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이모저모

Vol.1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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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계 캐릭터 열풍 분석

 

 

 

김기홍 (경성대학교 글로컬문화학부 교수)

 

2018. 10.


 

‘캐릭터 열풍’이 출판계의 트렌드 키워드로 떠올랐다. 2016년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아르테), 이듬해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놀), 올해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알에이치코리아)와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을 두고 생긴 말이다. ‘빨강머리 앤’과 ‘보노보노’는 일시적 유행을 지나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으며, ‘곰돌이 푸’는 2018년 9월 현재 베스트셀러 5~10위권에서 선전하고 있다.

 

유사한 기획 도서 출판이 꼬리를 물며 선명한 트렌드를 형성했다. 기사 제목으로도 ‘멘토 캐릭터 열풍’이 쉽게 검색된다. 캐릭터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증폭되는 선순환 구조도 목격된다. 인스타그램에서 관련 해시태그 게시물은 수십만을 헤아린다. 성인 독자의 캐릭터 사랑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어서, 이 현상은 말 그대로 ‘돌고 도는’ 비주기적 순환 유행이라 할 수 있다. 가령, 2000년대 초중반 『파페포포 메모리즈』(홍익출판사), 『스노우캣』(미메시스) 등 캐릭터를 앞세워 크게 성공한 사례가 있다. 웹툰형 블로거였던 작가들이 인터넷에서 인기를 끈 캐릭터를 에세이툰 형식의 책에 담아 백만 단위 판매고를 기록했다.

 

캐릭터는 분명 출판계의 매력적인 아이템이다. 한마디로 독자들은 캐릭터를 좋아한다. 항구적인 잠재수요를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캐릭터 주도형 책이 늘 트렌드를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출판사의 관심사는 집단 심리에 내재된 캐릭터에 대한 잠재수요가 어떤 원인에 의해 실제 시장에서 트렌드를 형성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캐릭터’, ‘욜로’, ‘여성’, ‘추억’의 네 가지 키워드로 최근의 캐릭터 열풍 원인에 대해 알아보자.

 


<그림 1> 출판계 캐릭터 열풍 베스트셀러


〈그림 1〉 출판계 캐릭터 열풍 베스트셀러

 

 

 

1. 캐릭터

 

캐릭터는 힘이 세다. 독특한 생김새로 우리의 이목을 잡아끌어 웃게 만든다. 거부할 수 없는 마성의 매력으로 지갑을 열게 한다. 한국의 캐릭터 시장 규모는 한 해 12조 원 가까이 되며, 증가 추세에 있다. 최근에는 이모티콘 등 메신저 캐릭터가 크게 성장하고 있다. 라인, 카카오 등 대형 서비스들이 ‘프렌즈’ 시리즈의 캐릭터로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크게 성공했다. CJ E&M의 ‘파파독’, SK브로드밴드의 ‘옥수수’ 등 대기업들도 공을 들이고 있다. 네트워크 외부효과로 특정 서비스 캐릭터 사용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국민 귀요미’들이 우리 일상의 소통을 매개하고 있다. 유년층, 청년층은 물론, 십 년 전만 해도 유치하다고 이모티콘을 쓰지 않았을 장년층도 친밀한 애정 표현이나 단톡방의 의례적 감정표현을 캐릭터로 대신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캐릭터들은 우리의 “프렌즈”가 되었다.

 

굳이 벤야민과 매클루언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우리의 의식구조와 문화를 바꿔 놓는다. 개인 간 소통에서 이미지 의존도가 높아지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은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인식과 자세에 변화를 가져온다. 출판계 캐릭터 열풍은 이와 같은 거시적인 환경 변화, 독자들의 의식 변화와 무관치 않다. 게다가 캐릭터 산업의 바이블 콘셉트는 하나의 자산을 다양하게 활용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원소스멀티유스(One Source Multi Use)다. 캐릭터가 인기를 끌면 애니메이션, 영화, 만화, 게임, 공연, 테마파크, 어디로든 확장할 수 있다. 소설이나 에세이도 그중 하나다.

