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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1  20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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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이야기]
편집자의 일에 대한 어떤 루머와 고민

 

 

 

이연실(문학동네 편집부 국내5팀장)

 

2021. 5.


 

파주출판도시 대로변 잔디밭에 언젠가부터 기묘한 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다.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있는 이 인물상들은 언뜻 보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같기도 하고, 상체에 팔이 없어서 오스카상 트로피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어쩐지 이 조각상들이 짠해서 출퇴근할 때나 점심시간에 괜히 그 앞으로 지나가다 멈추어 서곤 했다. 이것들이 영락없이 교정보느라 척추와 허리가 아작 나고, 근심 가득한 채 고개를 떨군 편집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이 조각상은 이순복 작가의 ‘Men in pose’라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어쨌거나 편집자의 신체를 빼닮은 이 조각상들은 출판도시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여서 저들끼리 영원히 고뇌하고 있다.

 


조각상 이미지

 


최근 나는 『에세이 만드는 법』이라는 책을 쓰면서 편집자의 즐거움과 기쁨, 이 일의 드넓은 가능성과 영역에 대해서 원 없이 썼다.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편집자들이 편집자라는 직업의 묘미에 대해서 써왔다. 그 가운데서도 나는 1년에 자신이 편집한 책을 100만 부씩 팔아치웠다는 미노와 고스케라는 편집자가 기록한 편집의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편집자는 한 번이라도 대면하면 인생을 격변시켜줄 만한 천재들을 매일 만난다. 때로는 서로 얼굴을 붉히며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전우애도 싹튼다. 독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한 권의 책을 통해 가장 많이 성장하는 사람은 단언컨대 편집자다. 그저 읽기만 하는 사람보다는 직접 만드는 사람에게 저자의 생각이 더 많이 흘러들어가는 까닭이다.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 중인 사람들의 재능을 한데 모아 칵테일처럼 만들어 마신다. 이런 사치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그 결과, 책을 만듦으로써 편집자 자신이 말도 안 될 만큼 성장해간다. 나는 내가 만든 책에 의해 만들어졌다.
- 미노와 고스케, 『미치지 않고서야』(구수영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나는 이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편집자들은 독자들에게 즐거움과 보람을 선사하고자 그토록 노력하지만 미안하게도,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편집자만큼 즐거운 독자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때론 작가보다 행복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는데, 편집과 제작 과정에서 ‘책’이라는 예술품의 다면적인 즐거움과 궁극의 행복을 온전히 알고, 느끼고, 간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집의 즐거움과 묘미에 대한 얘기는 역시 세상에 너무나 많고, 편집자에게 필요한 것, 편집자의 어려움에 대한 얘기는 너무 적다고 느낀다. 나는 여기에 편집자들의 어깨와 허리를 구부정하게 만드는 편견과 시선, 그리고 내가 요즘 편집자의 일에 대해 고민하는 것에 대해 써보려 한다.

 

 

 

편집자는 ‘미완의 작가’가 아니다, 편집자는 편집자다

 

내가 바로잡고 싶은 편집자에 관한 세간의 루머 하나가 있다. 과거에 책을 좋아하지만 ‘작가 되기’에 끝내 실패한 자들이 출판편집자가 된다는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평론가나 편집자 같은 직종은 작가가 되고 싶지만 여러 이유로 인해 되지 못한 사람들이 책 주변부에 남아 일하는 것이라는 편견 어린 시선들이 있었다. 편집자는 결국 어떤 식으로든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사실 나 자신이 이런 가설의 증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때까지 내내 소설가가 꿈이었고, 대학 졸업학기 무렵 일단 돈을 벌기 위해 출판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편집일을 15년쯤 쭉 하다 보니 결국 내 이름으로 쓴 작은 책도 한 권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편집자와 작가는 주종관계나 상하관계가 아니고, 편집자가 작가로 나아가는 도정에 있는 중간단계의 업도 아니라고 본다. 책과 텍스트라는 같은 결과물을 다루지만, 편집자는 명백히 작가와는 다른 카테고리에 속하는 직종인 것이다.

