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이모저모

Vol.23  20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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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이야기]
‘기본’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조현주(흐름출판 편집팀장)

 

2021. 7.


 

출판이 사업인 이상 궁극적인 목적은 영리추구다. 하지만 출판계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만든 책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잘 팔릴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 그리고 못 만든, 아니 썩 잘 만들었다고는 할 수 없는 책 역시 안 팔리는 법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때때로, 아니 빈번히 ‘편집’은 무시 받고 홀대 받는다. 많은 이들은 오자를 잡아내려고 원고에 코를 묻고, 그림의 사이즈를 줄이고 늘리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자간과 행간을 조절하는 숫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출판편집자의 다소 변태스러운(?) 집착을 이해하지 못한다. 일부는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뭐 대수냐며.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는 편집자를 향해 심지어는 무능력하다고 수군대기까지 한다. 과정은 쉽게 잊히고 결과는 오래 각인된다.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의 첫 원고를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강렬했다. 초원을 거침없이 내달리는 수백 마리의 야생마 무리를 보는 기분이었달까. 신비하고 웅장했다. 20개 남짓한 꼭지의 원고에는 일반인들이 평생을 살아도 경험할 수 없는 진귀한 내용이 가득했다. 문제는 각각의 원고가 하나같이 개성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내용도 많아서 전체적으로 상당히 딱딱했다. 내 목표는 이 책을 고고학과 에세이가 결합된 콘셉트의 대중적인 인문교양서로 만드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체적인 틀을 새로 짜는 것이었다. 나는 원고의 전체적인 구성을 재설계해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원고가 드라마틱한 플로우(흐름)를 획득하게 했다. 희곡의 플롯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순서를 재배치하고, 내용에서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과감하게 삭제하고, 좀 더 덧붙였으면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저자에게 요청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강’으로만 일관된 원고는 ‘강, 중간, 약’과 같은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한 권의 책에서 균형감은 굉장히 중요한데, 이는 독자를 완독으로 이끄는 핵심 요인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독자가 그 시간을 자칫 지루하게 느낀다면, 그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출판편집자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고고학 여행’은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제목이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던 저자의 경험을 뜻하기도 했지만, 나로서는 책을 읽고 난 독자 역시 그 여행에 동행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면 어떨까 하는 욕심이 있었다. 혹은 도슨트를 대동하고 멋진 고고학 전시회를 관람한 기분이라도 들게 하고 싶었다. 저자가 직접 찍은 다수의 사진들을 편집하는 데에는 그런 아이디어가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나의 그림을 두 페이지에 걸쳐 삽입하거나 한쪽 페이지의 귀퉁이에 위치시키거나 어두운 톤의 그림에 검정 배경을 배치한 건,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편집적인 의도가 실린 것이다.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깃털도둑

 

『깃털도둑』이라는 책은 2009년 영국의 자연사박물관에 침입해 299점의 새 가죽을 훔친 19세의 천재 플루트 연주자 이야기를 다룬 논픽션이다. 이 책의 저자 커크 월리스 존슨은 희대의 절도 사건 이면에 숨어 있는 인간의 탐욕을 다루기 위해 광범위한 역사를 조사했다. 빅토리아 시대에서부터 월리스, 그리고 20세기 내내 전 세계를 휩쓸었던 깃털 밀매까지, 정말이지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역사와 과학, 실화를 재구성하는 전체 원고의 양은 상당했다. 번역서였기 때문에 내용을 임의로 줄일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이 책은 번역 원고를 받은 순간부터 편집적인 기술을 고려해야만 했다.

 

전체 원고의 분량을 기준으로 총 몇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완성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판형과 본문 디자인은 핵심 요소다. 흔히 국배판, 사륙배판, 크라운판 하는 것이 판형을 의미하는데, 대개 가로세로의 길이에 따라 정해진다. 『깃털도둑』은 일단 손에 쥐었을 때 독자들에게 크지 않다는 느낌을 갖게 하고 싶었다. 본문 역시 가능한 많은 양의 원고를 한 페이지에 넣으면서도 시원한 인상을 줘야 했다. 원고의 양을 줄일 수 없는 외서를 마주할 때, 출판편집자들은 대개 이런 난감한 상황에 처하곤 한다.

