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35 2022. 08.
시인 김지하가 남긴 것
진달래(한국일보 기자)
2022. 8.
그림을 좋아하는 청년이었다.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미술대학은 가지 못했지만, 어깨너머로라도 그림을 배우고 싶어 선택한 게 미술대학 옆 미학과였다. 허나 삶은 항상 제멋대로 길을 내기 마련이다. 시대의 울음에 그는 펜을 들었다. 모든 것을 내놓고 시를 썼다. 그렇게 청년 김영일(金英一)은 시인 김지하(金地下)가 됐다.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의 시로 1970년대 저항문학의 상징이 됐던 김지하 시인이 향년 81세로 지난 5월 8일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타계했다. 그의 부고는 나라 안팎의 탄식을 자아냈다. 한 시대가 저물었구나. 그를 사랑했던 이, 그가 안쓰러웠던 이, 그와 반목했던 이, 그에게 실망했던 이. 모두가 그랬다. 복잡한 관계 속에서 응어리 맺힌 것이 있다면 풀자고 만든 49재 추모식(6월 25일)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느낀다. 그의 존재를 한마디로 정리하기엔 그 자리가 너무 커다랗다. 김지하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5월 9일 강원 원주시 연세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故김지하 시인의 빈소에 고인의 영정이 놓여 있다.(출처: 뉴스1)
타는 목마름으로 외친 민주주의
1941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난 고인은 강원도 원주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소년이 처음 거리에 나선 것은 서울대학교 미학과 재학 중에 벌어진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였다. 시위 참가로 인해 4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나왔다. 사회 변화에 대한 젊은이의 열망은 꺾이지 않고 더 강해졌다. 대학 졸업 3년 후인 1969년에 시 「황톳길」, 「녹두꽃」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의 시는 척박한 이 땅의 현실에 항거하는 정신, 그 자체였다. 그때 김지하라는 필명을 처음 만난다. “황톳길에 선연한 / 핏자욱 핏자욱 따라 / 나는 간다 애비야 / 네가 죽었고 /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 두 손엔 철삿줄 / 뜨거운 해가 / 땀과 눈물과 메밀밭을 태우는 /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 나는 간다 애비야…” 시 「황톳길」의 첫머리만으로도 처절한 싸움을 밀고 나가는 뜨거움을 느낄 수 있다.
‘김지하’ 이름 석 자를 널리 알리게 된 것은 1970년 5월 〈사상계〉에 판소리 가락을 빌려 쓴 300행이 넘는 시 「오적」을 발표하면서다. 그해 일어난 정부 고위층의 스캔들과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등의 책임을 권력층에 묻는 내용이었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군 장성, 장·차관 등 당시 권력층을 을사오적에 비유한 신랄한 비난으로, 그는 정권에 눈엣가시가 된다. 결국 잡지 〈사상계〉는 폐간되고 그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재차 투옥된다.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돼 긴급조치 4호 위반 혐의로 결국 사형 선고까지 받게 된다. 당시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 같은 해외 지식인들도 김지하 구명운동에 참여해 그의 이름이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덕분에 이듬해 풀려나지만, 출옥 직후 인혁당 사건 조작을 고발하는 글을 언론에 발표했다가 다시 구속됐다. 1980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기 전까지 그는 감옥에서 30대를 보냈다. 그 시기에 제3세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로터스상 특별상도 수상하고,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고 읽어 봤을 시 「타는 목마름으로」(1975)도 발표한다. “신새벽 뒷골목에 /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 오직 한가닥 있어 /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 타는 목마름으로 / 타는 목마름으로 / 민주주의여 만세”
민중문화의 뿌리를 세우다
김지하의 등장은 시위 문화의 새바람이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학생운동 중심이던 민주화 운동은 교문 밖으로 나가며 구호를 외치다 공권력에 밀리는 일이 전부였다. 굴욕적 한일회담 합의문에 반대하는 시위는 달랐다.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란 이름으로 문화행사처럼 시위를 끌어가는 그 중심에 김지하가 있었다.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 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민주주의여!”로 시작하는 그의 글은 시위대를 단결시키는 문학의 힘을 보여줬다. 그와 긴 세월을 함께 한 동지들은 그때의 김지하를 “정치학과 중심의 데모가 문화와 접목이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유홍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 같이, 자신의 예술적 생각을 시위를 할 때 그대로 표현했다.(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고 회고했다.
김지하는 1970, 80년대 민중문화 운동을 선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탈춤이나 풍물 또는 민요나 판소리 같은 우리의 전통예술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고 알려졌다. 대학가에 탈춤과 마당극이 널리 퍼지고 그것이 민주화 운동과도 연결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0년대까지도 탈춤이나 풍물 동아리 등이 이른바 ‘운동권 동아리’로 불렸던 이유의 시작에도 그가 있었던 셈이다. 1970년대 초 농촌계몽극 「진오귀굿」과 「소리굿 아구」 등을 쓰거나 지도하는 등 민중연극의 새 지평을 연 극작가이기도 하다.
