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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0  20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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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우리를 떠난 작가들
이어령, 이외수, 김성동, 조세희

 

 

 

진달래(〈한국일보〉 기자)

 

2023. 02.


 

부고 기사 작성은 매번 어렵다. 그중에서도 작가의 부음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켜 더 힘들다.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나를 깨우고 시대를 울린 이가 떠난 자리가 퍽 크기 때문일 테다. 안타깝게도 지난해 한국 문단에는 여러 빈자리가 생겼다. 슬픔 속 남은 이에게 위로가 된 것은 그들이 남긴 글이다. 그 글은 망자와 우리를 잇는다. 작품을 통해 떠난 이를 추억하고 기억하는 순간 작가는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고인들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 추모의 마음으로 그들의 삶을 정리했다.

 

 

 

시대의 대표 지성, 이어령

 

“‘글’은 암벽 같은 딱딱한 것을 긁는 것을 어원으로 합니다. 흔적을 남기는 것이죠. 긁다, 그리움, 그림 전부 글에서 나온 겁니다. 책은 글입니다. 말과는 다릅니다. 어떤 흔적을 남기니까 시간이 공간화됩니다. 말한 것은 사라지지만 긁는 것은 흔적으로 남습니다.”
- 『거시기 머시기』 中

 

한국의 대표적 지성, 타고난 글쟁이, 이야기꾼……. 지난해 2월 26일 89세 일기로 숨을 거둔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을 설명하는 수많은 수식어다. 교수, 학자, 평론가, 정책가. 직함 역시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단연 ‘작가’가 그에게 가장 맞는 옷이 아닐까. 언제나 글의 힘을 믿었고 자신의 흔적을 글로 온전히 남겼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쓰기 위해 항암 치료도 거부했던 그라서다.

 

고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영결식이 지난해 3월 2일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러졌다.

고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영결식이 지난해 3월 2일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러졌다.(출처: 사진공동취재단)

 

 

1933년(호적상으로는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과 같은 대학에서 대학원을 졸업했다. 20대에 〈서울신문〉 논설위원이 된 이래 여러 언론사에서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 이름을 알렸고, 이후 대학 강단과 문단을 오가며 활동했다. 1972년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을 창간해 1985년까지 주간을 맡으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이상문학상을 1977년 제정하는 데 앞장섰다. 노태우 정부 때 출범한 문화부 초대 장관(1990~1991)을 지낸 후로는 문화의 힘을 강조하며 문화계 전반에서 기획자로서도 일했다. 이제는 우리 문화의 빼놓을 수 없는 축이 된 기관인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이 설립된 것도 이때다.

 

이어령 이름 세 글자를 문단에 처음 알린 건 대학 시절인 1956년이다. 〈한국일보〉에 김동리, 황순원, 서정주 등 문단의 원로들 권위에 도전한 “우상의 파괴”라는 글을 발표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에도 한국 사회의 전환기마다 시대를 앞선 화두를 던짐으로써 ‘대표 지성’이라 불렸다. 1960년대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파헤친 에세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3)』로 ‘젊은이의 기수’라 불렸던 그는, 40년이 지나서도 가장 현재적인 담론을 펼쳤다. ‘디지로그(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접목)’, ‘생명자본주의’가 대표적이다. 평생 한국어에 대한 애정으로, 소설 『장군의 수염』, 『환각의 다리』, 희곡 『기적을 파는 백화점』,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등 문학 작품도 펴냈다.

 

2020년 1월 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1회 광화문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특별 강연을 하고 있는 고 이어령 전 장관의 모습

2020년 1월 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1회 광화문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특별 강연을 하고 있는 고 이어령 전 장관의 모습(출처: 연합뉴스)

 

 

직함은 다양해도 결국 그가 한 일은 단 하나 ‘창조’였다. 인터뷰집 『이어령, 80년 생각』에서 그는 말한다. “내가 평생 창조, 창조, 해왔잖아. 내 손에서 탄생한 우물물 한 방울이 생명의 순환을 고스란히 따랐으면 해요. 한 인간이 남겨놓은 열정 한 방울, 창조성 한 숟가락, 업적 한 그릇이 이어져서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다시 수증기가 되어 비로 내리고, 골짜기에 쏟아지고, 또 그 물 한 방울이 다시 누군가의 가슴에 작은 울림을 주면 좋겠다는 거지.” 그의 바람대로 고인이 펜을 들지 못해 녹음을 하면서까지 썼던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모두 남은 이들에게 울림이 되고 있다.

 

 

 

영원한 기인, 이외수

 

“가끔씩 이 세상 모든 신들이 내 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하지만 그대의 힘이 소진해 버릴 때까지는 절대로 도와주지 않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는 편이 그대를 더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에.”
- 『절대강자』 中

 

장발의 기인. 한때 온라인에서 독자들과 활발하게 소통했던 작가 이외수는, 그 독특한 이미지와 달리 이처럼 사랑과 아름다움을 전한 어록들을 많이 남겼다. 정치적 비판을 담은 촌철살인의 문장들이 다가 아니었다. 긴 투병 기간에도 종종 온라인을 통해 소식을 전하던 그는 지난해 4월 25일 별세했다. 향년 76세.

