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이모저모

Vol.32  20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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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이어령 장관이 한국 출판계에 남긴 것

 

 

 

이호재(동아일보 기자)

 

2022. 05.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가 생전에 펴낸 책들이 출판계에서 인기를 끄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하지만 2월 타계한 이어령 초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경우는 특별하다. 이어령이 생전에 펴낸 책뿐만 아니라 그의 사후에 출간된 책까지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지성이라 불리는 수식어에 걸맞게 이어령은 죽음 뒤에도 여전히 출판계에서 사랑받고 있다.

 

이어령이 타계하기 전 출판사들과 계약한 책만 40여 권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그의 딸 고(故) 이민아 목사를 위해 쓴 시 등을 모은 유고시집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한국인 이야기: 너 누구니』, 언어적 상상력과 창조적 근원에 대해 담은 『거시기 머시기』…. 여러 출판사가 이어령의 죽음을 기리듯 신간을 펴내고 애독자들이 책을 사고 있다. 대체 이어령이 어떤 인물이기에 영면한 뒤에도 출판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까.

 


1961년 20대


1961년 20대


1995년 60대


1995년 60대


2020년 80대


2020년 80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석학(碩學)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은 2월 26일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암 투병 끝에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이어령은 시대를 꿰뚫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지녔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집필을 이어간 고인은 지식을 행동으로 실천한 진정한 거인이었다.
(사진: 영인문학관 제공)

 

 

한일 모두 휩쓴 베스트셀러 작가

 

이어령을 가장 명확하게 수식하는 단어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이어령이 쓴 책들은 매번 서점가를 휩쓸었다. 질뿐만이 아니다. 평생 300종의 책을 출간했을 만큼 다작으로 유명했다.

 

이어령이 출판계의 스타로 떠오른 건 한국 문화의 본질을 파고든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3년)덕분이다. 이 작품은 경향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모은 것으로 해외에서도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진기록을 세웠다. 발표된 지 50년이 넘은 지금도 한국인의 특성을 독창적인 관점으로 집어낸 명저로 꼽힌다. 그동안 팔린 책 부수는 250만 부에 이른다.

 

이 책은 한국의 문화를 최초로 분석해 낸 최초의 ‘한국인론’으로 불린다. 울음, 굶주림, 윷놀이, 돌담, 하얀 옷 등 일상적 소재 속에서 한국 문화의 본질과 정서를 탐구한다. 그리고 한국의 풍토에 대해 다뤘다. 한국이 1960년대 산업화 사회에 들어서며 몸살을 앓아 암울했던 시대를 산 이어령의 지적 여정이 녹아 있다. 특히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빠진 한국인에게 민족적 긍지와 정체성을 일깨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에 대해 다뤘던 이어령이 눈을 돌린 건 멀고도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이다. 이어령은 일본 문화를 파고든 문화비평서 『축소지향의 일본인』(1982년)을 내놓는다. 이어령이 프랑스 작가 롤랑 바르트의 『일본론』을 읽다가 우연히 축소지향의 개념을 떠올렸고, 1년간 일본 동경대학교에서 연구 생활을 하면서 1,000매가 넘는 원고를 6개월 만에 일본어로 써냈다. 두문불출하며 집필한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일본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어령은 일본의 각종 언론과 강연의 초청을 받게 된다. 한국인이 쓴 책으로는 최초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어령은 책에서 그동안의 일본론이 서양인과 비교한 일본인의 특징을 이야기한 것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일본 문화가 가진 독창적인 특징이 바로 축소지향이라고 주장한다. 하이쿠, 분재, 쥘부채 등이 일본인이 지닌 미니멀리즘이라는 것. 이런 특징이 일본을 공업사회의 거인으로 끌어올렸고, 침략의 야욕을 벌이는 등 확대지향을 하려는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났다고 평가한다. 축소지향적 성격이 일본 산업계에 반영된 대표적 사례가 워크맨, 피카츄다. “도깨비가 되지 말고 난쟁이가 되라”는 이어령의 지적에 일본인은 열광했다.

