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북디자인 리커버 이전과 이후

 

 

황일선(민음사 미술부 부장)

 

2020. 09.

 

 

 

글을 시작하며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몇 해 전부터 이미 출간된 책의 디자인을 바꿔서 한정판이나 에디션 형태로 재출간하는 경우를 보았을 것이다. 이런 리커버 작업은 디자이너에게 즐거운 도전이면서 한편으로는 부담감도 상당하다. 책 내용에는 변화가 없거나, 있어도 일부분이기에 독자 입장에서 디자인을 중요한 요소로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자이너는 가령 표지가 특별하다든지, 읽기 편해졌다든지, 책이 가벼워졌다든지, 장정이 고급스러워졌다든지 등 어떤 방식으로든 이전보다 향상된 책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디자인에 대한 부담감은 크지만, 디자이너 입장에서 좋은 점도 있다. 리커버 도서는 디자인에 포커스가 맞춰지므로 디자이너 의견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도서를 디자인하는 경우에 비해 리커버 도서는 최대한 디자이너의 창작성과 전문성을 존중하는 분위기다. 민음사의 경우, 리커버 도서는 대부분 디자이너의 의도를 최대한 살려서 진행한다.

 

리커버 시장의 확대로 독자는 디자인 충만한(?) 양질의 다양한 북디자인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디자이너에게도 디자인이 판매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출판 리커버 시장의 확대는 실력 있고 잠재력 있는 디자이너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서점이 출간 부수를 일괄 구매해서 소량 한정판으로 판매하기 때문에 관습적인 표지 디자인에서 벗어나는 데 부담이 적을 뿐 아니라 실험적이고 새로운 디자인도 더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독자가 새로운 리커버 도서에 좋은 피드백을 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최근 들어서는 SNS로 실시간 독자 피드백을 받기도 한다. 요즘처럼 출판계에서 디자이너의 역량이 존중받는 시기가 있었을까 싶다.

 

 

 

리커버 이전 ‘표지 갈이’

 

과거에도 절판된 책을 복간하거나, 출간된 지 오래된 스테디셀러 디자인을 새롭게 하는 경우, 또는 저자나 역자의 요청이 있는 경우 등 여러 이유로 ‘표지 갈이’를 해왔다. 디자인을 다시 한다는 측면은 동일하지만 이러한 ‘표지 갈이’는 최근 리커버 도서와 차이가 있다. 과거에는 복간이나 ‘표지 갈이’를 할 때 디자인을 보완하거나 최근 디자인 트렌드를 반영하는 등의 비교적 소극적인 접근을 했었다면, 요즘 리커버 도서는 보다 분명한 판매 목적을 가지고 적극성을 띤다. 또한 리커버 도서는 트렌드와 이슈를 반영한 기획물이기 때문에 도서 선정과 상품 구성, 디자이너 선정 등 출판 전반에 걸친 전문적인 포지셔닝이 필요하게 되었다. 서점과 출판사가 서로 기획안을 제안하고 타겟팅을 세분화하며 의견을 주고받는다.

 

리커버를 하면서 최초 디자인을 외부와 논의하는 일은 예민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디자인 시안이 만들어지면 서점과 의견을 교환하는 일이 이전에 비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출판사에서 디자인 방향을 결정하던 것이 이제는 서점과 독자의 의견을 좀 더 반영하는 방향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간혹 서점 측과 디자이너의 의견이 대립하여 기획이 취소되는 일도 있는데, 서로에게 큰 손실이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과 『제인 에어』

 

『셰익스피어 4대 비극』과 『제인 에어』 특별판(디자인: 황일선)

 

내게 있어 리커버의 시작은 민음사와 교보문고가 단독 프로모션으로 진행했던 2016년 세계 책의 날 기념 민음사 브랜드전이었다. 민음사와 교보문고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 『셰익스피어 4대 비극』과 『제인 에어』를 새로운 디자인과 장정으로 제작해 판매했었다.

 

리커버 기획은 대체로 마케팅부에서 의뢰한다. 2016년도는 셰익스피어 사망 400주년임과 동시에 샬럿 브론테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였는데, 마케팅 담당자는 이를 기념해 한정판을 교보문고 단독으로 기획했으니 잘 부탁한다고 했다. 물론 급한 일정에 대해 미안해했다. 예전부터 새롭고 참신한 기획을 시도하던 마케터였는데, 일정이 급한 것을 제외하면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작업을 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세계문학전집의 첫 특별판이라는 것과 이미 출판되고 많이 알려진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디자인해야 할 것인가였다. 후자처럼 내용을 우선시한다면 전집 디자인과는 다른 새로운 포맷이 필요했으나 그보다는 세계문학전집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발전시켜 독자에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작 일정이 넉넉하지 않아 본문 디자인과 판형을 손보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지만, 고급스러운 장정과 마감으로 보완했다. 싸발이 용지는 비용 때문에 많이 사용하지 못하는 직물 크로스를 사용했고, 자켓 용지도 수입지에 후가공을 입혔다.