 

1946년 경남 함양에서 출생한 고인은 1964년 춘천교육대학교에 입학했다가 1972년 중퇴했다. 같은 해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견습 어린이들」로 당선됐고 1975년 〈세대〉지에 중편 「훈장」으로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강원일보〉 기자와 학원 강사 등의 일을 거쳐 1979년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했다.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 『들개』, 『벽오금학도』, 『황금비늘』, 『괴물』, 『장외인간』, 소설집 『겨울나기』, 『장수하늘소』, 산문집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 『감성사전』, 『하악하악』, 『청춘불패』,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했다. 그는 보기 드문 국내 베스트셀러 작가다. 1978년 출간한 첫 장편 『꿈꾸는 식물』은 70만 부 이상 판매고를 올렸고, 이 작품 이후로도 모든 작품이 40~50만 부가 팔렸다. 김현 평론가는 가족의 몰락과 도덕의 상실로 현실감을 잃어버린 청년의 인생을 섬세하게 묘사한 『꿈꾸는 식물』에 대해 당시 “섬세한 감수성과 뛰어난 상상력이 충격적”이라고 평했다.

 

2010년대 이후에는 170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트위터 대통령’으로도 불렸다. 평생을 많은 독자와 대중 곁에서 누구보다 가깝게 지낸 작가기도 하다. 거침없는 정치적 발언 탓에 많은 논란도 일으켰지만, 그 또한 ‘사람을 좋아하는 병’이 있는 성격의 이면이었다. 2006년부터 투병 전까지 지낸 강원도 화천 ‘감성마을’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언제나 독자를 만났다. 많을 때는 한 달에 400명도 넘는 이들이 찾았다고 한다.

 

사진은 2017년 고 이외수 작가가 오랜 기간 투병 끝에 암 완치 판정을 받고 쓴 여덟 번째 장편소설 『보복대행전문주식회사』를 소개하고 있는 모습

사진은 2017년 고 이외수 작가가 오랜 기간 투병 끝에 암 완치 판정을 받고 쓴 여덟 번째 장편소설 『보복대행전문주식회사』를 소개하고 있는 모습(출처: 연합뉴스)

 

 

위암 투병 중에 항암 치료를 위해 트레이드마크 같던 머리카락과 수염은 잘라냈지만, 펜을 놓지는 않았다. 책 『불현듯 살아야겠다고 중얼거렸다』, 『자뻑은 나의 힘』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선 작가의 솔직한 감정과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개인에게는 고통의 순간임에도, 작가는 여전히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고난에 처한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글들을 써냈다. 그것도 아주 유머러스하게, 이외수답게.

 

 

 

구도 문학의 김성동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을 좀 더 뚜렷하고 튼튼하게 사랑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어째서 살아 숨 쉬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요?”
-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 中

 

지난해 9월 25일 김성동 작가가 암 투병 끝에 75세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났다. 부고를 듣고 다시 살펴본 그의 작품 중 유독 소설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의 주인공 흑염소 빼빼의 말이 가슴을 때린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두고 쓴 우의(寓意) 소설로 알려졌지만, ‘살아 숨 쉬는 것들’이 비단 광주에서 스러져간 이들만을 말하진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이 대표작으로 불리지는 않지만, 이 대목만큼은 수행자의 삶을 경험했던 그가 평생 글을 쓰며 생명과 인간을 향해 던진 수많은 질문들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물음표일지 모르겠다.

 

1947년 충남 보령 출생인 고인은 연좌제 족쇄로 정상적인 삶이 어려웠다.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의 비선이었던 부친이 예비검속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수천 명의 사상범들과 함께 처형됐다는 이유였다. 1964년 서울 서라벌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도봉산 천축사로 출가해 12년간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유일한 탈출구는 문학이었다. 1975년 〈주간종교〉에서 첫 단편소설 「목탁조」로 등단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악의적으로 불교계를 비방하고 전체 승려를 모독했다”는 오해를 받으면서 승적에서 제명됐다. 환속 후인 1978년 내놓은 중편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수도승 법운이 파계승 지산을 만난 뒤 깨달음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로, 한국 사회의 병폐와 세속적인 불교를 비판해 호평을 받았다. 1981년 임권택 감독이 동명 영화로도 만들어 더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 단편 「엄마와 개구리」, 「먼산」, 「별」, 중편 「피안의 새」 등을 발표했다.