 

편집자로 일하는 동안 나는 “그래도 글 쓰고 싶지 않아요?”, “아무리 그 일이 재밌어도 내 게 아니잖아요. 내 이름으로 쓴 책 갖고 싶지요?”라며 아련하고 촉촉한 시선으로 내 업을 보는 사람들을 종종 만났다. 이때마다 나는 “오랜 시간 작가를 꿈꾸며 살아왔지만 출판사에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그 꿈이 잊히더라”라고 답하곤 했다. 괜한 허세가 아니다. 내가 보고 싶은 책을 나보다 더 잘 쓸 수 있는 작가에게 의뢰하면 척척 나오는 이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창작의 고통 없이도 내 마음에 쏙 드는 책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으니 이건 ‘천하의 꿀잡’이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나의 일에서 ‘이루지 못한 자의 결핍’을 집요하게 찾으려 하는 걸까?

 

내가 이런 시선에 불만을 갖는 이유는 편집자를 ‘미완의 작가’, ‘불운한 작가 지망생’으로 보는 시선이 책 만드는 과정에서도 어떤 착각과 불평등을 빚어내곤 하기 때문이다. 가끔씩 내 원고는 ‘손대지 말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작가를 만난다. 편집자를 전문성과 독자성을 가진 업이 아니라 ‘작가 되기’에 실패한 회사원으로 볼 때, 편집자의 교정교열 노동은 ‘작가의 찬란한 원고’에 괜히 손대는 시시껄렁한 업으로 추락한다.

 

얼마 전 이 업계에서 편집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씁쓸한 말을 들었다. 책 만드는 과정에서 본업이 따로 있는 어떤 작가들은 그 본업에 준해 편집자를 바라보는데, ‘연예인은 책 낼 때 편집자를 매니저로 보고, 교수는 편집자를 조교로 보며, 기업인은 편집자를 비서로 본다’는 것이다.

 

물론 편집자는 한 권의 책을 만들면서 그 책과 작가의 매니저이자 비서이자 조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기도 한다. 한 권의 책을 책임지고 작가와 동행하는 동안 기꺼이 그 모든 것이 되어도 좋다. 그러나 그 이전에, 무엇보다 편집자이다. 원고가 책이 되는 과정을 총괄적으로 책임지는 북디렉터로서의 편집자에 대한 이해 없이, 편집자라는 전문직에 대한 존중 없이, 그저 한 작가의 매니저나 조교나 비서가 되길 강요받을 때, 편집자들의 허리는 굽고, 그렇게 만들어진 책도 금세 빛이 바랜다.

 

 

 

편집자 정년 ‘마흔 즈음에’

 