 

출간 이후 본문 디자인에 대한 아쉬운 피드백도 많았으나, 디자인과 장정에 대한 반응이 좋았기에 조기 품절되었다. 특히 고전을 모던하게 재해석 한 부분이 특별해 보이며 고급스럽다는 피드백이 많았다. 아마도 이 기획이 최근까지 폭발적으로 성장한 북디자인 리커버의 시작점이 되었던 것 같다. 이후 많은 리커버 작업의뢰가 있었고 나름 성공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만과 편견』, 『폭풍의 언덕』, 『자기만의 방』 키이스(KEITH) 에디션

 

키이스 에디션(디자인: 황일선)

 

2017년 봄, 민음사는 키이스(KEITH)와 콜라보한 특별한 디자인 에디션을 알라딘을 통해 선보였다. 세계문학전집 중 『오만과 편견』, 『폭풍의 언덕』, 『자기만의 방』을 키이스의 광고 이미지와 콜라보레이션 한 것이다. 키이스는 영국 전통 패션브랜드이며, 세계문학전집과의 결합은 꽤 신선했다. 세계문학전집 판형과 디자인을 유지하면서 키이스의 패션 광고 이미지를 표지에 전면적으로 사용했다. 이에 대한 시장 반응도 궁금했다. 여성 독자는 키이스라는 브랜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여성 독자에게 민음사가 보내는 메시지였는데 생각한 것보다 책 반응이 뜨거웠고, 세 달 동안 1만 3,000부가 팔렸다. 영국 대표 여성 작가의 문학적 감수성이 감성적 사진에 담긴 영국적 패션 이미지와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사실 마케팅부에서 기획안을 보여줬을 때는 표지에 광고 이미지를 그대로 노출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다. 서로 다른 장르의 결합에서 오는 이질감과 제한적인 디자인까지 여러 가지로 난감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꽤 참신하고 좋은 기획이었던 것 같다. 최근까지 많은 리커버 에디션이 있었지만, 키이스 에디션처럼 다른 장르 매체와의 콜라보레이션 작업이 없는 것은 아쉽다. 책 한 권의 표지를 리커버하기 위해서는 원저작권자의 허락, 계약, 콜라보레이션이 이루어지는 매체의 요구사항 등을 동시에 해결해야 하기에 쉽지 않은 것 같다.

 

 

 

『노르웨이의 숲』 30주년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

 

『노르웨이의 숲』 특별합본판(좌), 특별합본판과 일반판(우)(디자인: 황일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특별합본판과 케이스(좌), 『태엽감는 새 연대기』 특별합본판과 케이스(우) (디자인: 황일선)

 

앞서 말한 리커버 도서가 가능성을 확인했다면, 『노르웨이의 숲』 30주년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은 리커버 도서로써 시장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도서 중 하나이다. 이 책은 1987년 초판본을 재해석해 디자인했다. 초판본은 두 권으로 분권되어 있는데 각각 녹색과 빨간색이다. 한국판 리미티드 에디션은 녹색과 빨간색 사이에 금색 경계를 넣어서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경계와 중첩의 의미를 넣었다. 자켓에는 고급 트레싱지에 금색 박을 씌워 회상하는 느낌을 전달하고자 했다. 물론 크리스마스 시즌에 잘 어울리는 색감이라는 것도 고려했다. 출간된 지도 오래되었고 다른 디자인의 책이 많아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생각보다 시장반응이 좋았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초판이 금세 소진되었고 그해 3만 부가 팔렸다.

 

이 책의 성공 이후에 리커버 디자인 의뢰가 많아지다 보니 몇 가지 어려운 점도 생겼다. 편집부 출간 계획에 있던 책에 더해 마케팅부에서 추가로 요청하는 디자인이 많아지다 보니 업무에 부담이 되었다. 세계문학 고전 류는 이미 잘 알려진 멋진 디자인이 많은 데다 타 출판사에서도 경쟁적으로 리커버를 하고 있기에 작업적인 부담감도 커졌다. 시간은 줄어드는데 경쟁은 치열해져서 리커버 작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마냥 즐거운 마음으로 디자인하기는 어렵게 된 것 같다.

 

리커버되는 책 종류가 많아지다 보니 디자인부 내에서 작가별로 디자인 담당자를 두고 있다. 디자이너가 좋아하는 작가도 있고 디자이너의 스타일에 잘 어울리는 작가도 있기에 작가별로 디자이너를 포지셔닝 해 두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담당인데 『노르웨이의 숲』 한정 특별판, 보급판, 『태엽감는 새 연대기』 한정 특별판 보급판1, 2, 3, 최근에 나온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한정 특별판, 보급판 1, 2를 연작으로 작업했다. 한 작가를 한 디자이너가 집중에서 들여다보기 때문에 작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뿐 아니라 디자인의 일관성과 지속성을 꾀할 수 있고, 작업의 질도 점차 향상될 것을 기대해 볼 수 있다.