 

다양한 판형을 실험한 후 최종 결정을 하는 것은 출판편집자의 몫이다. 본문 디자인 역시 마찬가지다. 행간과 자간을 얼마나 벌릴지, 전체 행수를 몇 행이 되게 할지, 한 행에는 몇 글자가 들어가게 할지를 출판편집자는 숙고하게 된다. 이 디테일한 결정들은 책의 가독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디자인 작업 전에 담당 출판편집자가 항상 해야 하는 필수업무다. 그러니 자간을 마이너스 5로 할지 7로 할지를 두고 고심하는 출판편집자를, 조금은 응원해주길. 본문을 인쇄할 종이를 선택하는 것도 출판편집자가 책이 어떤 형태가 되기를 바라는지에 따라서 상당히 달라진다. 본문이 400페이지가 넘어가는 책은 100그램짜리 종이와 80그램짜리 종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큰 차이가 난다. 이 책은 샘플 종이로 가제본을 제작한 후 최종적으로 종이를 선택했다. 경험적으로 많은 데이터가 출판사 내부에 축적되어 있지만 새로운 분야의 책을 만들거나 새로운 종이를 실험할 때 출판편집자는 대부분 이런 방법을 쓴다.

 

『깃털도둑』의 저자 커크 월리스 존슨은 칼럼니스트였다. 그는 우연히 알게 된 범죄 사건에 심취해 이 방대한 책을 저술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모든 역사적 사실과 각종 데이터는 그가 인터넷을 뒤져 찾아냈거나 도서관의 자료들을 취합하고, 때로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직접 취재한 결과물이다. 그건 이 책의 팩트체크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이 책을 편집하는 동안 구글링을 얼마나 했는지 되짚어 생각해보면 신물이 날 정도다. 번역된 글과 원서를 대조하는 것에서 끝낸다면 그건 출판편집자로서의 직무 유기라고 할 수 있다. 출판편집자라면 책 속에 등장하는 데이터는 확실하게 검증해야 한다. 출판편집자는 오류 없는 명백한 정보를 독자에게 전달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출판편집자가 책상에 앉아 인상을 잔뜩 쓴 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국 사이트를 들여다보고 있다면, 분명 그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앞으로 생각해주면 된다.

 

『깃털도둑』은 앞서 말했다시피 이야기의 소재나 주제는 분명 유니크하고 흥미로웠지만, 그렇다고 모든 독자들이 관심을 기울일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자기가 좋아한다고 독자들 역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 출판편집자는 생각을 고쳐먹을 필요가 있다). 때문에 책을 더 많은 독자들에게 퍼트릴 수 있는, 소위 말하는 인플루언서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많은 출판편집자들이 이 일에 어려움을 겪지만 요즘에는 필요가 아닌 필수가 된 일이다.

 

이를 위해 출판편집자는 추천자에게 책의 가치를 제대로 전달해야 하고, 설득해야 한다. 사실 한 책의 추천사를 쓴다는 건 추천자 당사자에게도 부담되는 일이다. 그 책에 어느 정도 책임을 싣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자기 책도 아닌데 책임을 져야 하는 걸 생각해보라). 이 책의 추천자 중 한 분인 한승태 작가(『고기로 태어나서』라는 기가 막힌 책을 쓰신 분이다)도 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때 꽤 망설였었다. 당시 나는 이 책에 한승태 작가의 글이 꼭 필요하다고 여겼었고, 그래서 직접 만나 뵙기를 청해 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나는 바라는 바를 이뤄냈다.

 

『오리진』은 현재의 인류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기원을 지구라는 행성의 구조와 연관 지어 살펴본 과학서이다. ‘워터스톤스’ 선정 2019년 최고의 과학책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세계 각지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하지만 좋은 책이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독자의 손에 잡힐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크지 않다. 이 세상에 좋은 책은 너무나 많다.

 

그래서 출판편집자는 책을 포장할 때 마법을 부릴 수 있어야 한다. 즉 출판편집자는 멋진 카피를 탄생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번역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원문의 의미를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독자가 호기심을 가질 만한 카피로 탈바꿈시키는 것 역시 출판편집자의 일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책!”이라는 헤드카피는 많은 동료들이 “진짜 그럴 만한 책이야?”라는 질문을 하게 했던 문장이었다. 당연히 그럴 만한 책이다!

