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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4  20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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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종로서적’은 무엇이었을까

 

 

 

류위남(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2023. 06.


 

대한민국이 붉은 열기로 가득 찼던 2002년 월드컵 기간 중에 발생한 종로서적의 부도는 많은 문학인과 지식인들의 탄식을 자아내던 사건이었다. ‘사상 최초’라는 타이틀을 장식하며 연일 지면과 화면을 가득 메운 월드컵만 아니었어도 사회적 관심을 모아 종로서적을 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감히 ‘안 할 말로 그까짓 축구공이 어느 골대로 몇 번 들어간들 무슨 상관이랴.’라며 종로서적의 몰락을 ‘한 시대의 종언’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우리에게 종로서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매해 다양한 역사적 층위를 가진 종로의 역사문화 콘텐츠 중 하나를 선정하여 조사·연구하고 있는데, 작년의 주제가 바로 ‘종로서적’이었다. 우리는 종로서적이 가진 서점사적인 의의와 종로 일대의 출판문화의 역사성을 조사했다. 또한 사람들이 그토록 추억하는 종로서적에 대한 ‘집단 기억’을 기록하기 위해, 종로서적의 옛 종사자나 출판 및 서점계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종로서적에 대한 이야기와 자료를 공모하였다.

 

그 결과, 종로서적 자체가 20세기 한국 서점문화의 대표적인 공간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종로서적이 다름 아닌 ‘종로’라는 공간에 자리했다는 것에서 가지는 의미가 컸다. 종로서적의 장소성은 ‘종로’가 개화기 이래의 서점 및 출판사의 집결지이며, 동시에 1970년대 이후부터 카페, 학원, 학사주점 그리고 시위 현장에 이르기까지 젊은 열기가 가득했던 청년들의 거리라는 역사적 공간성에서 상당 부분 비롯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거창한 제목으로 글을 시작하였지만, 수많은 사람들 각각의 경험과 기억, 추억에 담긴 그들의 ‘종로서적’이 무엇이었는지 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그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종로서적에 대해 몇 가지 공통된 기억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빌려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제일 크고 현대적이고 전문적인 최초의 서점, 종로서적센터

 

많은 출판·서점계 관계자들은 이전의 종로서관(1949~1963)을 완전히 탈피하고 1963년에 새로 개점한 종로서적센터를 ‘서점 현대화의 선두주자’였다고 평가했다. 인조 대리석을 깐 바닥, 샹들리에 설치, 알루미늄 간판과 같은 현대식 인테리어뿐 아니라, 여성 판매원의 공개 채용, 유니폼 착용, 주제별 도서 진열 방식과 안내 표지판, 매장 내 클래식 배경음악과 도서 포장지 사용 등이 종로서적센터에서 처음 시도됨으로써 한국의 서점 산업은 새로운 단계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큰 책방이 없었어요. 그냥 조그마한 동네 책방들이었는데, 들어가면 그냥 책을 사야지, 서서 책을 보고 그런 게 전혀 안 됐었어요. 조그마한 책방에 와서 주인이 있는 데서 책을 다 보고 올 수 없잖아요. 그런데 종로서적은 자유롭게 책을 볼 수 있고, 클래식 음악이 항상 은은하게 나오고… - 전 종로서적 예술부 직원, 조명자

 

종로서적센터

종로서적센터(1973년 5월,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대한성서공회 건물에 있던 종로서적센터의 모습으로 2층에 네온사인 간판이 눈에 띈다. 대한기독교서회 건물은 신축 준비 중이고, 지하철 1호선 종각역이 생기기 이전의 모습이다.

 

(좌) 종로서적센터 앞 종로2가 풍경 (우) 종로서적의 도서 포장지로 포장한 책

(좌) 종로서적센터 앞 종로2가 풍경(1973년 5월, 한치규 촬영,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지하철 1호선 공사가 한창이다.
(우) 종로서적의 도서 포장지로 포장한 책(1980~1990년대, 박상준·이인순 제공)
종각(보신각)과 김홍도의 〈서당〉이 그려진 종로서적의 도서 포장지

 

 

 

새로운 독서문화를 이끌었던 책의 백화점, 종로서적

 

종로서적은 독서·출판의 사회적 인프라가 전체적으로 부족했던 1950~1980년대 상황에서 도서관이나 정보 센터의 역할을 일부 맡았으며, 서점 전문인을 양성하고, ‘전산화’ 이전의 상황에서 출판사, 일반인, 대학 등을 위한 종합 서적 정보를 제공했다. 또한 다양한 마케팅 전략적 차원에서 개최했던 도서전시회, 작가와의 대화, 시즌에 맞는 도서특별전 등의 이벤트를 통해 새로운 독서문화를 이끌었다.

