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1 2024. 01-02.
2023년, 우리의 마음이 지나간 자리
신유경(국회도서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 담당)
2024.01-02.
필자가 대출·반납 창구에서 시민들과 직접 대면하면서 참고봉사(參考奉仕, 이용자의 질문이나 요구에 대한 해답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거나,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를 한 기간은 공공도서관에서 1년 남짓, 국회도서관에서도 고작 3년에 지나지 않아, 선뜻 이 주제에 대해 말을 얹기가 조심스럽다. ‘2023년, 도서관이 사랑한 책들’, 그중에서도 ‘일반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빌려 간 책들 - 전체 연령대를 중심으로’라니. 필자가 4년여의 시간 동안 만났던 시민들을 ‘일반 시민’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용자의 ‘연령대’라는 건 도서관의 관종(館種)과 지리적 위치, 심지어 날씨라는 변수에도 영향을 받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종속변수라, 단언컨대 세상 그 어떤 도서관에서도 ‘전체 연령대’의 이용자를 만날 수 있는 사서는 없을 거라 장담한다.
그럼에도, 해당 주제는 한 번쯤 고찰하고 싶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주제이기는 하다. 사서로서의 직업적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입구 옆 데스크에 앉아 이용자들이 대출·반납하는 책들을 보다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읽히는 마음의 자리가 있고, 흩어진 자리들을 공통 키워드로 유형화하거나 그 키워드를 사회 현상과 어떻게든 연결 지어보고 싶은 쓸데없는 탐구욕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과학적 근거가 빈약한 ‘탐정 놀이’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본론에 앞서, 필자가 일하는 국회도서관의 이용 대상은 다른 도서관에 비해 한정적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특히나 필자가 근무하는 자료실은 유난히 노년층의 이용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국회도서관의 도서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다음과 같다.
-
전·현직 국회의원 및 국회 소속 공무원
-
대학생 또는 18세 이상인 자
-
정보이용·조사 등을 위해 도서관 소장 자료가 필요하다고 국회도서관장이 인정하는 12세 이상 17세 이하의 청소년
(국회도서관법 제2조 제2항, 국회도서관 운영에 관한 규칙 제6조)
신분증 없이 무작정 방문한다고 입장할 수 없고, 12세 미만 아동은 서비스 대상이 아니다. 애초에 국회도서관은 국회의 입법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기관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에게는 문턱이 높은 편이다. 이 점을 감안하고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2023년 한 해 동안 국회도서관 이용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 최다 대출 도서 상위 50권은 다음과 같다.
국회도서관 최다 대출 도서 1~3순위 - 『불편한 편의점』, 『공학도의 논리로 읽은 노자』, 『역행자』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국회도서관 최다 대출 도서 Best 50의 결과는 필자의 예상을 한참이나 비껴간 것이었다. 가장 의외의 결과는, 필자가 근무하는 곳이 인문·자연과학자료실임을 감안하더라도, 사회과학 분야, 특히 재테크/투자나 부자들의 마인드셋(mindset)을 다룬 ‘성공학’ 관련 책들이 상위에 랭크되었다는 것이다. 2023년 한 해 동안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의 장기화로 고통 받은 ‘파이어(FIRE) 족’들이 여전히 주식/펀드, 부동산/경매 관련 책을 열심히 빌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경제 상황이 좋든 나쁘든 부(富)에 대한 관심과 열망은 트렌드와 상관없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존버(끝까지 버티기)’는 승리할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정신 건강 문제의 대두 – 철학의 위안
사실 필자가 가장 기대했던 결과는 정신 건강 문제나 마음 치유 등을 다룬 심리학 분야의 책들이 상위에 랭크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해당 주제는 이미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이른바 ‘코로나 블루’라는 집단적 스트레스 상황을 타파하고자 하는 독서 행태로 감지된 바 있었다. 그 시기 국회도서관의 최다 대출 도서들도 SF(과학소설), 메타버스(metaverse), 마음 치유를 다룬 심리/상담 관련 책들이어서, 답답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사람들의 절절한 외침이 느껴질 정도였다. 팬데믹이 전면 해제되었다고 해서 격리되었던 문제들이 일순간 해결되는 건 아니어서, 필자는 오히려 포스트 코로나 시기에 정신 건강 문제가 사회 문제로 표면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필자의 예상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것으로 나타났다. 불안과 우울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심리학보다는 철학으로 우회하는 움직임이 확인된 것이다. 특히 필자가 근무하는 자료실에서 요즘 매일같이 피부로 느끼는 것은, 문제적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의 식을 줄 모르는 인기다. 생전에는 인기와 담쌓고 고독과 친했던 이 괴팍한 철학자가 200년 뒤 새삼스럽게 환영받을 줄 누가 알았을까?
