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8 2023. 10.
[‘한글’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상상]
석주연(조선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2023. 10.
달력에 빨간 날 국경일이 많아 10월이 즐겁다고들 한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날이 한글날이다. 그런데 한국 외에 세계적으로 문자 창제 기념일을 국경일로 지정한 나라는 별로 없다. 특이한 경우다. 한국의 문자와 문자 제정 경위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 특별한 한글날 즈음, 말과 글을 따지는 것이 직업인 필자와 같은 국어학자들을 매년 꺼림칙하게 만드는 풍경이 있다.
기자: “한글날을 맞아 국민으로서 소감 한 말씀 해 주시죠.” 행인: “한글날을 맞아 먼저 우리말을 발명해 주신 세종대왕님께 감사드리고 한국 사람으로서 앞으로도 우리말을 소중하게 가꾸겠습니다.”
인터뷰 중 우리말 한국어를 가꾸겠다는 기특한 결심을 밝힌 행인의 말, 전반적으로는 죄가 없다. 굳이 따지자면 행인의 말 중 ‘우리말을 발명해 주신 세종대왕님’이 걸릴 뿐이다. 세종대왕님이 태어나시기 수천, 수만 년 전에도 한반도에는 ‘우리말’인 ‘한국어’가 존재했었다. 세종대왕님은 문자인 ‘한글’의 발명가일 수는 있어도 ‘언어’인 ‘한국어’의 발명가일 수는 없다. 세종대왕님도 세종대왕님 당대까지 한반도에서 한국어를 보존하고 사용해 온 조상님들이 없었다면 애초 한글을 만들 생각조차 하시지 않았을지 모른다. 한글은 세종대왕님에 의해 우리말 한국어에 꼭 맞게 설계된 문자이기 때문이다.
기념일 제정의 취지를 생각하면 한글날은 그 명칭에 드러나듯이 기본적으로 문자를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날이지 언어인 한국어를 기념하기 위한 날은 아니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는 ‘한글’을 기념하는 날에 ‘한글’의 표기 대상인 ‘한국어’를 기린다고 해서 과하게 타박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한글날을 맞아 오랜 기간 한국어를 쓰면서도 우리만의 문자를 가지지 못했던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신 세종대왕님께 감사드린다.”와 같은 말이 위와 같은 상황에서 더 합당하게 느껴지기는 한다.
어쨌든 그렇다.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말에 맞지 않는 다른 나라의 문자인 ‘한자’의 그 음과 뜻을 가지고 발휘 가능한 창의성의 극한까지 이리 부려 쓰고 저리 부려 쓰면서 이두(吏讀)며 구결(口訣)이며 향찰(鄕札)이며* 우리말 표기를 위해 절치부심하다가 결국에는 독자적인 길을 개척한 결과가 ‘한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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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吏讀): 한문을 한국어 어순대로 재조정한 후 조사나 어미와 같은 형식 형태소를 중간 중간 삽입하는 방식의 한자 표기.
구결(口訣): 이두와는 달리 한문 원문은 유지하되 형식 형태소를 부기한 표기법. 향찰(鄕札): 주로 신라 시대 향가에 사용되었으며,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음식(表音式)으로 적던 글.
변방의 낯선 언어에서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한글
대학에서 예비 국어 교사와 한국어 교사를 가르치면서 필자는 강의 시간에 ‘한글’을 우리 정신문화, 언어문화의 ‘반도체’라고 종종 비유한다. 한글 창제로 이르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1970, 1980년대 우리보다 앞선 나라의 기술을 수입하여 소소한 기계로부터 트랜지스터 라디오, 컬러 TV 제조에 이르기까지 온갖 시행착오 끝에 오늘날 거의 모든 것을 움직이고 모든 것에 들어가는 우리만의 ‘반도체’를 내놓게 된 과정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만이 유사할 뿐 아니라 한글 창제 이후 한글이 우리 언어문화, 정신문화에 미쳐 온 영향력은 현대의 쌀이라는 반도체가 한국의 산업 전반에 미쳐 온 영향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2000년대 이후 한국 반도체의 영향력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폭발적이었듯이 한글과 더불어 한국어가 미치고 있는 세계에서의 파급력 역시 놀라울 정도라는 것이다. 특히 랜선을 타고 한류 문화와 함께 세계의 대양으로 전진하고 있는 한국어와 한글을 살피다 보면 ‘언제 이렇게까지’ 하며 혀를 찰 정도로 믿기지 않을 때가 많다.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1998년 겨울 무렵의 몇 장면들을 겹쳐 떠올리곤 한다.
