일수록 문화공간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운영자에 앞서는 경우도 허다하다. ‘서점의 노동’은 이렇게 구분이 모호한 지점이 있지만 일반 판매점의 ‘근육질 노동’과 문화적 역할로서 주어지는 ‘문화적 노동’의 두 갈래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서점의 ‘근육질 노동’은 이른바 잔손질이 많이 가는 일이다. 현재 유통되는 도서의 종수는 대략 60만 종으로 추산한다. 200~300평 정도의 중소형 매장이라 해도 10만 종 안팎의 도서를 진열 판매한다. 매일 100여 종 안팎의 도서가 새로 입고되고 반품량도 그에 못지않다. 반품률이 높은 탓이다. 진열 중인 책도 여러 번 자리를 옮긴다. 대략 한두 달 정도 신간 코너에 진열하고 나면, 벽면 서가나 다른 이벤트 코너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렇게 번거로운 일상은 당연히 근육질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 책이 독자의 손에 들어가기까지 102번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너스레를 떨던 영업자가 있었다. 비록 엄정하게 계량한 수치는 아니었겠지만 출판·서점계의 일상적인 노동이 얼마나 많은 번거로움과 자질구레한 잔손질이 필요한 일인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다만 서점에서의 근육질 노동은 일반 소매점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거래처나 독자와의 ‘관계의 익숙함’이 필요한 노동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 ‘관계의 익숙함’ 때문에 오래 익은 손길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 서점에는 관계에 익숙한 인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단기 시급제 직원으로 빠르게 교체되는 중이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서점의 고용 인원은 필수 업무를 중심으로 적정 인원의 1.2배를 유지해왔다. 책을 소개하고 판매하기 위해서는 내용 숙지는 물론 출판 경향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독자 설득이 용이하다. 관계에 익숙한 인력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설득의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하루 네다섯 시간 근무하는 시급제 직원들에게 신간 도서에 대한 이해를 요구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 보니 매장을 찾는 독자의 만족도는 점점 떨어지고 실망한 독자의 발걸음은 뜸해지기 마련이다. 매장의 매출이 줄어드는 만큼 정규 직원의 고용을 줄여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안타깝고 위태로운 현실이다.
90%에 가까운 할인 경쟁이 비일비재하던 때가 있었다. 너 죽고 나도 죽자는 식의 무한 할인 경쟁이었다. 2014년이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멈췄다. 비록 반쪽짜리이긴 했지만 현행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서점의 10% 할인과 5% 추가 적립금 제공은 오프라인 서점이 따라할 수 없는 치명적인 차별 조건이었다. 밀리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할인 혜택을 제공해 보았지만 수익률만 나빠지고 말았다. ‘정가제’의 문제를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오프라인 서점의 고용이 점점 불안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을 뿐이다. 근육질의 노동에 필요한 근력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시선을 돌려 점점 더 중요한 역할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서점의 ‘문화적 노동’을 살펴보자.
• 변화에 예민한 풍향계와 같은 일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제공하는 출판 통계에 따르면 2021년 집계된 신간 발행 종수는 약 6만 5천 종(납본 기준)이었다. 전년 대비 1.7% 감소된 결과였지만 책을 선별하고 주문해야 하는 서점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출판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이를 내용으로 담는다. 가까운 미래는 물론 지금 우리 사회의 욕망과 그 흐름의 실체를 반영하는 것이 책이다. 서점은 수많은 책을 한 곳에 모아 보여주는 열린 공간이다. 책에 열려 있고, 독자에게 열려 있다. 어떤 책들은 함께 진열하고, 어떤 책들은 산만하게 펼쳐 두기도 한다. 고르고 모으거나 벌려두어 변화와 흐름이 보여주는 역동적 경향을 담는다. 독자는 이 공간에서 변화의 향방을 가늠하게 된다. 서점은 마치 풍향계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전혀 새로운 방식의 배치를 통해 예상치 못했던 발견의 매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니 서점의 직원은 누구보다 예민한 문화적, 사회적 감각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 설득력을 갖추는 일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카산드라는 예언의 능력은 갖추었지만 설득력을 상실했다. 그러니 아무도 카산드라의 예언을 믿지 않았다. 현재 시장에 살아 있는 책은 대략 60만 종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중형급 서점들은 대략 5만 종에서 10만 종 안팎의 도서를 진열 판매하는데 책마다 이야기의 방향이 다르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 또한 다르다. 따라서 서점의 판단은 옳고 그름을 나누는 일이 아니어야 한다. 좋고 나쁜 책을 골라 좋은 책만 일방적으로 소개하는 일도 아니다. 저자 나름의 논리를 좇아 그 흐름과 맥락을 정리하면서 저자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전해야 한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책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데 있어서 설득력이란 도서 시장의 흐름과 맥락을 매끄럽게 이해하고 풍성하게 하는 일이다. 변화의 방향을 보여주고 이 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이라는 여러 텍스트를 풍성하게 전하는 일이 서점원의 주요 업무여야 한다. 풍성함이 설득력을 만드는 것이다.
