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이모저모

Vol.38  202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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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더미 데이〉를 통해 본
한국 그림책 시장의 선진적 면모

 

 

 

김상일(도서출판 키다리 대표, 그림책협회 이사(출판사분과장))

 

2022. 11.


 

여름 기세는 한풀 꺾였으나 한낮에는 여전히 태양이 맹위를 떨치던 9월 중순 어느 날. 서울 지하철 홍대입구역 인근 청년문화공간JU동교동 5층 니콜라오홀에는 하루 종일 사람들로 북적였다. 3년 가까이 ‘코로나19’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터라 생경한 풍경이다. 약 40여 개의 상담용 책상이 오와 열을 맞춰 홀을 꽉 채웠고 연단 쪽 책상에는 책자들이 쭉 놓여 있다. 그 앞으로는 29개의 책상마다 두세 명이 마주 앉아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홀의 양쪽과 뒤쪽에 도열해 있는 80여 개의 의자에는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자들이 앉아 있다. 입시 상담회, 아니면 취업 상담회라도 열린 것일까?

 

“이미지는 주목을 끌지만 스토리 완결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쉽네요.”
“개연성이 약하지만 이미지가 독특해서 독자에게 어필할 여지는 꽤 있어요.”

 

그렇다. 작가와 출판사 편집자 간의 대화다. 작가들의 얼굴에는 기대와 흥분의 표정이 역력하다. 다소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시장 같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 질서정연함이 있으며 대화는 열의에 차 있고 배려가 넘친다. 그림책협회가 주최한 그림책 축제의 현장, 이름하여 2022 그림책 페스타 〈그림책 더미 데이〉의 현장 스케치 모습이다. 〈그림책 더미 데이〉는 기성 또는 예비 작가들이 미출간 그림책 원고를 출판사 편집자들에게 선보이며 작품에 대한 의견을 구하고 출판의 기회를 모색하는 행사다. 출판사는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 자기 출판사에 맞을 만한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위의 사례처럼 원고에 대한 평은 출판사에 따라서 비슷한 듯 다르다.

 

편집자의 눈에 띈 작품은 현장에서 출판 계약을 제안받을 수 있다.

편집자의 눈에 띈 작품은 현장에서 출판 계약을 제안받을 수 있다.

 

 

기존에 출판을 목적으로 창작된 그림책 원고가 공개되고 제출되는 각종 행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시회, 품평회, 졸업 발표회, 공모전, 투고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작가들은 출판의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이번에 그림책협회가 주최한 〈그림책 더미 데이〉는 여러 면에서 이전에 이뤄지던 같은 목적의 행사들과는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 규모가 그렇다. 작가 약 110여 명, 출판사 대표 또는 편집자 5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행사 진행자,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등 기관 관계자, 언론사 기자들까지 하면 어림잡아 200여 명이 행사에 참석했다. 출판 계약을 목적으로 이렇게 많은 작가들과 출판사 편집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대규모 행사는 최소한 국내에서는 전례가 없던 것으로 안다. 해외에서도 이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을까? 출판할 권리를 사고파는 마켓이라는 점에서 이와 비슷한 프랑크푸르트도서전, 런던도서전, 파리도서전, 볼로냐아동도서전, 서울국제도서전, 동경도서전 등의 도서전은 출판사 간 저작권 거래는 물론이거니와 부수적으로 도서 홍보, 판매를 목적으로 한다.

 

그럼에도 굳이 이번 〈그림책 더미 데이〉의 모형을 찾는다면 볼로냐아동도서전(이하 볼로냐도서전)이 되겠다. 일반적으로 도서전 현장에서 그림책 작가들이 포트폴리오나 그림책 원고(더미북)를 들고 출판사 부스를 찾아다니며 즉석 상담을 요청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일부 출판사들은 상설 상담 데스크를 마련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 앞에는 수십 명의 작가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한다. 즉석 만남의 특성상 상담 시간은 길지 않지만 좋은 씨앗을 만났다면 출판사에서 추후 정식 상담을 제안할 것은 분명하다.

 

볼로냐도서전 역시 견본시(見本市)로서 출판사 간 저작권 거래가 주요 목적이다. 하지만 다른 도서전과는 분위기가 조금은 다르다. 어린이 출판 관련 세미나, 전시, 심포지엄, 작가와의 만남, 강연 등의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고 세계적인 권위의 아동문학상인 안데르센상 수상 후보자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문학상(ALMA) 수상자가 발표된다. 더불어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출간된 어린이책 가운데 각 분야 최고의 작품을 선정하고 그 작가들에게 라가치상을 수여한다. 1966년부터 2022년까지 지속되어 온 라가치상은 ‘그림책계의 노벨상’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볼로냐도서전을 세계적인 어린이 도서 축제로 이끈 원동력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렇듯 볼로냐도서전의 포트폴리오 품평 상담이 이번 〈그림책 더미 데이〉 기획의 모티브가 되었음은 명확하다. 하지만 〈그림책 더미 데이〉는 100명이 넘는 작가와 50여 명의 편집자들이 온전히 원고의 출판 계약을 목적으로 하는 비즈니스 상담회라는 면에서 볼로냐의 현장 즉석 품평과는 사뭇 다르다. ‘그림책 더미’는 그림책 출판을 위한 원고라는 점은 명백하지만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더미(Dummy)’는 모형이란 뜻이 있는데,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림책 출판계에서는 그림책 형식과 형태를 갖춰 만든 원고를 이르는 말로 통용된다.