 

제 첫 부서가 문학이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컴퓨터가 없었으니까 책 정보를 100% 다 외워야 했거든요. 예를 들어서 손님이 책 문의를 할 때 제목을 말해주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 어떤 시 내용을 얘기해줘요. 그럼 그 시가 들어 있는 책을 찾아줘야 하는 거죠. 그리고 많은 손님들이 저희한테 물어봐요. 어떤 책 추천해달라고.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북 마스터 같은 거예요.

 

매장 진열은 매장 담당자 고유 권한이었어요. 당시에 신생 출판사 작품 중 하나가 재밌어서 문학 코너 열세 군데에나 깔았는데 그게 대박이 난 거죠. 출판사가 아니라 우리들이 베스트셀러를 만든다는 자부심도 있었어요. - 전 종로서적 문학부 직원, 신영옥

 

(좌) 종로서적 문학부 “금주의 베스트셀러” 코너 (우) 이문열 작가의 『어둠의 그늘』 출간 이후, “작가와의 대화” 모습

(좌) 종로서적 문학부 “금주의 베스트셀러” 코너(1992년, 이철지 제공)
(우) 이문열 작가의 『어둠의 그늘』 출간 이후, “작가와의 대화” 모습(1981년 9월 26일, 조유성 제공)
“작가와의 대화”는 작가들을 초청하여 독자와 저자를 이어주는 종로서적의 서점문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벤트이다. 1977년부터 매달 진행하여 박완서, 박범신, 조세희, 신경숙, 이병주, 조정래, 이문열, 이외수, 김동길, 박노해, 이호철, 마광수, 은희경 등 약 150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작가와의 대화”의 진행 방식은 아주 간단해요. 사회자가 작가를 짤막하게 소개하는 게 시작이에요. 두 번째는 작가가 본인 얘기를 조금 해요. 그리고 세 번째는 참여한 독자와 작가의 문답이에요. 종로서적 안에 포스터를 붙여서 홍보했어요. 신문에 기사도 많이 났죠. 종로서적에는 클래식 음악 방송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내 방송에서도 알려주고, 다음 달은 누구라는 것도 홍보하죠. - 전 종로서적 내서부 계장, 조유성

 

(좌) 종로서적에서 발행한 계간지 <종로서적> (우) 종로서적 안내 브로슈어에 소개된 다양한 서비스

(좌) 종로서적에서 발행한 계간지 〈종로서적〉(조유성 제공)
계간 〈종로서적〉의 발간은 종로서적을 홍보하면서 독자의 요구를 수용하여 매출 상승을 도모하는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도서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선별한 좋은 책에 대한 전문가의 서평을 실어 문화 잡지로서의 위상도 확보하였다.
(우) 종로서적 안내 브로슈어에 소개된 다양한 서비스(1987년경, 전세영 제공)

 

 

 

자랑스러웠던 직장, 종로서적

 

옛 추억을 말하는 종로서적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그 시절 종로서적이 단순히 책이라는 상품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그들의 시대를 상징하는 문화 공간으로 여겼고, 그곳에서 보냈던 삶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리워했다.

 

책을 좋아했지만 생활이 어려웠던 나로서는 종로서적이 최고의 직장이었다. 봉급도 받고 책도 마음 놓고 볼 수 있었으니 누구도 부러울 사람이 없었다. 종로서적은 직원 복지도 수준급이었다. 구내식당은 무료인데도 종로 거리에서 최고의 맛을 자랑했고, 사원들이 자발적으로 사우회를 조직하자 회사는 축구반, 탁구반, 기타반, 합창반, 무용반 등 취미활동을 전액 지원했다. 사원들의 교육 또한 철저했다. 강만길, 김동길, 한완상, 황필호 교수 등 저명인사를 초청해 당시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주제로 정기적인 특강을 열었다. 봄가을에는 전 직원이 체육대회와 나들이를 통해 종로인으로서의 결속력을 다지곤 했다. - 전 종로서적 직원, 출판 칼럼니스트 김영수

