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20 2021. 04.
우리는 여전히 길담서원을 열어가고 있다
이재성(길담서원 학예연구실장)
2021. 4.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마치 구렁이처럼 꿈틀대는 공산성에 불이 들어온 것을 보면 ᆢ여기가 바로 공주시입니다. 말하는 것 같다.
처음 공주시에 왔을 때, 공산성은 우리를 사로잡은 제1 풍경이었고 제2 풍경은 원도심의 골목길을 구심점으로 턱턱 놓여있는 중동성당, 충남역사박물관, 공주역사영상관, 황새바위성지, 무령왕릉, 우금치전적지, 박찬호 기념관, 풀꽃문학관 등 역사문화공간이고 제민천이고 금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쁜 것은 멀지않은 곳에 논과 밭이 펼쳐져있어 지나다가 허리 굽혀 땅의 변화를 읽어내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농지가 가까이 있는, 이 역사문화 공간에서 책장을 넘기듯이 산책을 했다. 곡선의 중첩된 레이어들을 들쳐보며 지낸지 1년이 되었다. 공주시 원도심은 봉황산, 일락산, 주미산, 월성산 등 작은 산 아래 골짜기를 따라 마을을 이루고 제민천을 지나 금강 나루터까지 숲으로 들판으로 강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있었다. 그 구석구석을 누리며 공주시의 지형지물을 익혔다.
수신자에서 발신 주체로의 전환
길담서원은 2008년 2월 25일 서울시 종로구 통인동 155번지에서부터 문을 열어가기 시작했고 여전히 ‘열어가고’ 있다. 문자의 시대, 텍스트의 시대에서 영상의 시대, 이미지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전통적인 개념의 동네 책방들이 문을 닫는 시기, 68세의 박성준 선생님은 새로운 개념의 책방을 열기 시작했다. 시대가 혼란스러울수록 다시 책에서, 책을 통해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다.
여기서는 기존에 책방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을 벌였다. 자발적 독서모임, 강연, 원서강독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콰르텟 연주자 키아라를 비롯한 클래식 연주회, 책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책마음샘 음악회, 책방 내에 만든 작은 미술관 전시, 보름에 걷는 모임, 한 글자 청소년인문학교실 일, 몸, 돈, 밥, 집, 품. 힘, 삶 등을 주제로 한 강연과 답사+출판, 춤 모임,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고 강연을 펼치는 백야제, 콜롬비아 몸의 학교의 알바로 선생과 17명의 무용단과 함께 했던 2박3일 당진+수덕사 기행, 책을 읽고 유럽으로 떠난 컨템포러리 아트 기행, 안도다다오의 빛의 교회와 나오시마 그리고 우치다 타츠루 선생이 운영하는 가이후칸 답사 및 세미나, 셀 수 없이 많은 강연 등등. 그렇게 통인동에서 지내다가 이사를 해야 할 시점이 다가왔다.
우리는 이러한 모임들이 즐겁고 보람도 있었지만 무엇인가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문학이 악세사리 같았고 장식품 같았다. 좀 더 근원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춘천, 홍성 등으로 이전을 고려해서 그 지역을 잘 아는 분들과 상의를 했다. 녹색평론이 왜, 대구에서 서울로 왔겠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고민 끝에 종로구 옥인동 19-17번지로 이전했다. 이사한 날 유현주 피아니스트가 책 상자가 여기저기 부려진 가운데 슈베르트 소나타 D891. 1악장을 연주함으로써 신고식을 했다. 피아니스트 유현주는 길담서원에서 처음으로 책방음악회를 열였던 연주자였고 옥인동으로 이사해서 ‘유현주의 피아노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통인동 길담서원 외부
통인동 길담서원, 유현주 피아노독주회
이사를 한 후 우리 몫으로 주어진 빈 대지를 풀꽃나무가 흐드러지고 얼크러진 뜰로 가꾸면서 길담서원에 오가는 사람들의 옷자락에 풀꽃 향기와 빗물을 묻혀주도록 디자인 했다. 주어진 일을 수행해야만 하는 일상적인 몸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서 하는 비일상으로의 전환이 이 정원에서 이루어지기를 꿈꿨다. 한뼘미술관은 넓어졌고 12명 정도가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서당을 만들었으며 편집실도 꾸리고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하고 웬델베리방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강연이 아니라 소규모 공부모임을 중심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삶의 근원으로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는 공부를 하고자 했다. 지자체나 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강의들이 많아졌고 작은 책방들도 다수가 생겨서 좋은 강의가 무료로 진행되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방식을 모색해야하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사람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공부하는 공간이 필요한 시기라 여겼다. 통인동 시절에 했던 다종다양한 실험들이 귀착한 지점이 수신자에서 발신주체로 공부하는 몸의 틀을 전환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러저러한 수다자리에서 한 마디 거들 수 있는 그런 공부가 아니라 삶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공부를 하고자 했다.
