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이모저모

Vol.37  202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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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본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곽선희(위즈덤하우스 스토리독자팀)

 

2022. 10.


 

2021년 3월 위즈덤하우스에 문학을 위한 팀이 만들어졌다. 스토리와 독자를 잇겠다는 포부(!) 아래 스토리독자팀에 주어진 첫 원고는 소설가 정세랑의 첫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누구보다 이 책을 기다리고 있을 독자들에게 어떻게 특별한 경험을 안겨줄 수 있을지, 독자와 소통하며 독자와 함께 책을 만들어가는 출판사라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하던 회의에서 누군가 툭 던진 말이 계기가 되었다.

 

“전국 독립서점 열 곳에서 독자 백 명이 만난다.”

 

‘SSA 비밀요원 프로젝트(Story Security Agency, 이하 SSA)’는 “스토리로 세상을 구하라!”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비밀요원(독자)들이 출간 전 블라인드 가제본을 읽고 전국 비밀기지(서점) 열 곳에 모여 감상을 나누는 사전 독서 모임 프로젝트다. 가제본을 받기 전까지는 저자 이름도 책의 분야도 알 수 없다. SSA 본부, 즉 출판사에서 사전에 안내하는 것은 책에 관한 세 가지 키워드, 저자 이니셜, 몇 줄의 정보뿐이다.

 

SSA 1기 가제본, SSA 1기 모집 게시물 일부

SSA 1기 가제본, SSA 1기 모집 게시물 일부

 

 

SSA 1기는 정세랑이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되, 독자들이 스스로 힌트를 발견하고 알아맞히도록 유도했다. 작가의 전작 『지구에서 한아뿐』, 『목소리를 드릴게요』, 『재인, 재욱, 재훈』, 『덧니가 보고 싶어』 등의 제목과 소재를 활용한 카피를 사용했다. SSA 1기 모집 게시물이 공개되자 정세랑의 팬들이 모인 단체 메신저 방과 SNS 계정을 중심으로 소식이 전해졌다. 곧 출판사 공식 계정과 각 서점으로 신청 문의가 쏟아졌다. 정세랑의 첫 에세이를 출간 전에 읽기 위해, 100부 한정으로 제작되는 가제본을 갖기 위해 독자들이 모여들었다. 모집이 시작되자마자 1분도 채 되지 않아 마감된 서점들도 있었다.

 

 

 

블라인드 가제본의 매력

 

성공적으로 SSA 1기를 마치고 ‘비밀요원’과 ‘SSA 본부’라는 세계관을 조금씩 보완하며 차례로 다음 모임을 이어나갔다. 저자는 물론 분야까지 공개하지 않자 재밌는 일들도 일어났다. SSA 5기 (무당) (직장인) (예술)은 ‘요즘’ 무당 홍칼리의 색다른 일상을 풀어놓은 에세이다. 출간 제목은 『신령님이 보고 계셔』. 저자는 오색으로 꾸며진 신당 대신 카페에서 점사를 보고, 모바일 메신저로 예약을 받고 상담을 한다. SSA 5기 가제본을 받은 독자들은 홍칼리라는 독특한 저자를 소설 속 가상의 인물로 받아들였다. 중간까지 읽고서야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라는 것을 알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은 독자들도 있었다. 책에 대한 정보를 제목과 표지, 띠지와 카피에까지 곳곳에 노출하는 단행본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독서 경험이었다.

 

서점 매대에서 발견했더라면 손에 집어 들지 않았을 책을 읽게 하는 것도 블라인드 가제본의 묘미다. SSA는 세 가지 키워드와 카피로 책의 내용을 노출하지만, 나머지 빈 부분은 독자들이 추측할 수밖에 없다. 독자가 생각지도 못했던 책을 받아들 때도 있다. 평소 에세이를 절대 읽지 않는다던 한 독자는 소설이라고 생각해 SSA에 참여했다가 에세이를 읽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의외로 많은 독자들이 저자를 여성으로 짐작하고 읽는다는 점도 재밌었다. 저자가 남성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신선함과 산뜻한 충격을 느꼈다는 후기가 적지 않았다.

 

좌측부터 SSA 5기 『신령님이 보고 계셔』, SSA 3기 『저 결혼을 어떻게 말리지?』, SSA 4기 『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표지 이미지

좌측부터 SSA 5기 『신령님이 보고 계셔』, SSA 3기 『저 결혼을 어떻게 말리지?』, SSA 4기 『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표지 이미지

 

 

‘결혼 적령기’를 맞은 30대 작가가 결혼과 관계에 대해 쓴 SSA 3기 (결혼) (밀레니얼) (사연)(출간 제목 『저 결혼을 어떻게 말리지?』)은 기혼, 미혼, 비혼 또는 결혼을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퀴어 등 여러 상황에 놓인 독자들에게 미리 공개되었다. 3기 모임을 마친 독자들은 출판사에 정성 어린 감상들을 보내주었다. 별 고민 없이 결혼했지만 책을 통해 결혼의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거나 결혼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없었는데 결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후기는 책의 마케팅 메시지와 타깃 독자를 그려볼 수 있게 했다. SSA 비밀요원 프로젝트라는 세계관 없이 ‘결혼 에세이’로서만 서평단을 모집했더라면 이처럼 다양한 독자의 의견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독자가 편견 없이 책을 받아들일 때 출판사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 팬덤이 없는 신인 작가 또는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해외 작가의 책이 어떤 배경 설명이나 수식 없이 오로지 작품으로만 읽힐 수 있는 것이다.