 

오리진, 빈틈의 온기

 

최근에 담당했던 소설가 윤고은의 『빈틈의 온기』는 출판편집자로서 많은 즐거움을 주었던 책이다. 흐름출판에서 론칭한 국내 문학작가들의 산문집 ‘작가의 숨’ 시리즈의 첫걸음을 떼게 해준 뜻깊은 책이기도 하다. 나는 원고를 읽으면서 더 읽고 싶거나 궁금한 내용에 대해 항상 ‘더, 더, 더요’를 요청했는데, 출판편집자들은 저자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편집자는 저자보다 원고를 더 잘 파악하고 있고, 그래서 그 내용들이 더 빛날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제시해주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 책의 가장 앞부분에는 윤고은 작가의 내면에 머무르는 아홉 명의 윤고은이 등장한다. 한 에피소드에서 저자가 오늘은 몇 번 윤고은이 나온 날입니다, 라는 내용을 적었는데, 이를 보고 ‘본인 안에는 대체 몇 번까지 있는 건가요? 그걸 풀어볼까요?’라는 아이디어를 건넸다. 처음 이 제안을 했을 때 나보다 작가가 더 흥미로워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책을 읽은 독자들이 그 내용을 통해 윤고은 작가에 대해 더 애정을 느끼게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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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몇 가지만 정리해봤다. 출판편집자가 해야 할 주요한 일들이라고 생각되어 적었지만 이 밖에도 업무는 수두룩하다. 그 모든 일을 다 이야기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 솔직히 말해, 출판편집자가 하는 일은 출판편집자라는 직업이 생긴 이후로 계속 그 범위가 넓어져 왔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멀티플레이어의 대표적인 직업군이 바로 출판편집자다. 그런데 왜 출판편집자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건가?

 

요즘에는 출판편집자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매끄럽게 올라타야 한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 더 넓은 시야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하루하루를 쪼개고 쪼개 자신을 연마해야 한다, 한 달에 스무 권 정도의 책을 읽고, 외국어 하나쯤은 능숙하게 해야 하고, 분야와 나이, 성정에 제한을 두지 않고 그 어떤 저자를 만나더라도 유려한 말발과 풍부한 상식으로 무장해 포섭할 수 있어야 한다.’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는 편집자가 탄생했다!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비꼬자는 게 아니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당연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런 능력을 겸비한 편집자가 많아질수록 편집자의 지평은 더 넓어질 게 틀림없으니까. 상상만 해도 기분 좋은 선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편집자’라는 직업이 책의 판권란에만 겨우 올라가는 숨은 노동자 취급을 받는 현실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질을 놓칠 수는 없다. 토익 만점자라 하더라도 ‘편집’에 일류가 아니라면 그 사람은 결코 일류 편집자가 될 수 없다. 내 기준에(주관적인 기준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한다) ‘편집’은 책을 만드는 가장 기본 중 기본이다. 기본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화려한 수식어를 갖고 있는 책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좋은 책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출판편집자가 지닌 그 기본을 너무도 당연시하고 있다는 인식에 있다. 물론 출판편집자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능력이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잘못된 생각이다. 출판편집자가 오랜 시간에 걸쳐 경험을 통해, 또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얻어 낸 결정체가 바로 그 기본적인 ‘편집’ 기술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그에 맞춰 흘러가야 한다는 건, 출판편집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봐야 할 것들은 너무나 많고 해야 할 일들은 점점 늘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 짚으로 지은 집이 가장 먼저 날아간다는 걸.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 지면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 뜬금없기도 하고 다소 감상적이기도 하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에 한다. 나는 내 주위의 출판편집자들에게 늘 경외감을 갖는다. 그들은 자기 삶의 대부분을 책에 헌신한다. 한때 활자들에 쫓기는 꿈을 종종 꾼 적이 있는데, 동료 편집자들도 그런 혹은 그와 비슷한 꿈을 꾸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래, 나만 과민한 게 아니구나’ 하고 안심한 적이 있었다. 책에 바치는 열정과 고민의 시간들을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면 묘하게도 뭉클해진다.

 

불합리한 것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었다. 그런 것이 앞을 막아선다면 깨부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그 전에 해야 할 것이 있다. 제대로 된 출판편집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의 가치를 판단하는 건 누구인가? 독자인가? 마케터? 디자이너? 다른 출판 동료들? 아니면 출판사의 대표?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책을 품어야 하는 건 그 책을 담당한 출판편집자여야 한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 천천히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출판편집자는 인내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부탁인데, 함께 가자.

조현주(흐름출판 편집팀장)

흐름출판 편집팀장. 과학과 역사, 인문 에세이를 맡고 있다. 좋아하는 책은 원 없이 읽겠구나, 잘못된 로망을 갖고 출판계에 입문했다. 지금은 누군가가 좋아할 책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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