 

최근 인기를 끈 도서의 캐릭터들은 모두 유명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이다. 특히 곰돌이 푸는 디즈니의 영향력으로 전 세계에서 60여 년간 사랑받아 왔고,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바닥의 별에 이름을 새긴 몇 안 되는 창작 캐릭터 중 하나다. 그러나 최근의 현상을 ‘캐릭터 열풍’이라는 단어에 수렴해 일괄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열풍의 원인이지 따져봐야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책들의 성격이 제각각이라는 점도 ‘캐릭터’ 열풍으로 책이 많이 팔린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2. 욜로

 

시대의 특수한 상황을 초월하여 수십 년간 잘 팔리는 스테디셀러도 있다. 그러나 특정 도서를 집단적으로 구매하는 현상은 텍스트 바깥 세계, 즉 사회·경제·정치·문화적인 영향에 의해 결정된다. 최소한 반은 그렇다. 출판사들도 이를 잘 알기 때문에 시간의 총질에 내구성을 갖춘 ‘방탄 스테디셀러’에 대한 욕망을 뒤로하고, ‘이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책들을 기획한다.

 

지금의 출판 트렌드를 좌우하는 시대의 요구는 ‘세속적 희망’과 ‘피안의 위로’라는 대칭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우울증은 만성 고질병으로 발전했다. 양극화는 해소되기는커녕 가속이 붙고 있다. 멀쩡하게 취직하고 열심히 벌고 모아도 집 한 채 사기 힘들다. 그런데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지고 있다. 학력별, 직종별, 회사 규모 별 임금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취업 자체가 힘들어서 청년실업률과 취업포기자 지표가 동시에 상승 중이다. 아르바이트 자리는 너무 귀해진 데다, 주휴 수당 지급 회피를 위한 ‘시간 쪼개기’로 팍팍해졌다. 이 와중에 부동산 가격 상승은 여전해서, 일 년 만에 수억 원씩 오른 아파트도 있다. 이 정도 되면 돈을 모아 집을 사겠다는 쓸모없는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어차피 포기니까.

 

아니다.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젊은이들이 서점에 몰리고 있다. 이들은 『서울이 아니어도 오를 곳은 오른다』(알에이치코리아)는 것을 믿고, 『오를 지역만 짚어주는 부동산 투자 전략』(위즈덤하우스)을 마스터해 누구도 손을 잡아주지 않는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살아 보겠다는 세속적 희망의 돌파구를 만들어보려 한다. 고용, 급여, 연금이 모두 불안한 시대, 부동산이나 주식과 같은 비급여 소득에 의한 안정된 인생의 보장은 모든 이의 꿈이다. 부동산으로 돈 벌던 시절은 오래전 끝났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고 있던 젊은이들이 각성했다. 2018년은 중장년층이 주로 소비하던 부동산 관련 서적에 젊은이들이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한 기념비적인 해다.

 

사회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서점가의 반응도 양극화되고 있다. 물질적 재화 취득 비법 책들과 함께 영혼에 생채기가 나지 않게 단단히 간수하는 방법들도 소개되고 있다. ‘힐링’, ‘소확행’, ‘워라벨’과 같은 트렌드들이다. 모두 ‘우리네 인생, 단 한 번뿐인 것을’을 의미하는 ‘욜로(You Only Live Once)’에 담을 수 있겠다. 현실도피와는 궤가 다르다. 중·고등학교 때, 하고 싶은 건 뭐든 대학만 들어가면 다 할 수 있으니 유예하라는 말을 믿었던 순진한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멘붕’을 겪고서 되찾은 자기보호 본능과 같은 것이다. 장래는 어차피 밝지 않다. 부모를 원망하고 사회 탓을 해 봐야 회한만 쌓일 뿐이다. 먹고 살기 위해 일은 하되, 스트레스 때문에 암에 걸려 죽지는 말자는 거다. 출판시장의 스테디 트렌드다.

 

논의되고 있는 세 권의 책은 모두 이 트렌드가 만든 베스트셀러다. ‘빨강머리 앤’은 풀리는 일이 없어 엉망이 되어버렸던 시절, 저자가 자기 위로를 통해 동기부여 하는 노하우를 담고 있다. ‘보노보노’는 저자가 후속 에세이집을 통해 대어놓고 웅변하듯,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놀)에 관한 책이다. ‘곰돌이 푸’는 행복의 기준이 사회적으로 결정되어 하향식(top-down)으로 하달되는 것이 아니라, DIY(Do It Yourself) 방식으로 스스로 창조할 수 있다는 ‘소확행’ 실천의 인식론을 담고 있다.