사사키 아타루를 국내에 처음 초대하면서 시작한 옥인동 시절은 원서강독과 다양한 독서모임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강연을 대폭 줄이고 글쓰기모임, 수의를 만든다든지, 당호를 짓고 전각을 판다든지, 집짓기 관련답사와 전시, 시즌별 클래식 음악회, 피아노 마스터 클래스, 1년간의 미술학교 과정, 한뼘미술관 신인발굴전시, 시민연극단, 5년간의 청소년과 빨간머리 앤을 영어원서로 읽으면서 하는 감각놀이 등등 장기적인 기획으로 쌍방통행하며 무뎌진 감각을 깨우고 실생활의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스터디 민주주의 실험’을 계속했다. 하지만 여전히 땅에서 멀어져 있다는 불안감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소비자이고 수신자였다. 창작자이며 발신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정신적, 물리적 토대가 튼튼해야 했다.
공간이 넓어져서 수행할 일은 많았지만 우리는 이미 6년간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은 상태였고 정치적인 상황도 좋지 못했다. 기획한 일을 진행할 에너지가 없었고 그 달 그 달 운영하기에 바빴다. 12년간 낸 월세를 계산해보니 3억원이 넘었다. 2008년 당시, 서촌에 집을 사고도 남을 돈이었다. 월세를 마련하는 게 버거웠던 어느 날, 월세를 그만 내기로 했다. 무엇보다 러셀이나 웬델베리, 니체, 슈마허, 이반일리히 등을 읽으면서 더더욱 대지 가까이 가고 싶었다. 6년 전에 움직이려고 하다가 멈칫했던 순간이 지친 몸, 어려워진 운영으로부터 가능해졌다.
2020년 2월 29일 길담서원은 공주시로 이사를 하고 안식년을 갖으면서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다. 2008년 서울시 통인동 시절, 2013년 옥인동 시절을 거쳐 지난해 10월 공주시 봉황동에 자리를 잡고 현재 리노베이션 중이다.
옥인동 길담서원 내부
옥인동 길담서원,청소년과 함께 빨강머리 앤을 영어원서로 읽으며 하는 감각놀이
재구성을 위한 해체의 시간
스위스 쥬라산맥 깊고 깜깜한 침엽수림 아래에서 살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부모님 집을 양지바른 곳에 지어 드리고 싶었다. 아주 단순한 오두막 집 도면을 그려서 어디를 가든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레만 호수가 작은 언덕 위에 포도를 재배하는 농부들이 살던 대지를 만났다. 장갑이 손에 딱 맞는 기분이 들어서 기뻤다고.
우리는 집은 작아도 마당은 넓었으면 했다. 넓은 마당에 큰 나무가 있는 빨간 벽돌 2층에 지하실이 있는 집을 찾아다녔다. 1층은 서원겸 책방, 2층은 북스테이 공간, 지하는 목공실을 할 생각이었고 옥상은 상상력을 무한대로 펼치는 하늘 공간이었다. 그리고 대문쯤에 옛 화장실이 남아있다면 한뼘미술관으로 하고자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집을 찾지 못 했다. 결국 1978년에 지어진 단층 슬라브 주택과 일반주택이 나란히 있는 집을 구했고 직접 리노베이션을 하는 실험을 통해 실체를 파악해 가고 있다. 우선, 집의 상태를 살피면서 너무 낡아서 못 쓰는 부분을 털어내고 집을 둘러싸고 여기저기 박혀있는 대못들을 뽑으며 골조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다가 다친다고 철거업체에 맡기라고 염려를 하는 분들도 많았지만 어르고 만지면서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을 예정이다. 이 집을 수리하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벗들이 찾아와 쉴 수 있는 공간의 역사, 구조, 재료가 무엇이고 어떠한 상태인지 자세하게 만나보고 싶었다. 그렇게 만난 연 후에 이 집과의 관계를 정립해 나가고자 했다.
공주시 봉황동 수리중인 길담서원
사실, 우리가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거친 손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면 이런 실행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건축가에게 이 모든 과정을 맡기고 몸이 아닌 눈으로 볼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이 공간과 대화하고 몸으로 겪으며 1970년대 주택구조와 장식의 시대성을 읽고 있다. 생전 본 적도 없던 빠루라는 도구를 들고 천정의 합판을 뜯기 위해 휘청거리며 버거워하기도 하고 벽지를 하나하나 벗겨내고 청소하고 천정 속이 어떻게 생겼을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상량문이 있을까? 있다면 어떤 서체로 쓰였을까? 설렘과 긴장이 함께 하는 시간이 견딜만하고 즐길만하다. 물론 그러한 시간의 결과물이 썩은 다루끼 천장과 고양이, 쥐 시신의 흔적이라는 게 마음쓰린 일이지만 우리 손으로 낡고 못난 집을 닦아주고 쓸 만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쁘기도 하다. 집을 수리하면서 윌리엄모리스, 존 러스킨, 멈퍼드, 데리다 등의 책을 곁에 두고 하고 있다. 몸을 쓰는 즐거움도 있지만 몸만 쓰는데서 오는 허기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천정을 뜯고, 뜯어낸 것을 다시 활용할 것과 버릴 것으로 분리하는 행위를 해체라고 한다. 천정을 파괴하고 옛 흔적을 지우는 것은 철거destruction겠지만 낡고 보잘 것 없는 집이 먼지 속으로 사라지지 않게 어떻게든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측면에서 재구성을 위한 해체deconstruction라고 할 수 있다. 철거가 부셔서 없애버리는 것이라면 해체는 지금 그대로를 지속할 수 없을 때 다시 세우기 위한 작업이다. 즉, 다른 모습으로 가기위한 차연differance 으로서의 해체이다. 헌 집을 고쳐서 서울에서와는 다른 길담서원을 만드는 것이 그러한 삶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고 앉았는데도 코끝에 흙먼지의 냄새가 달려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을 흔들어서 해체하고 다시 새롭게 세운다는 것은 고통이나 인내를 동반하지 않고는 성사되기 힘든 모양이다.