• 디자인이 필요한 노동이다
‘디자인(design)’은 동사뿐 아니라 명사로도 쓰인다. 동사로서의 디자인은 행위를 말하지만 명사로서의 디자인은 일을 기획하거나 제안하는 것, 혹은 배치하고 설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책은 저자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결론이지만 저자가 의도한 대로 독자가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해석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다만 얼마만큼 깊이 있게 수용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로 남는다. 축적된 독서 경험에 따라 그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독서 경험은 독자 개인의 역량에 속한다. 하지만 독자의 동선과 시선을 매장에서 어떻게 유도하고 기획하는가에 따라 독서 경험이 축적되고 확장되는 과정은 크게 다를 수 있다. 경험의 확장은 독자에게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여정이 된다. 단순히 판매지수가 높은 책을 골라 독자의 시선 가까이에 배치하는 것만으로는 독자의 독서 경험을 풍부하게 할 수 없다. 독자가 읽게 될 책의 좌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위치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주변 진열이 필요하다. 전반적인 흐름과 경향보다는 하나의 저작물을 돋보이게 하는 깊이 있는 진열로 인류가 축적해온 과정을 함께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독자는 또 다른 거인의 어깨 위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 독서에도 ‘끌패’가 필요하다
충주는 예로부터 수로를 이용한 물류의 운송이 활발했던 곳이다. 특히 강원과 충청, 경기와 영남의 조세 물품을 보관했다가 한성의 경창으로 실어 나르는 조창이 있었기에 서해의 소금이 내륙 깊숙이 퍼지는 기점 역할을 했었다. 그 물길이 되는 남한강은 대체로 순한 강이다. 그런 남한강의 내륙 종착지를 앞두고 물살이 급하기로 이름난 ‘막흐레기’라는 여울이 있다. 이 여울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잦았다. 여울 주변에는 배를 안전하게 끌어 넘겨주는 일을 업으로 삼는 ‘끌패’들이 번성했다고 한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효과적인 독서에도 이런 끌패가 필요하다. 특히 독서의 제 맛을 느끼기 전에는 단계마다 재미를 붙여주고 다음 단계로 이끌어주는 책을 권해줄 안내자가 꼭 필요하다. 독서는 개인적 편차가 워낙 심해서 경험을 일반화하기가 어렵다. 책 읽기의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연령이나 원인조차 모두 다르다. 독서 안내자로서 끌패의 역할은 서점이 꾸준히 노력해야 할 주요 업무 중에 하나로 상당한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 서점은 시민을 위한 생활문화공간이다
서점은 시민을 위한 생활문화공간이다. 생활문화공간은 시민들에게 문화와 예술을 경험하고, 이해하고, 익히고,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시민 사회의 문화 역량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이나 미술관, 도서관과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센터 등이 이 역할을 맡아왔으나 최근에는 일정 수준 이상의 문화적 기능을 담당하는 서점을 생활문화공간으로 지정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경우 서점의 ‘문화적 노동’은 이미 공공 영역이 담당해야 할 몫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정책적 지원은 전무한 상태다. 공공 영역에서 운영하는 생활문화공간에 대해서는 다양한 지원하고 있지만 이와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는 서점 공간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공간이라는 이유로 별다른 지원책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이미 공적 영역이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해 주고는 말이다. 서점에서 ‘문화적 노동’을 담당할 인력을 고용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가 필요해 보인다.
2014년 현행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면서 잠시라도 절망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지역의 중형 서점들은 2016년 ‘서점학교(한국서점인협의회 서점학교)’를 열었다. 수많은 매체들이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쏟아내던 때였다. 서점학교를 선택한 것은 ‘인문학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서점인 나름의 해법과 실천 과정이었다. 그나마 서점학교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서점들이 최소한의 여유 인력은 유지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것도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재교육 과정 없이는 ‘문화적 노동’의 질을 담보할 수는 없다. 지금 서점에서는 ‘근육질 노동’도 ‘문화적 노동’도 위태롭다.
이연호 책이있는글터 서점 대표 1992년 가을 충청북도 충주에 책이있는글터 서점의 문을 열어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2019년엔 서점 안에 ‘(유)인문학당 더불어숲’을 열어 각종 인문학 강좌를 마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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