 

욜로 테마의 책은 이미 다양하게 출간되었는데, 이번에는 캐릭터 주도형 기획으로 성공했다. 욜로와 캐릭터는 궁합이 잘 맞는 조합이다. 성인 여성의 귀여운 캐릭터 사랑은 한국과 중화권 등 동아시아에서 도드라진 현상이다. 특히 일본인들의 ‘카와이(可愛い ; 귀여운) 캐릭터’ 사랑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관련 심리학 연구도 심심찮게 수행되었다. “귀여운 캐릭터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나요”와 같은 말이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생물학적 사실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시도다.

 

버지니아 대학의 셔먼 교수팀은 「귀여운 이미지를 보면 주의 행동력이 증가된다(Viewing Cute Images Increases Behavioral Carefulness)」라는 연구를 통해, 귀여운 동물의 이미지를 본 피실험자들이 사나운 동물 이미지를 본 피실험자 군에 비해 더욱 섬세한 미세운동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보고했다. 히로시마 대학교의 히로시 니토노 교수팀도 「귀여움의 힘(The Power of Kawaii)」 연구에서 같은 결론을 얻었다. 이러한 행동심리학 연구는 귀엽다는 느낌이 작고 나약한 아이를 돌보고자 하는 인간의 종 보존 능력과 관련 있음을 보여준다. 짐승들은 주로 자신보다 작은 상대를 표적으로 삼는다. 성체들이 같은 종의 어린 짐승을 죽이는 일은 야생에서 흔하다. 나보다 약하고 작은 상대를 공격해 성공률을 높이는 것은 야수적인 목적합리성의 실천이라 볼 수 있다. 사회·정치·경제적 권력을 바탕으로 ‘갑질’과 추상같은 꾸지람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인간은 다른 본성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남의 자식이라도, 어린 것들이 위기에 처하면 몸을 던져 보호하기도 한다. 종을 보존해온 위대한 방식이다. 귀여움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심리적 질료다. 독자들은 귀여운 캐릭터에게 수동적으로 위로를 구하지 않는다. 부양본능의 대리 충족을 통해 스스로 에너지를 만드는 창조활동을 하는 것이다. 사회가 야수와 같은 상태에 빠질수록 귀여운 것들을 돌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은 더욱 강해진다.

 

여기에 캐릭터가 가진 색채도 한 몫을 차지한다. 샌더(C.G. Sander) 교수는 유명한 색채심리학 연구에서 따듯한 색 계열이 우울함을 덜어주며, 특히 노란색은 분석적인 이성(reason)보다는 통찰(perception)의 색으로서, 마음을 자극하고 활성화시킨다고 주장했다. 곰돌이 푸와 같은 캐릭터다.

 


<그림 2>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알에이치코리아)


〈그림 2〉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알에이치코리아)

 

앨런 밀른(Alan Alexander Milne)이 저자이지만,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는 원작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캐릭터만 빌려왔다. 결말을 궁금하게 만드는 선형적 내러티브는 전혀 없다.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면 행복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식의 문구들이 난색 계열의 둥그스름한 곰돌이 그림과 편안하게 어우러져 있을 뿐이다. 글은 아이를 달래고 조언하는 경어체다. 곰돌이 캐릭터는 독자들에게 글의 내용을 숙지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그 내용을 알려달라고 말하는 듯하다. 욜로 트렌드를 캐릭터에 담아보자는 출판사의 전략이 시장에서 통했다.

 

 

 

3. 여성

 

지금의 캐릭터 열풍은 성인 여성이 주도하는 트렌드다. 열풍을 주도하는 서적들은 외국작품을 한국의 여성 작가가 재해석한 경우가 많다. 그중 ‘보노보노’는, 저자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원작 자체가 성인 여성 취향의 욜로적 특성이 있다.

 


<그림 3>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놀)


〈그림 3〉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놀)

 

1980년대 중반 이가라시 미키오(いがらしみきお)의 네 컷 만화에서 첫선을 보인 보노보노는 해달을 귀엽게 의인화한 캐릭터다. 일본에서도 드물게 롱런한 사례다. 그러나 포켓몬이나 헬로키티 같은 캐릭터와는 결이 많이 다르다. 일본과 한국에서만 사랑받은 독특한 케이스다. 앞서 언급한 색채심리학적으로 보아도, 차가운 색 계열의 보노보노는 따사롭게 보듬어주는 매력이 없다. 이 캐릭터는 지금의 한국 사회와 오버랩되는 일본의 장기불황기 성인 여성들에게 위로의 아이콘이 되어 살아남았다. 보노보노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으로, 경제 버블시기와 정확하게 겹친다.