편집자만큼 정년이 박한 직업도 없다. 흔히 출판사에 소속된 실무편집자의 정년은 마흔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마흔에 다가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나를 소개할 때 “장래희망은 백발이 돼서도 교정지가 든 에코백을 메고 저자 미팅 현장과 서점을 누비는 ‘현직’ 할머니 편집자”라고 소개하곤 했다. 나의 꿈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한국의 편집자들은 40대 무렵에는 결정해야 한다. 기성 출판사의 관리자로서 팀장이나 편집장이 되어 종종 기획하고 오케이 교정을 보되 대부분의 일과 시간에는 후배 편집자와 조직을 관리하고 매출을 책임지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온전히 독립하여 내 회사를 차려 사장이 될 것인가. 대략 30대 중후반에 선임편집자가 되어 이제 일은 손에 익고, 기획편집의 맛도 제대로 느껴보려는 찰나인데, 출판 조직 내에서는 결코 재미없는 상황들이 기다린다. 선임 혹은 중견 편집자들에게는 매출 압박과 조직 갱신, 대박 도서 기획의 요구가 끊임없이 따라붙는다. 편집자의 경력과 경험과 성찰은 대체로 존중받지 못하고, 예측하기 힘든 출판시장에서 몇 번의 정체나 실패는 대개 편집자의 능력 부족에 따른 결과로 돌려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때 중견 편집자들은 대체로 조직을 탈출하는 길을 택한다. 출판사 내에서 중견 편집자를 넘어 노(老) 편집자들이 끝까지 생존하는 경우가 드문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물론 해마다 단군 이래 최악의 불경기를 기록하는 출판업계에서 중견 편집자들은 회사의 생존과 독자의 발견을 위해 온 힘을 기울여야 할 책임이 있다. 한국에서 비교적 큰 종합출판사라 할지라도 매출규모는 겨우 중소기업에 불과하므로, 한 해 잘됐다고 해서 과감한 시도와 투자, 조직 확장을 시도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해마다 매출목표는 연봉 인상분을 훌쩍 뛰어넘어 설정되는 와중에, 직원들을 위한 복지와 지원, 재투자에는 너무도 소극적인 조직에서 편집자들은 소진되게 마련이다. 편집자들에게는 해마다 에디터십과 매출 모두의 ‘성장’을 요구하면서, 회사와 조직은 편집자들의 업무 환경을 위해 전혀 ‘성장’하고 투자하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 편집자들은 늙어감과 동시에 낡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이 혹독한 출판업계에서 내가 과연 ‘현직’ 할머니 편집자로서 잘 늙어갈 수 있을지, 오래 일할 수 있을지 실험해볼 작정이다. 더 나이가 들어도 내 업무 내역에서 관리자나 사장의 직무보다 ‘현직’ 편집자의 업무 비중이 훨씬 더 높길 바란다. 아직 길은 잘 보이지 않고, 여전히 고민은 현재진행형이지만, 관리자나 사장이 되는 양단 간의 선택 외에도 이 재미있는 편집자라는 일을 오래 안정적으로 즐겁게 이어나갈 수 있는 제3의 길이 있길 바란다.

 

다시, 파주출판도시의 잔디밭에서 허리 굽은 조각상들을 바라본다. 아무래도 편집자들을 위한 상이 만들어지고 트로피를 제작한다면, 저 인물상을 본떠서 오스카상 트로피처럼 제작해도 좋겠다. 나는 내 주변의 편집자들에게 상을 주고 싶다. 출판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대표님들이나 편집장님들께 주어지는 거창하고 묵직하고 유서 깊고 대단한 상 말고, 갓 입사해 폭발적인 열정을 보이는 3년 차 이하의 편집자들에게 올해의 신인 편집자상도 주고, 한창 활약하는 경력 편집자들에게도 기획상, 편집상, 분야별 편집상을 한없이 수여하고 싶다.

 

실무 편집자들은 자신이 만든 책이 칭찬받고 상 타고 잘 팔릴 수 있도록 사력을 다하지만, 막상 자신들은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다. 작가도 모르고 독자도 모를지라도, 나는 우리 업계에서나마 빛나는 젊은 편집자들에게, 또 직급이 높거나 네임드 편집자는 아닐지라도 오래 우직하게 견뎌낸 나이 든 편집자들에게, 정말 대단하다고 잘했다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문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끼리라도 그들을 주목하고, 상도 주고, 번아웃되기 전에 충전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하고 싶다. 그리하여 남들은 사양산업이라 부르는 이 출판업계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내가 성장하고 빛을 발휘할 기회가 아직은 이 업에 충만하다는 것을, 좌절하여 너무 지치기 전에, 나가떨어지기 전에 격려받고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트로피 모양은 역시 출판도시의 저 허리 굽은 동상을 닮은 게 좋겠지. 허리와 어깨를 굽히고 몸을 낮춰 교정 보고 생각하고, 이 업의 가장 밑바닥부터 끝없이 고뇌하는 것이 우리 편집자의 본질이고 업일 테니까.

이연실

 

이연실(문학동네 편집부 국내5팀장)

15년 차 에세이 편집자. 문학동네 편집팀장. 첫 출판사인 문학동네에서 쭉 일하며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김이나의 『김이나의 작사법』,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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