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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8  202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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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니다”… ‘직업 에세이 2.0’ 시대

 

 

 

양지호(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2021. 12.


 

“새롭고 낯선 직업에 도전한 내게 무한한 지지를 보내는 주변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내 직업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숨기지 않고 내비치는 사람도 있었다. (중략) 지저분한 옷을 입고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시와 차별을 받기도 했다. 그만두고 싶을 만큼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꾹 참고 다시 벽 앞에 서며 버텼다.”

- 『청년 도배사 이야기』, 174쪽

 

도배 작업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청년 도배사 이야기』 저자 배윤슬 씨 (출처. 배윤슬 인스타그램)


도배 작업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청년 도배사 이야기』 저자 배윤슬 씨 (출처. 배윤슬 인스타그램)

 

올 한해 쏟아진 직업 에세이를 보면 ‘직업 에세이 2.0’ 시대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2018~2019년 판사, 검사, 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가 쓴 에세이가 주목받았던 시기를 ‘직업 에세이 1.0’ 시대로 분류할 수 있다. 당시 검사였던 김웅의 『검사내전(부키)』, 이국종 교수의 『골든아워(흐름출판)』, 박주영 판사의 『어떤 양형 이유(김영사)』 등 일터에서의 경험과 단상을 적은 본격 직업 에세이가 독자들의 선택을 받았다. 시인·소설가 등 문단 출신의 정제된 사유와 글 솜씨를 향유하던 기존 에세이 시장에 새로운 하위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당시 이를 표현하기 위해 나온 ‘업세이(직업+에세이)’라는 용어는 본격적으로 ‘직업 에세이 1.0’ 시대 등장을 알렸다.

 

올해 본격화한 ‘2.0’은 한국 사회에서 선망을 받는 일부 전문직 출신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직업 종사자들이 에세이를 펴내는 현상으로 규정할 수 있다. 특히 소위 ‘3D’라 불리는 직종에서 직업 에세이가 쏟아져 나오고 화제도 됐다. 서두에 인용한 『청년 도배사 이야기(궁리)』가 대표적이다. 이 외에도 일용직 노동자(『노가다 칸타빌레』, 송주홍), 아파트 경비원(『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최훈), 콜센터 근로자(『믿을 수 없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게 억지스러운』, 콜센터 상담원) 등이 있었다. 흔치 않은 직종인 누드모델(『나는 누드모델입니다』, 하영은), 항해사(『지구를 항해하는 초록 배에 탑니다』, 김연식), 기상예보관(『맑음, 때때로 소나기』, 비온뒤) 등도 책을 냈다. 출판 시장에서 그간 주목하지 않았던 직업군의 필자들이 자기 직업 이야기를 한다. 이것이 ‘직업 에세이 2.0’ 시대다.

 

바야흐로 내 직업이 ‘콘텐츠’인 시대가 됐다. 물론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편의점주 봉달호(필명) 씨가 쓴 『매일 갑니다, 편의점(시공사)』은 2018년 9월 출간돼 4쇄를 찍었다. 직업군 다양화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저작이다. 이후 직업 에세이 작가군은 확대일로를 걸었다. 글쓰기에서 출간으로 연결되는 진입 장벽이 낮아지면서 보다 많은 필자가 자기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여러 출판사가 적극적으로 작가 발굴에 나섰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앞으로 직업 에세이는 더 다양한 직종 이야기를 다루게 될 것”이라고 했다. 직업 에세이는 당분간 에세이 시장에서 양적으로 팽창할 전망이다.

 

 

‘직업 에세이 2.0 시대’의 에세이들. 왼쪽부터 『청년 도배사 이야기』, 『믿을 수 없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게 억지스러운』,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노가다 칸타빌레』


‘직업 에세이 2.0 시대’의 에세이들. 왼쪽부터 『청년 도배사 이야기』,
『믿을 수 없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게 억지스러운』,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노가다 칸타빌레』

 

‘직업 에세이 1.0 시대’의 에세이들. 왼쪽부터 『검사 내전』, 『골든아워』, 『어떤 양형 이유』


‘직업 에세이 1.0 시대’의 에세이들. 왼쪽부터 『검사 내전』, 『골든아워』, 『어떤 양형 이유』

 

 

 

내 직업이 내 콘텐츠

 

상대적으로 독자층이 동질화된 한국 단행본 출판 시장에서 날 것의 직업 에세이는 독자들이 평소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독자를 안내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사’자(字) 전문직 에세이는 꾸준히 나오면서 콘텐츠로서 신선함을 잃어갔다. 반면 올해 나온 직업 에세이는 사람들이 그동안 관심을 덜 가졌던, 그러나 존재함은 분명히 알고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다. 평소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은 독자의 관심을 끈다. 도배사, 일용직 건설노동자처럼 독자층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직업군의 밥 벌어먹는 이야기는 평소 접하기 힘들다. 그래서 (접근성이 떨어지고, 상상하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때로 판타지적이기까지 하다. 일상 속 공간의 이면으로 독자를 안내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출퇴근 수단일 뿐인 지하철. 누가 지하철을 청소하고 역사를 관리하는지는 큰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지하철 미화원의 시각에서 보면 새로운 결이 보인다. 막차가 끊긴 후에 지하철 미화원이 물청소를 하기 위해 손님을 내보내는 모습 같은 것들.