고도, 공주시에서 놀다
충청남도 공주시 봉황동에서 다시 시작하는 길담서원은 자서전적 도서를 중심으로 하는 책방으로 잡았다. 자서전은 한 사람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가장 쉽게 설명해주는 글이어서 벗들과 함께 읽으며 자기 삶을 성찰할 수 있고 기록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의 발아를 어떠한 방식으로 키워나갈 수 있을지 가늠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공부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도 힘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한뼘미술관, 출판사 길담서원, 좋은 먹을거리와 함께하는 식탁 쎌라께쓰 C'est la Caisse, 북스테이를 구상하고 있다. 우선 책방을 열고 차츰차츰 만들어 갈 것이다.
여기로 이사를 와서 맛있고 좋은 빵이 늘 아쉬웠다. 빠리바게트와 뚜레주르 밖에 없는 동네에 살다보니 서울 가는 길에 빵을 사다가 냉동실에 넣어 두고 구워서 먹었다. 그러다가 완전히 이사를 하고 코로나 19로 움직임에 제한을 받자 우리는 유튜브를 통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독일의 ‘독일빵고모’, 호주의 ’호주가이버’, 캐나다의 ‘꾸움’, 이탈리아의 ‘Buon-a-petitti’의 Gina 할머니ᆢ 등의 가정식 빵과 가정식 쏘스의 비법들을 그렇게 배웠다. 경제의 개념으로 프로들이 만드는 빵, 프로들의 쏘스를 배운 게 아니고 가족을 위한 레시피를 다루는 방식을 배운 것이다. 세상은 이들을 아마추어라고 부른다. 아마추어는 실력이 부족하거나 프로와 견주어 모자란 사람이라기보다는 구체적으로 계량화되지 않고 합리적으로 정립되지 않았지만 몸에 익힌 감각으로 그때그때 마주치는 계절에서, 상황에서 재료를 적절하게 다룰 줄 아는, 즐기는 사람이다. 오래 그 재료를 다뤄서 물성을 잘 알고 다른 재료와 만났을 때의 결과를 미루어 추측하는 예지력이 몸에 밴 사람들이다. 이성적 언어보다는 몸의 감각이 익숙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런 아마추어이자 한 집안의 음식을 책임졌던 이들의 노하우를 배웠고 그것을 기본으로 우리 것을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빵이 쎌라께쓰다. 쎌라케쓰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양한마리가 자고 있는 네모난 상자이다. 우리는 작은 벽돌집에서 좋은 재료로 건강하고 맛있는 빵을 구워 식탁을 공유하고 좋은 책과 만나고자한다.
쎌라께스 기본빵
공주에서 새로 시작하는 길담서원의 자리는 도심에서 조금은 떨어진 시골이었으면 했고 밀농사를 지을 수 있고 자급이 가능한 논과 밭이 있는 공간으로의 이동을 꿈꿨다. 스스로 집을 짓고 먹을거리를 길러내는 농農적인 삶과 인문학을 연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지으며 자기 경험을 통한 메시지를 발화하는 주체로 살고 공동체의 행복을 위한 움직임도 꿈틀댈 수 있다면 바랄게 없다. 그러나 봄이 코앞에 왔는데 우리에겐 아직 씨앗을 묻을 텃밭도 없다. 길담서원을 열어놓고 농지를 찾아 나설 것이다.
길담서원은 늦은 봄부터 다시 문을 열어갈 예정이다. 그러나 그 예정은 얼마나 더 지연될지 모른다. 우리 몸은 육체노동을 했던 몸이 아니어서 긴 시간 노동을 하지 못 하고 다른 일이 생기면 멈춰야 한다. 몸의 리듬에 맞추고 그 때 상황의 흐름에 따르려고 한다. 길담서원은 이렇게 여전히 열어가는 중이다. 이재성(길담서원 학예연구실장) 서울 길담서원에서 학예실장으로 12년간 일하다가 1년간의 안식년을 갖고 공주시 봉황동에서 다시 길담서원을 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저서로『길담서원, 작은 공간의 가능성』(궁리)이 있고, 함께 강의해서 정리한 책으로 『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철수와영희), 『눈, 새로운 발견』(궁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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