우선 1998년 개봉되었던 할리우드 영화 〈고질라〉의 한 장면이다. 지구상의 핵 오염 후 괴물 생명체의 등장과 위협을 다룬 이 영화에서는 배가 좌초된 후 등장인물이 난파된 짐들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에 바로 난데없이 화면을 꽉 채운 한글 글자들이 등장한다. 등장인물이 들고 있는 참치 캔 위 ‘동원 아이큐 참치’라는 뚜렷한 글자들. 한글이 그렇게 서양에서 제작한 영화의 한 장면을 차지한 것은 거의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필자는 영국 런던대학교의 소아스(SOAS,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어학 센터에서 서양에선 낯선 한국어와 한글을 가르치는 강사로 일하고 있었을 때라 우연히 보게 된 영화의 한 장면에 난데없이 등장한 한글에 남모를 흥분까지 느꼈다. 마치 머나먼 타국 거리에서 우연히 가까운 친척이라도 만난 양 말이다. 적어도 이 장면이 당시 일본 문자와 한국 문자를 혼동한 제작진의 단순 실수였음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 흥분이 지속되었다.(나중에 이 장면은 한국 참치 회사의 엄청난 홍보 대상이 되었다 한다.)
영화 〈고질라〉에 등장한 한글
당시 보통의 세계인에게 한국인 그리고 한국어와 한글이 얼마나 낯설었을까. 순전히 개인적 경험이지만 당시 영국에서 필자를 처음 만난 영국인들은 일단 일본인이냐고 묻고 이후 중국인이냐고 물은 후 인도인은 아닐 텐데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곤 했다. 한국인도 낯선 존재인데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일본어나 중국어와는 한 마디도 통하지 않는 낯선 한국어이며 더욱이 문자까지 따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참으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세기 말이긴 했지만 당시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이십여 년 전이었다. 얼마 전 낸 책에서도 언급했었는데 당시 어떤 영국인 부부는 한국어와 한글을 가르치는 필자에게 중국과 일본처럼 큰 나라에 인접한 데다가 아직도 전쟁 중인 한국과 같은 작은 나라가 굳이 두 큰 강대국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고집하여 얻을 이익이 무엇이냐고 묻기까지 했었다.
이익이라니. 영어가 19세기 이후 세계의 공용어가 되어 버린 일을 역사 이래 영미권 국가에서 일어난 최대의 행운의 사건이라고 말한 이도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개인에게 운명처럼 찾아오는 자국어와 자국 문자의 ‘이익’을 묻는 배경을 짐작 못할 일은 아니다. 다만 필자는 ‘이익’이 아니라 ‘혜택’이라 부르고 싶으며 그 혜택은 물질적 혜택이라기보다는 정신적 혜택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덧붙여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뉴욕의 전광판과 파리의 에펠탑 앞에서 외국인들이 부르는 한국어 노랫말 속에 한국어 단어들이 줄줄이 엮여 나오고, 전 세계를 가로지르는 랜선이 한국어를 실어 나르고 있는 현재를 과거의 그 두 사람에게 미리 보여줄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을.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앞 다투어 지정하는 나라들의 숫자와 오대양 육대주 세종학당에서 배우는 외국인 학생들의 숫자가 매년 신기록을 갈아치우는 지금의 장면들을 말이다.
오랜 기간 우리의 생각과 문화를 보존해온 한국어와 한글
이제 앞에서 말한 한글날의 특별함으로 다시 돌아가 이야기해 보자. 문자 탄생을 축하하는 날을 국경일로 가지는 특별함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남의 문자로 우리말을 표기하는 창의성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고 올리다 지친 역사의 특정 시점, 한국어에 꼭 맞는 옷인 한글을 세종대왕님이 창제해 주신 덕분이다. 창제만 하셨을 뿐 아니라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새 문자의 사용설명서까지 남겨 주셨다. 또 세종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자가 없는 불편함 속에서도 오랜 기간 한국어를 보존하고 사용해 왔던 조상님들 덕분이기도 하다.