고전은 영원하다 – 옛 성현(聖賢)에 기댐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가장 눈에 띄는 화두가 있다면 아무래도 무서운 속도로 급성장하고 있는 챗GPT(ChatGPT)를 위시한 생성형 AI의 등장일 것이다. 하지만 그 흐름은 아직까지 국회도서관의 최다 대출 도서에 반영되지 않은 것 같다. 그 대신 이미 도래한 미래를 앞당기고 있는 최첨단 기술에 대한 반동이랄까, 필자는 왠지 뜬금없는 ‘공자 왈(曰), 맹자 왈(曰)’ 하는 중국 고전의 인기가 그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팬데믹, 전쟁 등 세계사적 위기 때마다 인류는 文·史·哲(문·사·철)로 대표되는 인문학에서 답을 찾았고, AI의 공습 역시 인간에 대한 위협으로 해석돼 ‘인간다움’이나 ‘죽음’에 대한 고찰 같은 인문학적 물음을 소환하는 것 같다. 모든 것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할수록 역설적으로 수천 년 동안 변치 않아 온 것들이 의미 있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종이책과 마찬가지로, 경전과 옛 성현의 말씀 같은 고전이 여전히 이용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다.
‘잘 늙기(웰 에이징, Well-aging)’ 열풍
필자가 근무하는 자료실 이용자의 평균 연령은 어림잡아 50~60대 정도로 추정되고, 유난히 건강 관리나 노화 방지에 관한 책에 대한 수요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이런 수요가 비단 우리 자료실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라 느끼는 것은, 올 한 해 입수된 신착 자료의 면면을 보다 보면 유난히 ‘역노화’니 ‘노화의 역행’이니, ‘가속 노화’와 같은 이슈를 다룬 책들이 많이 발행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신간들의 서명에서도 유난히 ‘마흔/오십에 읽는’으로 시작하는 제목이 쏟아져 나오는 듯한 일련의 유행을 느낄 때는, 대한민국 경제활동인구의 중위연령이 이제 40~50대로 접어든 것이 아닌가 싶게 급속한 고령화를 실감하게 된다. 백세 시대 건강하게 ‘잘 늙는 법’에 대한 관심은 ‘맨발 걷기’ 열풍과 같은 각종 건강 비법으로 이어져 관련 책들도 올해 들어 이용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 – 관계 맺기의 어려움
‘언택트(untact)’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던 코로나19 팬데믹은 물리적 만남과 접촉을 기본 전제로 하는 관계 맺기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공무원 조직에서조차 재택근무가 전면 도입되고, 회식은 금기시되었으며, ‘혼밥’, ‘혼술’에 대한 시선도 뒤바꾸어 놓았다. 개인 시간과 사생활을 중시하는 MZ세대 성향과 맞물려 ‘사회적 거리 두기’는 관계 맺기의 ‘디폴트(default)’ 방식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2023년 지금의 우리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지난 3년간 적응했던 라이프스타일을 폐기하고, 금세 팬데믹 이전의 생활 방식으로 회귀했다.(마치 동영상 플레이어의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3년 뒤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난 3년의 시간은 망각으로 완전히 무화(無化)시킬 수는 없는 것이어서, 이전의 관계 맺기 방식으로 인해 상처 입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걸 출판 시장과 도서관 이용 행태에서도 느낀다. 사람과 사람이 대면하면서 발생하는 정서적·감정적 충돌, 그로 인한 상처, 기분과 태도의 문제, 자존감 지키기 등 사람들 가운데서 자아를 보호하는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2024년에는 어떤 책들이 이용자들의 사랑을 받을까?
이상 2023년 한 해 동안 국회도서관 이용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50종의 책을 추출하여 그 속에서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어떤 흐름을 파악해 보고자 했지만, 쓸 만한 통찰(insight)을 제공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앞으로 참고봉사 영역에서의 사서의 역할은 ‘마인드 리더(mind reader)’가 아닐까? 제아무리 인공지능이 알고리즘을 통해 개개인의 취향과 기호와 성향을 감쪽같이 알아맞힌다고 해도, 미세한 행간과 뉘앙스를 읽는 인간의 능력을 쉽게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생성형 AI의 발전 속도와 방향은 이제는 불가역적인 그것이 되어버렸지만, 그럴수록 ‘인간다움’에 대한 추구는 더욱 강해질 거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개인적인 관심사에 그칠 수도 있지만, 감히 예측을 해보자면 2024년은 ‘양자과학/기술’의 해가 되지 않을까 점쳐 본다. 과연?
신유경 국회도서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 담당 경력 8년차 사서이다. 책과 사람이 만날 때 생기는 힘을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