 

“술에 취해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사람도 있고 용변이 급하다며 닫힌 셔터를 열어달라고 애걸복걸 협박(여기서 본다?)까지 하는 사람도 있고 생이별을 했는지 울고불고 떼쓰면서 주저앉아 행패 부리는 사람 등. 일도 일이지만 이런 사람 달래서 집에 보내는 것도 우리 일과 중 하나다. 잘 보내야 본전인데 찜찜할 때가 많다. 때로는 손수건도 주고, 길도 가르쳐주지만 잘 갔는지는 확인이 안 돼서 말이다.”

- 『나는 밤의 청소부입니다』

 

일용직 건설현장 노동자의 출근길을 간접 체험하는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다. 『노가다 칸타빌레(시대의창)』에서는 필자가 일을 시작하는 자신의 모습을 마치 목숨을 건 결투에 나서는 서부극 총잡이처럼 묘사한다.

 

“넥워머를 입고 각반을 찬다. 못주머니를 두르고 카우보이처럼 망치를 쓱 빼본다. 안전화를 신고 선글라스와 안전모를 쓴다. X자 안전벨트를 걸치고는 작업용 장갑을 바짝 당겨 손가락을 한번 움직인다. 어지럽게 널브러진 자재 위로 소음과 먼지와 욕설이 뒤엉킬 눈앞에 풍경이 펼쳐진다. 현장이 열린다.”

- 『노가다 칸타빌레』

 

심채경(39)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에세이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문학동네)』는 자신의 일과를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독자를 밤하늘이라는 무한한 공간으로 초대한다.

 

“유독 밤새 빈틈없이 관측한 날은 파킹(망원경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일)하는 그 순간이 가슴 끝까지 뿌듯하다. 너무 졸려서 미각이 거의 마비된 상태로 밥을 국에 말아 후루룩 한 그릇 비우고는, 관측자 숙소의 암막 커튼이 주는 그 따뜻한 어둠 속에서 죽음처럼 잠들고 싶은, 관측하기 딱 좋은 날.”

-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먹방’이 외국 유수 영어 사전에도 등재되고 있지만, 그 먹방을 싫어하는 직업군도 있다. “콜센터 근무 경력이 오래된 친구 중에는 ‘먹방’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쩝쩝거리는 소리를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고객이 뭘 먹으면서 전화를 거는 경우도 많아 생긴 직업병이랄까.(『믿을 수 없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게 억지스러운』)” 이렇듯 무수히 다양한 세계로 독자를 연결해주는 것이 직업 에세이 2.0 시대가 가져온 모습이다. 쳇바퀴처럼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책을 펴들고서는 전혀 다른 삶의 현장으로 떠날 수 있게 됐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과거 직업 에세이는 의사·기업인 등 선망하는 직군에서 성공한 사람이 썼다면, 최근 들어선 MZ세대를 필두로 직업의 귀천에 대한 선입견이 약해지면서 훨씬 다양한 직업 세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했다.

 

몇몇 직업 에세이는 독자에게 대안적 라이프스타일까지 제시한다. 올해 직업 에세이 중 아마도 가장 큰 화제몰이를 했던 『청년 도배사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연세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도배사가 된 저자는 인터뷰에서 “청년이 직업을 선택하는 기준은 기성세대와 다르다”며 “(기성세대가 말하는) ‘더 좋은 일’이 뭔지 오히려 묻고 싶다. 현재 만족하고 즐기는 일,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한 일. 그보다 나은 일이 무엇인가”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적응하기 힘들었던 조직 생활은 하지 않으면서, 오랜 기간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 도배사가 됐다고 고백한다. 회사 조직에서 ‘을(乙)질’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대다수 직장인은 솔깃함을 느낀다.

 

 

 

내 일을 말하기에 너무 이른 때는 없다

 

직업 에세이 2.0시대의 다른 특징은 필자 연령대가 내려간다는 점이다. 배윤슬 도배사는 29세, 형틀목수로 일하는 『노다가 칸타빌레』의 송주홍 씨는 34세다. 『여자 사람 검사(라곰)』을 쓴 서아람(35), 박민희(35), 김은수(필명·37) 검사 3인방은 9년차 평검사다. 『여자 사람 검사』를 쓴 저자들은 “평검사가 직업 에세이를 쓴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부장검사는 돼야 책을 낸다는 분위기를 깨고 10년차 미만 워킹맘 검사들이 솔직하게 조직 생활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여자 사람 검사』 표지


9년차 워킹맘 검사 세 사람이 쓴 『여자 사람 검사』 표지. 평검사가 에세이를 낸 보기 드문 사례다.