 

 

 

우리가 만나던 그곳, 종로서적

 

종로서적이 우리나라 최대의 서점으로서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전시관 현장에서 관람객들에게 받은 종로서적에 대한 설문지에는 가장 불성실한(?) 작성본에서조차도 “종로서적에 대한 기억을 적어주세요.”라는 첫 질문에 대해 ‘만남의 장소’, ‘약속 장소’라는 글씨가 휘갈겨져 있었다. 문학 작품에서도 약속 장소로 종로서적이 등장한다.

 

토요일 저녁의 종로서적 입구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빼곡했다. 그들은 어디선가 자신의 이름이 들려오기를, 혹은 자신도 누군가의 이름을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인파로 가득한 종로 거리를 좌우로 두리번거렸다. 기다리던 사람이 누구든, 친구이든, 애인이든, 가족이든, 그들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환한 표정으로 웃으며 층계를 내려갔다. 종로서적 입구에 서서 목을 빼고 늦게 오는 친구를 기다려본 사람은 그렇게 친구나 애인을 먼저 만나는 사람이 얼마나 부러운지 알 것이다.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김연수, 문학동네, 2007)

 

1960~1970년대 문인과 예술가의 거리였던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은, 세련된 레스토랑과 술집, 카페, 전자오락실, 디스코 클럽 등 식당과 오락 시설이 들어서던 1980년대 초부터 대학생들이 몰려드는 젊은이의 거리가 되었다. 이 관철동의 주요 약속 장소 중 하나가 종로서적이었다. 종로서적은 1층이 젊은이들의 약속 장소로 애용되자 1층 18평 가운데 8평 정도를 차지하던 잡지·아동서적 매대를 없애버리고, 약속을 하고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메모판을 달아주었다는 신문 기사(〈조선일보〉 1983.2.23.)도 났다. 1980년대 1층 잡지부에서 일하던 여직원은 메모판으로 전하기 어려운 것들을 전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1층이 쉴 틈 없이 북적였어요. 청춘들의 만남의 장소였거든요. 제가 1층 잡지 코너에서 근무하면서 엇갈린 만남의 가교 역할을 많이 했죠. 쪽지 전달부터 해서 케이크 전달도 해봤어요. - 전 종로서적 1층 잡지부 직원, 김옥숙

 

종로서적 1층 잡지부의 여직원들

종로서적 1층 잡지부의 여직원들(1983년, 김옥숙 제공)

 

 

종로서적은 1963년 (재)개업 당시부터 서울에서 가장 큰 서점 중 하나였고, 1990년대까지 계속 성장하며 규모를 키웠다. 종로서적의 사업 범위는 단지 도서의 판매에 그치지 않았으며, 각종 문화 사업까지 확장되었다. 종로서적은 당시 대형서점이 시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기획과 전략을 수립·실천함으로써 1960~1990년대 ‘지식문화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고, 종로라는 공간에 위치함으로써 여러 세대에 걸친 사람들의 추억과 기억에 공통된 ‘장소성’을 가진 공간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2002년 종로서적의 부도 소식은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종로서적의 몰락은 단순히 어느 한 서점의 폐점이 아닌 그들이 품고 있던 문화와 추억, 기억의 상실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종로대로의 뒷골목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전기의 집터와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하여 만든 공평도시유적전시관(서울역사박물관의 분관)은 2019년에 개관한 이후부터 해마다 종로의 역사문화콘텐츠를 하나씩 조사·연구하고 기획전시를 통해 그 성과를 공개하고 있다. 다가오는 7월 20일에는 작년에 조사하였던 ‘종로서적’을 주제로 하여 〈우리가 만나던 그 곳, 종로서적〉 전시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 글 역시 2022년 종로서적 조사연구보고서를 기초로 작성한 원고임을 밝혀둔다.

 

류위남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의 기획전시와 조사·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1904, 입체사진으로 본 서울풍경〉, 〈서울은 소설의 주인공이다〉, 〈서울살이와 집〉 전시를 기획하였다.
ryuwn@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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