 

환율 조정, 경기부양책 등으로 주식시장은 과열되었고, ‘도쿄 23개 구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농담이 계산식과 함께 나돌 만큼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 시중에 돈이 엄청나게 풀려 과소비를 부추겼다. 세계 최대 나이트클럽들이 밤새 영업이 되었고, 중심가 술집의 여성도우미에게 팁으로 자동차와 아파트를 사주며 부를 과시하는 것이 유행되기도 했다. 욕망이 거품처럼 부풀어 올라 재화의 가치에 대한 감을 상실할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급격한 금리 인상과 과도한 규제 등 여러 요인이 겹치며 버블이 붕괴되었다. 빚을 내어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했던 많은 이들이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강한 자만 살아남고, 살아남기 위해 강한 자에게 잘 보여야 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버블 안에 있으면 누구나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버블이 한번 발생하면 경제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일본 경제백서의 문구다. 엄청난 대가는 전 국민이 치러야 했지만, 여성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더욱 혹독했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다수 여성은 놀이문화 정도로 버블경제를 즐겼을 뿐이다. 그 시기에도 취업, 급여, 복지의 평등성 개선이나 재산형성과 같은 구체적 혜택을 본 것은 아니다.

 

버블붕괴에 의한 경제적 어려움은 여성들에게 노동을 강요했다. 직장에서 맞닥뜨린 일본 사회는 여전히 치열한 경쟁과 관료주의, 성차별, 학력차별, 과도한 노동, 갑질, 가부장적 규율과 상명하복 문화에 찌든 곳이었다. 물질만능주의와 외모지상주의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근심은 빚처럼 쌓이고 위로는 수익만큼 부족했다. 여성들은 정신적 만성피로에 시달렸다. 매일 벼랑 끝에 서서 뛰어내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생각해 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내몰려도, 온 세상은 나 몰라라 했다.

 

보노보노가 이들의 눈에 들었다. 해달인 보노보노는 기본적으로 아등바등 헤엄치지 않고 ‘둥둥 떠다니는’ 캐릭터다. ‘딱! 딱!’ 조개나 깨어 먹고 사니 태평하게 보인다. 그런데 보노보노는 걱정을 사서하는 성격이다. 하지 않아도 될 걱정에 시름이 많은 주인공은 화를 내거나 감정표현 하는 것에 능숙하지 못하다. 착하고 여려서 상처를 쉽게 받는다. 엄마를 일찍 여의여서, 어린 것은 엄마의 위로를 대신할 것을 찾거나, 혹은 엄마 같은 위로를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 자기 치유가 일상의 최대 과제다. 쓸데없는 걱정에 어쩔 줄 몰라 바들바들 떨지만, 위안거리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어 금방 다시 행복해진다.

 

이야기는 정적이고, 캐릭터의 생김새는 단순하며, 정성스레 그린 애니메이션과 달리 원작만화는 러프 스케치에 가깝다. 동작도 작고 느리다. 배경도 자세히 그리지 않고 생략한다. 보노보노의 성격이나 만화원작의 스토리 전개는 똑같이 여유 있고, 단순하고, 느리고, 어딘가 어리숙한 데다,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는 의미에서 엉뚱하다. 이런 ‘슬로우 라이프, 스몰 이모션’은 야수 같은 사회에서 정신줄을 놓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애쓰던 많은 성인 여성들로부터 깊은 공감을 샀다.

 

등장 캐릭터들은 경쟁사회와 버블경제에서 살아남지 못한 낙오자들, 사회적 약자, 루저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철학의 바닷가에서 달관하는 법을 익혀가는 ‘행복 도사’들이다. 작가는 잠언이나 경구 비슷한 대사들로 인생을 관조한다. 기존의 관념들을 비틀고 새롭게 보는 시각을 제시한다. “살아있는 한 곤란하게 되어 있어. 살아있는 한 무조건 곤란해. 곤란하지 않게 사는 방법 따윈 결코 없어. 그리고 곤란한 일은 결국 끝나게 돼 있어. 어때? 이제 좀 안심하고 곤란해 할 수 있겠지?”