 

직업 에세이 1.0을 떠올려보자. 김웅 검사, 이국종 교수는 40대 후반이었고 박주영 판사는 50대였다. 과거에는 60~70대가 됐을 때 회고록을 썼다면, 직업 에세이 1.0 시대에는 조직의 ‘허리’가 펜을 들었고 2.0 시대에는 더 젊은 필자가 글을 쓰고 있다. 이는 주 구매층인 3040 독자들과 또래 저자가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동년배가 글을 쓰다 보니 독자들이 친근감을 느끼고 읽을 수 있다. 한 출판사 편집자는 “과거처럼 ‘볼장 다 보고’ 책을 쓴다는 개념보다는 지금 당장 느낀 바를 쓰는 필자가 늘어나고 있다”며 “업에 완전히 젖어들기 전인 사람들이 일을 배워나가면서 경험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외부인인 일반 독자에게 소구하는 바가 크다”고 했다.

 

소위 MZ세대라 부르는 한국의 1980~1990년대생들이 싸이월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 브런치 등을 겪으며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게 익숙한 것도 필자의 연령층이 어려지고 더 다양한 분야에서 필자가 발굴되는 이유다. 김현숙 궁리 편집주간은 “배 씨가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도배사 생활을 올리는 것을 보고 출간을 제의했다”고 말했다.

 

10년 경력의 ‘콜센터 상담원’(필명이자 그의 직업이기도 하다)이 쓴 『믿을 수 없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게 억지스러운(코난북스)』은 트위터 계정 팔로어가 약 3만 명인 ‘파워 트위터리안’이다. 독특한 이야기를 가진 필자를 출판사들이 찾기 더 쉬워졌고, 출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양적 팽창은 진행형, 질적 성장은?

 

직업 에세이는 크지 않아도 확실한 수요가 있다. 진로 독서가 중시되는 중·고등학생이 독자가 되기 때문이다. 배윤슬 도배사는 출간 이후 관련 강의를 해달라는 각급 학교 문의가 쇄도했다. 책 판매 외에도 강연 수익을 노릴 수 있는 여지가 크다.

 

진입 장벽이 낮은 것도 특징이다. 온라인에 신변잡기를 적던 사람이 책을 내고자 마음먹었을 때 가장 간단한 선택지는 ‘일 이야기’인 것도 직업 에세이가 늘어나는 원인이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처음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뭔가 써서 출판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이 타 직군들은 잘 모르는 자기 일 이야기다 보니 초보 저자들의 직업 에세이가 꾸준히 나온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아쉬움도 있다. 여러 직업 에세이가 쏟아지고 있지만 시장 확장성은 다소 떨어진다. 자칫 직업에 대한 ‘알쓸신잡’과 신변잡기로 끝날 위험도 상존한다. 사실 ‘직업 에세이 2.0’이 독자층 저변을 넓히는 데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린 직업 에세이는 드물었다. 그래서 직업 에세이 회의론도 나온다. 한 대형 출판사 팀장급 편집자는 “에세이는 어떤 게 대박 날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내 놓고 본다는 일종의 투기 심리가 있다”며 “내용보다도 해시태그로 수렴될 만한 콘텐츠를 발굴해 이것저것 내는 시도가 이어지는 게 눈에 띈다”고 했다.

 

“에세이는 ‘한 개인’의 체험, 경험, 생각, 감상이 독자와 같은 진동수로 공명해야 울림을 갖는 장르다. 지극히 사적인 글로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민음사)』

 

베테랑 편집자 이수은이 자신의 독서 에세이에 쓴 글이다. 직업 에세이라는 장르가 출판 시장에 안착하기 위해서, 단지 ‘직업 소개서’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곱씹어 볼 말이다. 수준 높은 직업 에세이가 더 많이 나와야 책을 통한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일도 수월해질 것이다. 직종의 다양화는 이뤄지고 있다. 더 큰 공감대를 위한 작업은 남겨진 과제다.

 

한 명의 독자로서 다양해지는 직업 에세이를 읽는 것은 어쨌든 큰 즐거움이다. 어떤 직업을 택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는 몇몇 직업만 강요당하며 자라나는 한국 사회에서 지금까지 너무나 희소했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너 공부 안하면 저 사람처럼 된다’는 선생님과 부모님 말을 듣고 자라난 세대에겐 더더욱.

양지호

 

양지호(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2013년부터 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출판 분야를 취재하고 있다. 자라나며 원 없이 책을 읽었는데, (잠시나마) 책 읽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좋은 책이 더 널리 읽히기를 바란다.
yang.jih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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