생명사상에 천착한 시인
그의 말년은 생명사상을 빼곤 설명할 수 없다. 감옥이라는 한계 상황이 그를 ‘생명’이라는 화두에 처음 눈뜨게 했다. 동학을 비롯한 한국 사상의 맥락 속에서 자신만의 생명담론을 만들어갔다. 특히 탈냉전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한반도에서는 분단, 이념 대결, 지역 대결 등의 갈등이 계속되는 상황에 느낀 염증이, 그를 삶의 본질로 더 이끌었으리라 짐작된다. 그의 생명사상은 종국에 환경과 생명을 한데 묶은 사상이 됐고 문학으로 표현됐다. 최근 공개된 그의 미공개 시 8편에서도 그런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뜨겁고 / 붉은 사랑이로라 / 이 늙음 / 아니 부끄리시면 / 절벽 위 / 꽃 꺾어 / 고이 바치리 / 뜨겁고 / 붉은 / 어허, 사랑이로라” 사람과 만물에 대한 사랑을 담은 시 「헌화」는 연애 같은 사랑이 아니라 존경과 존중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노래한다.
그 스스로도 자신은 “살기 위해서” 문학을 한다고 말했다.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표현일 테다. 2002년 한국일보에 기고한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도 김지하는 “시는 내게 있어 죽음이 가득한 이 세상과 이 넋의 지옥에서 삶과 사람과 살림을 가져올 하나의 활인기”라고 말한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자문에 “한마디로 말하자. 살기 위해서다. 어찌 살려 하는가? 이 길! 나의 시, 나의 삶으로 가는 이 흰 그늘의 길! 우주 저편으로까지 이어지는 이 흰 그늘의 길에 서는 것”이라고 자답한다. 이런 맥락에서 2018년까지도 신작 시집 『흰 그늘』과 신작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출간하는 등 생의 끝자락에서도 펜을 놓지 않았다.
갈등의 서막, 위태로운 말년
시인 김지하의 모든 세월이 지지와 찬사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결정적 사건은 1991년 발생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청년들의 분신이 잇따르던 당시 이를 ‘죽음의 굿판’에 비유한 글을 쓴 게 화근이었다. 죽음을 막아보겠다는 취지로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조선일보에 냈으나, 그 결과는 민주화 세력과의 절연이 돼버렸다. 그의 글은 운동권을 ‘혁명을 위해서 사람의 목숨조차 도구로 쓰는 집단’으로 몰아가는 데 악용됐다. 결국 진보 성향 문인 단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가 김지하를 제명했고, 진보 인사들과의 사적 만남조차도 끊겼다. 배신자로 몰린 본인 역시 예상치 못한 파국을 맞고 정신과 치료를 받는 등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10년 뒤 〈실천문학〉을 통해 문제의 기고에 대한 유감 표명도 했으나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1991년 이전으로 완전히 되돌릴 순 없었다. 오히려 2012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면서 ‘변절자’로 또 다시 집중 포화를 받았다. 그의 갈지자 행보는 이후로도 종종 벌어졌다. 일각에서는 7년 가까운 수감 생활과 고문 후유증 등으로 몸과 마음이 아팠던 김지하 시인의 상황을 헤아려야 한다고 그를 대변한다. 국가폭력 피해자로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건강 상태가 아니었다는 항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목이 쓰러진 자리는 표가 많이 났고, 함께 무너진 기대의 크기만큼 진해지는 씁쓸함을 줄일 길은 없었다.
그의 죽음 앞에서 다시 읽는다
다만 그 불화도 죽음 앞에선 뜨겁지 못했다. 49재 추모제가 열린 서울 천도교 대교당에 모인 400여 명이 4시간 가까이 그를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추모위원만 250명이 넘었다. 여기엔 시인 신경림, 소설가 황석영, 김우창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등 진보진영 문화계 인사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소위 ‘죽음의 굿판’ 칼럼 이후 시인과 결별했던 가톨릭 함세웅 신부도 참석을 망설이다 “죽음을 화해의 과정”이라는 생각으로 이날 추모사를 직접 읽었다. 시기를 나눠 고인을 평가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그 칼럼의 반박문을 썼던 시인 김형수도 2001년 직접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로 찾아와 사과를 건넨 고인을 회고하며 “김지하 시인의 그림자 뒤에 엎드려 울다”라는 제목의 추모사를 발표했다. “내가 김지하 시인의 부음을 듣고 막막한 것은, 위대한 역사적 인격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에, 그 많은 후학을 남긴 스승이 ‘나머지 사람들’의 ‘섬김’을 못 받았다는 사실에, 그 장엄한 생애가 국가폭력으로 만신창이가 되어서 말년을 너무 적막하게 보냈다는 사실이 마구 겹쳐온 까닭이다.(김형수 시인 추모사 일부)”
6월 25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천도교 대교당에서 열린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에 임진택 명창, 한국 화가 김봉준, 함세웅 신부,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미야타 마리에 전 〈중앙공론(中央公論)〉 문예지 편집장 등이 참석했다.(출처: 뉴시스)
고인의 모든 글을 수용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행적을 외면할 수도 없다. 그저 흘려보내기엔 우리 안에 남은 김지하가 너무 많은 까닭에 천천히 되새겨 보는 것이 남은 자의 업이 아닐까 한다. 진달래 한국일보 기자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지만 문학이 어려워 도망치듯 학창시절을 보냈다. 돌고 돌아 결국 기자로 문학을 다시 만났다. 애증의 관계지만 그래도 문학이 회복의 힘이라고 믿고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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