 

대부분의 출판 원고가 글로써 창작된다면 그림책 원고는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것이어야 한다. 종종 글 원고와 함께 그림에 대한 표현, 아이디어를 글로 설명해 놓기도 하지만 글로만 된 그림책 원고는 출판 검토 대상으로서는 경쟁력이 현격히 떨어진다. 그래서 그림책 작가들은 판형, 쪽수를 정하여 그림을 그리고 일부 또는 전체 채색까지 마쳐 포토샵이나 인디자인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 글과 그림을 배치하고 표지까지 완성하여 가제본 형태의 책자를 만든다. 이것이 그림책 더미이다.

 

전시된 더미북들을 작가, 편집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이날 작가들은 상담용과 전시용으로 더미북 두 가지를 준비했다.

전시된 더미북들을 작가, 편집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이날 작가들은 상담용과 전시용으로 더미북 두 가지를 준비했다.

 

 

그림책 창작은 시퀀스의 창작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보통은 본문 30~32쪽으로 구성되며 연속되는 15~16컷에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완성한다. 그래서 그림책 작가들은 실제 더미를 만들기 전 단계로 영화에서 쓰이는 스토리보드(또는 콘티) 형식으로 글과 그림을 구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종종 상세하게 구현된 스토리보드는 그 자체로서 초고, 원고로 검토되어 출판 계약이 성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스토리보드 형식을 종이에 출력했다고 해서 그림책 더미라고 하지는 않는다.

 

위의 두 경우 모두 편집자에게는 출판 가능성을 가늠하기에 좋은 원고 상태임에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출판 계약이 성사되었다고 창작이 완료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십중팔구 이때부터 작가는 지난한 수정과 보완의 과정을 거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 다반사다. 종국에 원고가 마감이 되었다고 해서 작가의 역할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림책은 다른 분야의 책보다 훨씬 더 많은 디자인 요소들이 관여되고 판형, 인쇄 용지, 접지 방식, 후가공, 제본 등 여러 물성이 기획에 포함되는 매체이다. 따라서 편집과 디자인, 제조의 과정에서도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므로 그림책 더미는 미완의 상태로 수정과 보완의 숙명적 과정을 감내할 것을 전제로 한 그림책 초벌 원고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물론 정답은 없다. 더미의 품질이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면 바로 출간될 수도 있겠으나 이런 완벽한 더미를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좌) 상담을 기다리며 대기 중인 예비 작가들 (우) 참가 출판사와 작가들의 소개 및 연락처 등이 담긴 자료집이 제작되어 배포되었다.

(좌) 상담을 기다리며 대기 중인 예비 작가들
(우) 참가 출판사와 작가들의 소개 및 연락처 등이 담긴 자료집이 제작되어 배포되었다.

 

 

이런 태생적인 특성을 가진 그림책 미완성 원고 110여 개를 한자리에 모아, 평을 하고 계약 가능성까지 논해야 하는 자리이니만큼 〈그림책 더미 데이〉의 기획은 많은 것들을 고려한 사전 기획을 거쳐야 했다.

 

기성 작가이든 예비 작가이든 작품들은 완성도, 작품성, 시장성, 대중성 등 여러 면에서 품질의 편차가 꽤 크다. 이는 당연히 예상되는 사안이며 출판사 편집자들은 공감하는 바이다. 따라서 작품의 품질에 대한 정선(精選)의 필요성이 있다. 그래야 행사의 결실인 출판 계약의 성공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수준을 갖춘 더미만 대상으로 하자면 그 ‘어느 정도 수준’에 대한 공정한 기준과 선정의 프로세스가 있어야 한다. 이 기준을 정하는 일은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현재로서는 그걸 수행할 평가 조직을 구성하지 못했다. 따라서 참가에 대한 제약을 없애고 가능한 한 많은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으로 기획했다. 이로써 참여 신청한 작가들은 200명에 달했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 때문에 선착순 130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것으로 확정되었으며, 당일 최종 112명이 참여하였다.