 

SSA 4기 (여자) (사랑) (우정)(출간 제목 『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은 ‘오타니 아키라’라는 일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작가의 짧은 소설집으로, 일본에서 높은 판매고를 올리지는 못했다. 유명 작가도 아니고, 수상 이력도 없지만 여성 인물만 등장하는 짧은 이야기 23편을 묶었다는 콘셉트가 독자의 흥미를 끌 것이라는 판단으로 SSA를 진행하였다. ‘사랑도 우정도 원망도 구원도 여자에게만 허락된 이야기’, ‘여성이 갈 수 있는 세계의 모든 것’이라는 소개와 함께 레즈비언 결혼 에세이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를 쓴 김규진 작가와 퀴어 문학으로 독자의 사랑을 받은 소설가 이종산, 조우리의 추천사를 미리 받아 실었다.

 

블라인드 가제본으로 독자를 먼저 만나지 않았더라면 시도할 수 있는 마케팅의 규모가 달라졌을 것이다. 이후 『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는 SSA 요원들의 입소문과 후속 마케팅으로 국내 퀴어 문학 독자들에게 기대 이상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서평단이 아닌 ‘사전 독서 모임’

 

SSA는 출간 전의 가제본을 읽고 SNS에 리뷰를 올리는 서평단이 아닌, 출판사와 서점, 독자가 만나는 커뮤니티 프로젝트다. 독자들이 SSA 비밀요원으로서 해야 할 일은 세 가지. 가제본을 읽을 것, 서점에 모여 자유롭게 말할 것, 원고에 대한 피드백과 추천의 말을 출판사에 전달할 것. SNS에 게시물을 업로드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가제본이 도착했을 때, 서점에서 마음에 오래 남을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자신이 쓴 추천의 말이 책에 실렸을 때 독자들은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자연스럽게 온라인상에 드러냈다.

 

SSA 9기 (숨기) (말하기) (용기) 모임이 열린 춘천 ‘소양하다’

SSA 9기 (숨기) (말하기) (용기) 모임이 열린 춘천 ‘소양하다’

 

 

동네서점은 SSA의 거점 기지로 활약한다. 출판사에서 모든 SSA 행사의 모객과 진행을 관리·감독하지 않는 대신 서점에 대관료를 지급하고, SSA를 통해 출간된 책에 참여한 서점 목록을 실어 홍보를 돕는다. 독서 모임을 위해 최소한의 지침을 ‘미션지’라는 이름으로 제공하지만, 모임 진행은 전적으로 기지 요원(서점 대표)의 재량에 맡긴다. 각 서점마다 독자의 성향과 모임의 분위기가 다르므로 서점에서 자유롭게 모임을 운영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서점에 따라 미션지 외 추가 활동지나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독후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지금까지 SSA는 서울, 일산, 인천, 춘천, 강릉, 대전, 전주, 대구, 부산, 제주 등 전국 각지 동네서점에서 독자를 만났다. 이미 그 서점을 잘 알고 자주 찾는 독자도 참여했지만, SSA를 계기로 서점에 처음으로 방문하는 독자도 있었다. 독자들은 SSA 모임에서 독서 취향이 비슷한 이웃을 만나고, 여러 번 모임에 참여하며 서점의 단골이 되었다. 서점을 중심으로 지역 커뮤니티가 만들어졌다. 목적에 의해 방문하는 일이 잦은 서울 번화가가 아니라 독자가 거주하는 지역의 ‘동네’서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문화 행사가 많지 않은 비수도권 지역 독자들은 SSA를 더욱 반겨주었다. 비밀기지가 페미니즘, 퀴어 등 다양성을 다룬 책을 읽고 마음껏 이야기할 안전한 장소로 기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제본보다 중요한 것은 독자와의 만남

 

해당 도서를 담당한 편집자가 ‘스파이 요원’으로 모임에 깜짝 등장하기도 했다. 가까운 수도권 서점뿐만 아니라 대구, 부산, 춘천 등 비수도권 비밀기지에도 방문했다. 스파이 요원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독자의 이야기를 듣거나(편집자의 열연이 필요하다!), 모임 시작 전 편집자임을 미리 밝히고 참여했다. 단, 편집자라는 것을 밝혔을 때는 반드시 원고에 대한 피드백을 가감 없이 들려줄 것을 당부했다.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독자들은 과감하고 솔직하게 원고를 읽은 감상을 전했다. 실제로 독자가 지적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단어를 수정하거나, 정보 오류를 바로잡고 제목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등 독자의 피드백을 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해왔다.