 

이어령은 21세기에 들어서도 꾸준히 자신의 사상을 담은 책을 펴냈다. 대표적인 서적이 『디지로그』(2006년)다. 2006년 1월 이어령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합친 말인 ‘디지로그’를 전면에 내세운 신문 칼럼을 연재했다. ‘디지로그’라는 말이 그전에도 쓰이긴 했으나 공적인 용어로 사용한 사람은 이어령이 최초였다. 이 글에서 이어령은 디지털만을 앞세운 당시의 정보화 사회의 측면을 지적한다. 어금니로 씹는 디지털을 만들어내라는 이어령의 제언은 가히 혁신적이었다.

 

 

 

평론으로 세운 한국 문학계

 

이어령의 첫 사회생활은 ‘문학평론가’부터 시작됐다. 특히 이어령이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보에 발표한 ‘이상론’은 지금 읽어도 혁신적이다. 당시 이상론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작가 이상(1910∼1937)은 작품에 도시를 담았다. 숭늉 마시던 시골 이야기가 아니라 커피 브랜드 MJB가 나오는 작품을 썼다. 또 한국말을 발전시켰다. 이상 이전의 작가들은 문장투의 말을 써왔다. 마지막으로 자아를 발견했다. ‘마이 파더’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한국 사람들의 마음에 ‘나’를 심어줬다. 난해하다고 여긴 이상을 이어령은 쉽게 풀어 ‘천재 이상’으로 알렸다. 이어령의 시각이 독특한 건 당시 이상은 작가라기보다는 그냥 미친 사람 정도로 취급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그 난해한 작품들을 하나하나 분석해 풀어가는 솜씨가 화제를 끈 것이다.

 

그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건 얼굴의 여드름도 채 가시지 않은 스물두 살 때였던 1956년. 한국일보에 기고한 ‘우상의 파괴’로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다. 당대 거장들을 ‘우상’으로 몰아붙이며 소수 원로 문인들에 의해 좌지우지됐던 한국 문단의 권위주의와 위선을 아프게 꼬집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어령이 기성 문단을 파괴했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이어령이 지적했던 건 우상이 문제가 아니라 우상 옆에 가서 떠받들고, 모시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작가라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라는 취지로 글을 썼다. 이어령은 이 글에서 당시 문단의 거목이었던 소설가 김동리, 모더니즘 시인 조향, 소설가 이무영을 비판했다. 그 이후로도 이어령은 황순원, 염상섭, 서정주에게 비판을 가했다. 이후 이어령은 1972년 출판사 ‘문학사상사’를 설립해 월간 ‘문학사상’을 창간하고 ‘이상문학상’을 제정하며 문단을 이끌었다.

 

그가 문인들을 비판만 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한편으론 문인들의 구명운동에 힘썼다. 대표적인 것이 1967년 분지 필화사건이다. 1965년 3월, 작가 남정현의 단편소설 「분지」가 발표됐다. 발표될 때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2개월 뒤 북한의 한 잡지에 실리면서 문제가 생겼다. 남정현은 중앙정보부로부터 이 소설은 북한의 누군가가 써서 건네준 것일 터이니 그 접선 내용을 밝히라는 이유로 끌려간 뒤 고문을 당했고 검찰에 송치됐다가 7월에야 풀려났다. 1966년 남정현은 다시 반공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이어령은 법정에 피고인 측 증인으로 출두해 남정현의 구명을 도왔다.

 

 

 

말년에도 활발히 구술 집필

 

이어령이 출판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건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사회적인 의미로 확대해나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책이 2010년 출간된 『지성에서 영성으로』이다. 이어령은 원래 무신론자인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는 2007년 기독교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그야말로 충격에 빠뜨렸다.