 

이런 보노보노의 특징이 현재의 한국 사회 여성들에게도 어필했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의 저자가 캐릭터에 새삼스레 끌린 것도 “우리는 모두 보노보노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대단한 꿈 없이도 묵묵히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 큰 재미보다는 편안함을 선호하는 사람들. 어렸을 적 기대에는 못 미치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좌절하기만 하지는 않는 사람들… 우리는 다 그런 사람들 아닌가.” 장기불황기 일본의 성인 여성들에게서 꾸준히 사랑받은 캐릭터의 느리고 피안적인 매력이 욜로의 시대, 한국 여성들에게도 사랑받고 있다.

 

 

 

4. 추억

 

캐릭터 열풍을 주도하는 저서는 모두 오래된 작품이 원작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는 익숙한 작품들이다. 과거 ‘파페포포’, ‘스노우 캣’과 달리, 성인 여성 독자가 주도하는 지금의 욜로 캐릭터 에세이 시장에서 새로운 캐릭터는 성공하기 힘든 것 같다. 배경과 스토리를 잘 알고, 유년 시절 독서에 얽힌 추억들이 책장을 넘기는 감촉 속에서 되살아나는 옛날 캐릭터들이 느리고 편안한 매력으로 시장을 장악했다. 일련의 “아날로그의 반격” 현상의 연장선에서 살펴볼 수도 있겠다.

 


<그림 4>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아르테)


〈그림 4〉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아르테)

 

빨강머리 앤은 소설의 등장인물이지 보노보노와 같은 캐릭터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의 앤은 유명 연출가 다카하타 이사오의 TV 시리즈 작품에 등장한 애니메이션 캐릭터다. TV 장면 캡처들이 책에 한 가득 실려 있다. 앤은 의인화된 콤플렉스이자 ‘행복해지기 선수’다. 책은 긍정의 힘이 발휘되는 장면을 통해 위로와 세태비판을 아우르는 에세이 테마로 옮겨가며 글을 전개한다. 작가는 빨강머리 앤을 박제된 옛날 텔레비전에서 꺼내 되살려놓았고, 독자들은 자신들의 추억, 혹은 저자의 추억을 통한 대리추억 속의 앤에게 열렬히 반응하고 있다.

 

저자는 인간관계, 직장, 작가의 꿈 등 전반적인 삶에서 실패하고 무기력에 빠진 시기, 이 50부작 애니메이션을 대사를 적으며 곱씹어 보았고, 접었던 소설가의 꿈을 다시 펼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책은 자기위로와 동기부여에 관한 것이고, 이 시대의 여성 독자들이 원하던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빨강머리 앤〉 역시 일본의 힘든 시기 애환을 담은 작품이다. 이사오는 1970년대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등 한국에도 반복 소개되었던 세계명작동화 TV 시리즈를 연출했다. 작품은 다분히 전후 일본이 바라보는 서구의 모습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의 친분을 통해 더욱 강화된 이사오의 세계관은 전후 일본의 멜랑콜리를 탈아입구(脱亜入歐)적이면서도 반계몽적인 로망에 담은 것이었다. 가난과 결핍에 시달리던 일본을 유럽에 투사했다. 종전 30년이 지나고 선진국에 재진입한 일본이었지만, 〈은하철도 999〉와 같은 작품에서 보듯, 전쟁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한 우울한 상태였다.

 

이사오의 〈빨강머리 앤〉은 따라서 전 사회적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 몸부림을 담고 있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불행은 극복의 대상이고, 행복은 노력해서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행복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늘 참고 노력해야 한다. 투정은 용납되지 않는다. 어린아이라고 예외는 없다.

 

다카하타 이사오의 앤은 보통의 ‘소녀’가 아니다. 무한한 긍정의 힘으로 무장한 행복 전사다. 지금의 10대들이 동일시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완전히 방전되어, 충전이 아니라 마음의 발전소를 새로 지어야만 했던 시기, 한 여성작가가 불현듯 어릴 적 보았던 〈빨강머리 앤〉을 떠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욜로 트렌드의 주체인 한국의 여성들이 이처럼 ‘쎈’ 캐릭터를 추억 속에서 기꺼이 소환한 것은, 그만큼 현실이 고달프고 그들의 에너지가 방전상태에 가깝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 아닐까. 책 속에 길이 있나니, 이런 시기 출판계 캐릭터 ‘열풍’은 영혼의 터빈을 돌려 삶의 에너지를 만드는 사회적 생산 활동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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