 

가족사적인 비극과 불교, 유교를 적절히 통합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 소설가 김성동

가족사적인 비극과 불교, 유교를 적절히 통합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 소설가 김성동(출처: 솔출판사)

 

 

다섯 권짜리 대하소설 『국수(國手)』는 27년이 걸려 완간된 그의 대표작이다. 19세기 후반 충청 내포 지역을 배경으로 천재 바둑 소년과 노비 천하장사, 불교 비밀결사체 등 무명씨들의 이야기를 담은 시대극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데 집중했다. 『국수사전 - 아름다운 조선말』을 여섯 번째 별권으로 짓기까지 했다. ‘아름다운 조선말’을 기억에서, 기록에서 찾아내 소설에 풀어놓는 것이 작가의 소명이라 생각한 것이다.

 

남로당 아버지의 존재는 오랜 기간 작가를 묶어 뒀다. 역사 소설, 우의 소설을 주로 남긴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1983년 이념적 갈등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풍적』을 〈문예중앙〉에 연재하다 중단당했고, 반미 정서와 학생 운동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그들의 벌판』도 〈중앙일보〉에 연재하다 두 달 만에 멈췄다. 좌절 끝에 근현대사보다 앞선 시대를 배경으로 삼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고인은 마지막 소설집 『민들레 꽃반지(2019)』로 그 무거움을 털어낼 수 있었다. 잔혹한 이념 갈등을 맨몸으로 겪은 자신의 부모님의 이야기를 다룬 자전적 단편 3편을 모은 책이다. 작가 본인은 물론, 분단으로 굴곡진 현대사를 견뎌낸 모든 이들의 삶을 다독이는 작품이 됐다.

 

 

 

난장이를 응원한 조세희

 

“우리 시대의 희망이 한 쪽으로 몹시 기울어져 있는 일을 나는 슬퍼한다. 능력 있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똑똑한 사람, 힘센 사람, 많이 가진 사람, 적당하게 가진 사람들이 협력해 우리 시대의 문제를 바로 짚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좋은 희망이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지금 당장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침묵의 뿌리』 中

 

지난해 연말 인스타그램에는 소설책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의 한 대목을 찍은 사진이 줄줄이 올라왔다. “저에게 신념의 변화를 일으킨 책”, “내 인생의 소설” 등의 글과 함께였다. 12월 25일 숙환으로 향년 80세에 숨을 거둔 『난쏘공』의 저자 조세희 작가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았다. 사진 에세이 『침묵의 뿌리』에서 만난 그의 문장은 소설과는 또 다른 울림을 준다. 참담한 현실을 증언하는, 작가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펜 대신 사진기를 들었던 시간들을 보내고 쓴 그 글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작가의 마음을 잘 대변하는 게 아닐까.

 

2008년 11월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서 열린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출간 30주년 기념 낭독회에서 고(故) 조세희 작가가 발언하고 있는 모습

2008년 11월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서 열린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출간 30주년 기념 낭독회에서 고(故) 조세희 작가가 발언하고 있는 모습(출처: 연합뉴스)

 

 

1942년 경기 가평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보성고와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돛대 없는 장선」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했다. 그는 1975년 〈문학사상〉에 난장이 연작의 첫 작품인 「칼날」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연작 12편을 모아 1978년 완성한 『난쏘공』은 산업화의 물결에 터전을 잃고 밀려나 몰락하는 도시 빈민의 고통을 다뤘다. 무려 320쇄 148만 부(2022년 7월 기준)가 발행됐다. 순수문학으로는 선례가 없는 일이다.

 

출간 당시 문단에는 이전 노동자계급 소설과 달리 일상을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충격을 안겼다. 고인은 결국 ‘어떻게 모두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경제, 정치, 철학 등 다양한 경로로 접근하고자 했다. 소설을 관통하는 그 철학적 질문은 이 작품이 시대를 넘어, 이제는 현대문학의 고전으로 불리게 했다. 또 접속사와 수식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고인만의 간결한 문체는 후배 문인들에게 본이 됐다. 허나 고인은 『난쏘공』이 계속 읽힌다는 사실에 오히려 괴로워했다. 수십 년이 지나도 그 사회적 모순이 해소되거나 개선되지 않았다는 데에 대한 자책감이었다. 그는 “더 이상 『난쏘공』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왔으면 한다”고 설명할 정도로 소설이 읽힐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랐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난장이’의 편이 되고자 했던 고인은 발로도 뛰었다. 건강이 악화되기 전인 2009년에는 용산 재개발 참사 현장도 찾았다. 이후에도 사회적 사건이 발생하면 “한마디라도 보태서 힘이 돼 줘야 하는데”라며 적극적으로 함께 하지 못하는 상황에 안타까움을 표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작가로서 역할을 다하고자 애썼던 마음은 그의 작품에 남아 앞으로도 우리를 깨울 듯하다.

 

진달래 〈한국일보〉 기자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지만 문학이 어려워 도망치듯 학창시절을 보냈다. 돌고 돌아 결국 기자로 문학을 다시 만났다. 애증의 관계지만 그래도 문학이 회복의 힘이라고 믿고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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