 

이번 행사 기획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출판사와 작가의 매칭 규칙을 기획하는 것이었다. 참여 출판사는 29개사로 확정되었고 작가의 작품에도 편차가 있듯이 출판사 격차도 존재한다. 규모, 업력, 출간 종수, 시장 점유율, 인지도 등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출판사,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출판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작가가 출판사를, 출판사가 작가를 선택함에 있어 규칙이 없다면 이렇게 많은 작가와 출판사들이 참여하는 행사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없다. 당초 모든 상담을 블라인드 매칭으로 하여 작가들이 제비뽑기 방식으로 출판사를 뽑아 완전히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려 했으나 최소한 상호가 원하는 매칭을 해주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어 다음과 같이 3차에 걸친 매칭 로직이 설계되었다.

 

1차에서 작가가 선호하는 출판사를 최대 5개까지 선택하게 하고, 2차에서 출판사가 작가 중 5명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3차에서 출판사의 선택을 받은 작가가 출판사를 2개까지 선택하게 했다. 얼핏 복잡해 보이지만 작가와 출판사 모두에게 크게 쏠림이 생기지 않도록 설계함으로써 행사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림책 더미 데이〉 당일 오전에는 참여 출판사의 편집자들끼리 자기를 소개하고 명함을 교환하는 등 네트워킹 행사가 간단히 치러졌다. 삼삼오오 인연이 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판권에서 이름으로만 알아오던 면면들을 현장에서 대면하며 인사를 나누는 시간도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오후부터는 본격 출판사-작가 상담이 이뤄졌다. 작가들은 12시부터 속속 행사장에 도착했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자못 흥분된 축제의 현장 그대로였다. 1회 상담 시간은 15분씩, 출판사당 19~20회 상담을 진행했으니 당일 이뤄진 총 상담 횟수는 약 600여 회에 이른다. 작가별로는 5~6회 상담 기회를 가졌다. 오후 7시까지 꽉 채워 모든 일정이 무탈하게 마무리되었다.

 

15분마다 29회의 상담이 동시에 진행되어 총 600회가 넘는 더미 품평 상담이 진행되었다.

15분마다 29회의 상담이 동시에 진행되어 총 600회가 넘는 더미 품평 상담이 진행되었다.

 

 

작가와 출판사 편집자들이 모두 퇴장하고, 행사장을 꽉 채웠던 책상과 의자들을 정리한 후 단상에 올라 휑한 홀을 바라보면서 행사를 처음 기획하던 어느 날을 잠깐 떠올렸다.

 

‘투고 원고 채택률이 10%도 안 될 터인데, 출판사들이 참여할까?’
‘두어 달 동안 더미북을 만들어서 참여할 작가가 50명은 될까?’

 

생각은 기우에 그쳤고, 행사를 마치고 여러 입을 통해 전해 들은 평가는 대체로 후했다. 다소 고단한 여행길에 얻은 노독과도 같은 피로감은 행사 성공과 함께 사라졌다.

 

최근 몇 년 사이 대한민국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림책 관련 전시회, 낭독회, 강연, 원화전, 공연, 마켓, 체험 등의 문화행사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림책 독자는 전 연령대로 확장 중이고, 그림책의 본산이라 할 유럽에서 한국 작가들은 크게 인정을 받고 있으며, 그림책은 출판 수출 시장에서 저작권 수출 분야 상위권을 달리고 있다. 그림책과 관련된 이러한 현상들은 선진국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최근 우리의 그림책 소비 양상이 세계의 그림책 시장을 선도하는 미국과 유럽의 여러 국가들, 캐나다, 호주, 일본 등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여러 가지 시사점을 준다.

 

문화산업이 발전함에 있어 수요가 먼저인지 공급이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림책 시장에 더 많은 작가들이 진입하고 좋은 그림책이 점점 더 많이 출판되어 독자들을 만족시키면, 독자들은 더 자주 그림책을 찾고 향유할 것이다. 그리고 그림책 시장은 출판 시장 전체에서 점점 더 입지가 넓어질 것이며, 재능 있는 창작자들은 더 많이 그림책 출판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이는 그림책을 내는 출판사들이 염원하는 선순환 시장의 모습이다.

 

〈2022 그림책 더미 데이〉는 여러 시사점들을 남기고 첫 막을 내렸다. 2막, 3막도 계속 열려 한국 그림책 시장의 성장에 기여하길 희망한다. 그림책협회가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의 큰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던 데에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지원도 큰 몫을 했음을 밝힌다.

 

김상일

김상일 (도서출판 키다리 대표, 그림책협회 이사(출판사분과장))

1994년에 잡지사 기자로 출판계에 입문하였으며, 아동출판계로 옮겨 어린이책 편집, 교육용 CD 타이틀 기획, 해외 출판 저작권 구매 업무를 했다. 2000년부터 IT 기업에서 교육 사이트 서비스 및 디지털 콘텐츠 기획을 하다가 2004년에 키다리출판사를 창업하였다. 〈2022 그림책 더미 데이〉의 행사 기획과 진행을 총괄했다.
popos3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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