 

 

 

동네서점 에디션

 

동네서점 에디션 『무진기행』 외(디자인: 최정은)

 

2017년 민음사는 전국 동네서점 130여 곳에서만 판매하는 쏜살문고 동네서점 에디션을 보였다. 바로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다. 시리즈 론칭 이후 꾸준히 팬덤이 형성되고 있는 쏜살문고에 디자이너가 직접 그린 재미있는 일러스트를 넣었다. 동네서점 최초의 시도인 만큼 큰 기대는 없었는데 반응은 뜨거웠다. 2,000세트가 선주문으로 출고되고 서점마다 2~3일 만에 완판됐다. 판매가 검증되다 보니 이후 동네서점만을 위한 활발한 리커버 기획물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북디자인 리커버가 대형서점 위주로 기획되던 상황에서 작은 동네서점까지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출판 덕후들이 많이 찾는 동네서점은 좀 더 과감하고 참신한 작업을 하기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동네서점은 디자인 브랜딩이 잘되어 있어 소량이라도 서점에 특화된 책이 만들어지면 꽤 신선할 것 같다. 실력 있는 디자이너가 많은 만큼 동네서점에서 많은 디자이너와 리커버를 기획할 기회가 늘어났으면 하는 생각이다.

 

 

 

세계문학전집의 세컨드 에디션 가능성

 

민음사 북클럽에디션(디자인: 황일선)

 

인기 있는 리커버 소재 중 하나가 세계문학이다. 보통 대형출판사 세계문학은 전집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를 리커버할 때 디자인의 연속성을 가져간다면 출판사의 새로운 브랜드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먼저 한두 권 정도를 특별판 형식으로 시장에 선보인 후 시장 반응을 살피며 권수를 늘려나가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2019년도에 민음사에서 출간된 『안나 카레니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합본 특별판은 분권되어 있는 세계문학전집을 하나로 합쳐 새롭게 디자인한 것으로 새로운 합본판 에디션을 선보인 것이다. 읽는 책에서 감상하는 책으로의 예술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책 가격이 고가임에도 독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민음사의 ‘북클럽에디션’은 북클럽 회원에게 새로운 디자인의 세계문학전집을 제공하는 혜택인데, 매년 다섯 종씩 디자인하고 있다. 초기 기획부터 디자이너 한 명이 일관성 있게 디자인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계문학전집의 세컨드 라인까지 염두에 둘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비슷한 경우로 문학동네의 ‘10주년 특별판’을 들 수 있다. 처음 다섯 권의 특별판이 출간된 이후, 반응이 좋았는데 다섯 권의 특별판을 추가로 선보였다. 자연스럽게 세컨드 라인 형식으로 자리매김하는 모습이다. 최근에는 을유세계문학전집 100권 기념한 리커버 특별판 5권도 인상적이었다.

 

이렇듯 시장 반응을 보면서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유지해 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브랜드이미지가 생겨난다. 향후 세계문학전집 시장에서 리커버 형식의 세컨드 에디션은 가능성이 충분하기에 주목해 볼 만 하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합본특별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외(디자인: 황일선, 최정은, 최지은)

 

 

 

마감하며... 리커버 이후

 

리커버 한정판은 책을 소유한다는 특별한 즐거움을 준다. 전자책과 소셜미디어의 출현으로 종이책 시장에 대한 전망은 밝지 않았지만, 이러한 변화 덕분에 책을 소유한다는 특별한 가치는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소장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리커버 한정판의 경우 중고 거래도 활발한데, 원래 책의 두 배 이상 가격으로 중고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절판된 책 중 열린책들의 『장미의 이름』은 최상품이 원가의 열 배가 넘는 금액에 거래되는 경우도 보았다. 책에 대한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디자인이 많아졌다는 이야기이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책장에 두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니 읽는 즐거움에 더해 수집하는 즐거움도 커지고 있다.

 

소셜미디어에서 예쁘고 개성 있는 책을 포스팅하는 일도 많아졌고, 이를 발견하는 기쁨도 쏠쏠하다. 대형서점도 문화공간으로서 변화했으며 특색 있고 개성 있는 동네서점도 많아졌다. 이에 발맞춰 책의 내용과 형태도 다양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판매가 보장되는 검증된 고전이나 베스트셀러만을 리커버하는 것은 출판사와 서점 입장에서 이해가 되지만, 독자에게는 새로운 텍스트를 발견할 기회가 줄어드는 일이 될 수 있어 안타깝기도 하다.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같은 책을 여러 번 디자인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생기기도 하는 편이다.

 

최근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보다 가볍고 예쁜 디자인을 선호하는 출판의 흐름이 있다. 여성층이 헤비독자의 주를 이루며, SNS 포스팅 역시 젊은 여성이 활발할 것이라는 판단에 기인하고 있지만, 이는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 출판사마다 자사의 아이덴티티나 도서의 포지셔닝에 맞춰 세분화된 이미지 메이킹을 할 필요가 있다.

 

성공적인 리커버를 위해서는 본문 교정 및 번역도 시대에 맞춰 변화할 필요가 있고, 책의 만듦새도 더 견고해져야 한다. 또한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와 콜라보레이션한 에디션도 더욱 많아져 디자이너가 예술과 미디어, 디자인의 경계를 실험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북디자이너에 대한 팬덤이 형성되어 독자가 본인이 선호하는 북디자이너의 작품을 찾아 수집하고 즐기는 일이 더 많아지기를 한 명의 북디자이너로서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