 

춘천 ‘소양하다’에서 SSA 9기 (숨기) (말하기) (용기) 모임을 하고 있는 모습

춘천 ‘소양하다’에서 SSA 9기 (숨기) (말하기) (용기) 모임을 하고 있는 모습

 

 

서점으로부터 모임 후기를 듣고, 독자가 온라인으로 제출하는 피드백만 받아볼 수도 있겠지만 편집자가 모임에 직접 참석하는 이유는 대면해야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기록으로 남는 피드백이 부담스러운 독자들이 편집자 앞에서는 편하게 말을 꺼냈다. 무엇보다 책을 읽을 독자를 상상하는 데 늘 어려움을 겪는 편집자에게 독자를 만날 기회는 무척 소중하다. SSA에서는 책이 출간되기 전에 어떤 독자가 이 책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지 직접 보고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도 있다. 구체적인 독자가 그려질 때 편집자는 힘을 얻는다. 한동안 제목을 결정하지 못하다가 SSA 모임에 다녀온 뒤 방향을 잡은 경우도 있었다.

 

편집자를 만난 독자 역시 멀게만 느껴졌던 출판사를 자신이 만난 편집자로 구체화하고 친밀감을 느낀다. SSA를 시작한 후 위즈덤하우스에서 출간되는 책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독자들도 늘었다. 이는 출판사 SNS 팔로워 증가와 높은 중복 참여율로 이어졌다. SSA를 통해 출간된 단행본에는 독자들이 보낸 추천의 말이 실려 있는데, 여러 책에서 자주 눈에 띄는 낯익은 요원들의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가제본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

 

2021년 한 해 동안 다섯 차례 독자를 만난 SSA 비밀요원 프로젝트는 연말을 앞두고 스페셜 모임 (스토리) (세상) (비밀요원)을 진행했다. 비밀기지에서 서로의 독서 생활을 돌아보고 취향을 나누고 소개하는 자리였다. 스페셜 모임에서만 특별히 독자들을 위즈덤하우스 사무실로 초대해 이틀 동안 ‘SSA 본부 모임’을 진행하기도 했다. 모임에서 편하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책 덕후’ 친구와 책에 대한 수다를 떤다는 콘셉트를 빌렸다.

 

스페셜 모임에 제공한 가제본은 원고가 아닌 독서 다이어리였다. 기존 가제본과 같은 디자인으로 제작하여 독자가 직접 ‘사건 파일’을 채우고 만들 수 있었다. 독서 다이어리 속에는 다음 물음들이 있었다. 1년에 몇 권의 책을 구입하고 몇 권을 읽는지, 책을 즐겨 읽는 장소, 책을 읽고 SNS에 감상을 남기는지, 남긴다면 주로 어떤 플랫폼을 이용하는지 등등. 일반 독자들이 어떤 독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듣기 위해 설계한 질문지였다.

 

‘우리가 읽은 스토리, 우리가 읽고 싶은 스토리’, ‘여러분이 읽고 싶은 책을 SSA가 만들어드립니다’라는 카피와 함께 독자가 원하는 책에 대한 힌트도 얻을 수 있었다. 젊은 작가의 책, SF, 여성 서사, 퀴어 문학 등 어렴풋이 짐작하고만 있었던 시장의 수요를 직접 확인하는 자리였다. 특히 독자들이 ‘좋아하는 작가’로 반복하여 언급한 저자들이 있어 출판 기획과 저자 섭외에 큰 도움이 되었다.

 

SSA 1~5기, 스페셜 가제본

SSA 1~5기, 스페셜 가제본

 

 

최근 하나의 세계관 아래 블라인드 서평단을 운영하는 출판사가 늘어나고 있다. 단순히 낱권의 가제본을 독자에게 읽히고, SNS와 온라인 서점에 형식적인 리뷰를 게시하는 것은 더 이상 출판사에도 독자에게도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SSA 역시 작은 디테일 하나에도 세계관을 담고자 노력했다. 가제본에는 독서 모임을 시작하기 전 모두 함께 낭독하는 비밀요원 서약서를 수록하였고, 본문에 SSA의 상징인 도토리를 숨긴 후 뒤표지의 QR 코드를 통해 가제본 속에 등장하는 도토리 개수를 맞히는 깜짝 미션을 더해 읽는 재미를 더했다.

 

출판사는 ‘가제본’이라는 미완의 책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위즈덤하우스 스토리독자팀은 이 질문에 답하고자 지난 1년간 고군분투해왔다. 가제본은 종착지나 목적지가 아니라 플랫폼이었다. 가제본을 통해 지역 서점과 연결되고 독자를 만날 수 있었다. 스토리독자팀은 이제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다. 독자들이 기다리고 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도할 예정이다.

 

스토리로 세상을 구할 그날까지, “우리는 우리가 비밀요원임을 진심으로 믿고 절대로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바라며(SSA 행동 수칙)” 요원 여러분, 또 만나요!

 

SSA 본부로부터.

 

곽선희 위즈덤하우스 스토리독자팀

위즈덤하우스에서 읽고 싶은 책을 만들고 있다. 종이책보다 전자책을 더 좋아한다.
shampoo@wisdomhouse.co.kr
www.instagram.com/neeneewa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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