 

이어령이 이렇게 기독교인으로의 변신을 결심한 가장 큰 계기는 딸인 고(故) 이민아 목사의 영향이 크다. 갑상선암이 재발해 있던 딸이 설상가상으로 실명하게 되자 이어령은 내 딸에게서 빛을 거두지 않으신다면 내 남은 생은 당신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다는 기도를 올리게 되는데 그 뒤 놀랍게도 7개월 만에 딸의 증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어령은 2013년 『생명이 자본이다』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다음 키워드로 생명을 제시한다. 한 시대를 이끌었던 경제 패러다임 중에서, 산업자본주의가 가진 병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드러나고 있었고 미국을 필두로 하는 금융자본주의 역시 2000년대 후반을 강타한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그 그늘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 것. 앞으로의 경제 이념은 돈을 위한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상생을 위한 생명의 자본주의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다.

 

말년에 그는 구술로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사상을 설파해나갔다. 그는 타계 전까지 2030세대가 절망하는 원인을 파악해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느 시대든 세대 갈등은 있었지만 지금은 ‘창조적 긴장 관계’가 사라진 게 문제라며 ‘8020’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80대와 20대가 공생해야 좋은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집필을 이어갔다.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친병(親病)’ 생활을 한 이유도 글쓰기 때문이었다. 서재에서 말하면 자동으로 문자로 변환되는 스마트폰 프로그램을 사용해 작업했다. 별세 전날까지 다음 주 일정을 확인하고 아이디어 회의를 열 정도로 생생한 아이디어가 넘쳤다.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영면할 때까지 끝까지 진통제를 먹지 않았다. 그는 죽음이 다가온 순간에도 초롱초롱한 눈빛을 잃지 않았다. 그가 항상 강조하던 ‘메멘토 모리’를 최후의 순간까지 실천하며 죽음 앞에서 의연했다.

 

 

 

‘문화창조자’로 족적 남기다

 

이어령이 한국 출판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지만 그가 출판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꽤나 독특했다. 그는 자신을 ‘출판인’이나 ‘문학인’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그는 문화계 전반을 종횡무진하며 자신이 글로 썼던 이상향을 현실화하려고 노력했다.

 

대표적인 게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을 맡아 냉전 종식을 호소하는 명문 ‘벽을 넘어서’를 만들었던 일이다. 굴렁쇠 소년을 기획해 평화의 가치를 고요하고도 강렬하게 세계에 알렸다. 1990년 노태우 정부에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내며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을 설립했다. 이어령은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발판 삼아 동서양 문화와 한중일 3국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관심으로 기호학회 창립과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를 개소하기도 했다. 수많은 직함과 호칭 중 이어령이 가장 좋아했던 건 ‘문화 창조자’였다. 방대한 활동을 펼친 데 대해 그는 “난 평생 지적 호기심으로 우물을 판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는 현 출판계에 큰 시사점을 준다. 최근 문학계와 출판계는 정체돼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넷플릭스, 애플TV플러스 등의 플랫폼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작품들이 서점가 베스트셀러를 휩쓸고, 유명 아이돌 가수가 언급하는 책이 화제에 오른다. 반대로 문학, 출판계를 벗어나 활동하는 이들을 향해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이어령처럼 경계를 넘어 종횡무진하는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어령이 타계한 이후 가장 관심을 받은 책은 그의 인터뷰를 담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다.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마지막 영향력은 타인의 펜을 통해 전달된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의 인터뷰집이 인기를 끈다는 건 그가 출판계에 미친 영향이 오직 필력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말을 통해서 문화를 넘어 보편적인 가치를 역설한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평생을 호기심으로 버텨온 지식인의 성찰에 독자들은 반응했다. 이어령의 지혜는 책에 담겼지만 출판계를 넘어 지식의 영역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출판계가 바라보는 시선의 높이와 경계를 넓힌 일이야말로 이어령이 이룬 가장 큰 성취가 아닐까.

이호재(동아일보 기자)

2015년 동아일보에 입사했고 현재 문학 출판을 담당하고 있다.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틈틈이 소설을 쓰며 스토리텔링에 천착한다. 숨소리까지 살아 숨 쉬는 생생한 내러티브 기사가 넷플릭스 영상보다 가치 있는 콘텐츠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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