〈훈민정음 해례본〉
이후에도 한국어와 한글로 오랜 기간 우리의 생각과 문화를 보존해 왔다. 특히 왜란·호란과 같은 전란 시기를 제외하고는 조선 왕조 내내 한글 고문헌의 간행으로 물밑에서 끊임없이 이념, 의학, 교육, 구휼 등 우리의 지식, 정보, 가치를 한글로 기록 전파해 온 덕분이기도 하다. 왕으로부터 여염집 아낙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소소함을 그대로 드러내 남긴 한글 편지들과, 드물긴 하지만 탁월한 한글 고소설들은 말할 것도 없다. 어쩌면 지금의 한국어의 위상은 끈질기게 한반도에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있는 한국인 우리 모두의 덕분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ㄱ을 배운 이가 ㅋ을 배우기 쉽게 한글이 구조화되어 있는 것은 한글의 독특한 특성이다. 해외의 어떤 학자는 이러한 한글만의 특성에 주목해 세계의 문자 중 ‘자질문자(資質文字, 문자가 나타내는 음소들의 자질이 그 글자의 외형에 체계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문자체계)’라는 문자 부류를 따로 설정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모든 독특함을 장점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다만 한글의 경우 이 독특함이 한국인들 사이에 한글을 해독하지 못 하는 이를 찾기 어렵게 해왔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조차 한국어는 어려워해도 한글은 불과 하루 만에 습득하는 일을 부지기수로 가능하게 해왔다. 교육과 확산에 더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춘 문자가 한글인 것이다.
최근 어느 신문에서 시내의 고급 식당 메뉴판에 미숫가루를 ‘미숫가루’라는 한글 표기 없이 ‘MSGR’이라 메뉴판에 적은 경우를 소개하였다. 이런 식이라면 현재 미국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는 냉동 김밥의 미국 현지 표기 ‘KIMBAP’이 언젠가 우리나라 식당 메뉴판에도 ‘KIMBAP’ 단독으로 등장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코리안 스시’가 아니라 ‘김밥’이라는 우리말을 오랜 기간 우리 스스로 보존하고 사용하고 있는 것, 그것을 지금껏 하지 않았다면 현재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우리의 냉동 김밥은 ‘KIMBAP’이 아니라 ‘KOREAN SUSI’에까지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일상의 사소함이 삶과 문화를 바꾸는 법이다.
우리가 물려받아 생산하고 향유하는 언어와 문자는 SNS의 사소한 메시지 하나, 무심히 보는 유튜브 영상 밑 자막 글자 하나하나에까지 스며들어 있지만 일상에서 그 존재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각하지 못하는, 보이나 보이지 않는 우리 삶의 전자제품 속 반도체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우리 스스로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못해 안달이라는 점이 안타깝다. 이런 일이 계속되다가는 언젠가 우리 스스로가 ‘미숫가루’를 ‘미숫가루’로 부르지 못하는 황당한 상황에 접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날 휴대폰과 자동차를 들여다보아도 외관상 반도체는 좀처럼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반도체 없이는 휴대폰과 자동차가 작동되지 않는다. 한국어와 한글도 그와 같다. 좀처럼 일상에서 드러나 두드러지진 않지만 한국어와 한글이 없어서는 한국인들의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그 한국어와 한글이 날개를 달고 한국인들의 세상을 넘어 랜선을 타고 세계로 날기 시작했다. 우리 스스로가 한국어와 한글을 끊임없이 향유하고 남은 곳 없이 구석구석 부려 쓸 때에야 그 비행의 시간 역시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석주연 조선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조선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사범대학장·교육대학원장·교육연수원장 등을 역임했다. 대학원 석박사 과정 중 한국어의 역사를 공부한 후 영국의 런던대학교, 서울대학교 등에서 한국어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며 대영도서관과 케임브리지대학교 클레어홀 칼리지를 방문하여 영국 내 한국어 고문헌들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현재 한국어의 역사, 한국어 교육, 이주민의 언어와 소통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학부와 대학원에서 예비 국어 교사와 한국어 교사를 길러내고 있다. 최근 낸 책으로 『언어라는 세계: 우리가 모르는 우리말 이야기』(곰출판, 202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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