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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2  2023.04.

게시물 상세

 

시민들을 위한 지혜의 나무, 울산 지관서가(止觀書架)

 

 

 

이서안(소설가)

 

2023. 04.


 

“어디 살아요?” “울산요.” “아, 그 공업도시? 아, 그 노잼 도시?”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울산은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되었고 어느덧 60년이 지났다. 많은 이들은 울산에 대한 이미지를 공장과 굴뚝이 가득한 공업지구나 특정 기업의 이름으로 갖고 있다. 울산 안에서도 곳곳에 공업 발전을 기념하는 탑들이 있고, 무려 시민들의 축제 이름마저도 공업축제였다. 산업 수도로 존재하며 발전이라는 큰 선을 만들어 왔으나 그 이면에는 그늘진 부분이 있었다. 울산은 생존을 위한 도시였다. 인간의 생존이 가장 중요했기에 강은 오염되어 악취가 났고, 공장에서 내뿜은 매연으로 도시의 색깔마저 잿빛으로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주말이 되면 사람들은 울산을 벗어나 주변 도시에서 자연과 문화적 결핍을 해소하며 삶을 찾곤 했다.

 

공업도시로 된 지 40년이 지난 2002년, 울산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었다. 칙칙한 색만 가득하던 캔버스에 푸른색이 추가되었다. 녹색 공간에 대한 시민들의 염원과 한 대기업의 기부로 큰 규모의 도심공원이 들어선 것이다. 시민들이 숲속 공원에서 쉼의 혜택을 누리고 자연과의 공존을 시작한 것은 그즈음부터인 것 같다. 이후 태화강 조성사업으로 십리대숲이 단장되고 강이 살아나자, 철새들이 날아오고 태화강 상류에는 연어들이 돌아왔다. 오래전 떠났던 고래들도 무리 지어 찾아와 바다에서 춤추었다. 이를 시발점으로 시민들에게 자연과의 공존하는 삶을 안겨주었고, 울산은 공업도시에서 생태환경도시로의 전환기를 맞았다. 그리고 공업도시 지정 60년이 지날 무렵 숲속 공원에 심던 푸른 나무처럼 지혜의 나무인 ‘지관서가’를 시민들에게 선물로 안겨주며 정서적 안정과 함께 존재적 삶에 대한 사유를 피어나게 하고 있다.

 

>천그루숲 백광옥 대표

 

 

1호점 울산대공원 지관서가 테마: 관계(Relationship)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생존에서 삶과 공존 그리고 안팎으로 공명하는 사유로 발전하며 울산은 ‘바로 서서 너르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숲이 된 작은 나무들을 생각하며 또 다른 큰 숲을 이룰 다섯 군데의 지관서가를 돌아보았다. 제일 먼저 직장에서 가까운 1호점 울산대공원 지관서가로 자연스럽게 발길이 향했다. 때맞춰 꽃비가 내렸다. 줄지어 선 소나무 아래 수줍어하는 진달래의 향연이 울산대공원 지관서가를 에둘렀다. 숲속 산장에 들어선 듯 사람들은 저마다 책을 펼쳐 보며 깊은 사유의 시간으로 내달았다. 솔잎 가지에 맺힌 빗방울이 수정처럼 빛나는 시간이었다. 산 풍경을 바라보며 테라스에서 담소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책의 세계로 깊숙이 침잠한 사람들을 보며 지혜의 숲에서 무엇을 건질지 궁금하기도 했다. 상쾌한 공기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오래전 읽었던 『팡세』(파스칼 블레이즈, 이환 옮김, 민음사, 2003)를 다시 집어 들었다.

 

지관서가는 서가마다 테마가 있다. 울산대공원 지관서가의 테마는 ‘관계(Relationship)’다. 그래서인지 관계에 관련된 도서와 지관서가를 기획한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추천한 동서양 고전과 인생 테마 추천 도서들이 독자의 선택을 쉽게 도와주었다. 자신을 찾고 타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는 우리의 주된 관심사다. 타인을 앎으로써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모색과 지혜를 철학 서적을 통해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원 산책을 통해 육체의 쉼을 얻고, 지관서가의 도서들을 통해 정신의 쉼을 얻을 수 있었다. 카페 운영 수익금이 사회적 취약계층의 일자리 창출에 사용되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1호점 울산대공원 지관서가 내부 모습

1호점 울산대공원 지관서가 내부 모습

 

 

 

2호점 장생포 지관서가 테마: 일(Work)

 

두 번째 방문지는 장생포에 있는 2호점 지관서가다. 나에겐 장생포 바다를 올 때마다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는 애환이 있었다. 처절한 밥벌이의 현장을 살갗으로 느끼기 때문이었다. 울산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아주 먼 옛날의 사라진 고래와 포경선을⋯⋯. 고래 고기를 보관하기 위해 사용하던 냉동 창고와 물류 창고는 세월의 퇴락과 함께 버려졌다가 이제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통창으로 바라본 장생포 바다에는 정박한 배들과 포구 건너편의 화학 공장들로 울산의 역사가 재생되고 있었다.

 

한때는 고래잡이로 사람들이 들썩였던 곳이었으나 고래를 볼 수 없는 여운을 고래박물관과 장생포 문화 창고의 지관서가에서 아쉽게나마 달랠 수 있었다. 지관서가를 향해 바다의 진솔한 이야기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복합문화공간의 다채로운 행사 때문인지 지관서가를 찾는 독자들 대부분이 가족들이었다. 어쩌면 아이들이 먼 옛날 고래들이 뛰놀던 바다를 그림책을 통해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장생포 지관서가의 테마는 ‘일(Work)’이다. 울산 산업 현장의 역동성과 포경선이 포구에 정박해 있던 그 시절의 대비를 지관서가에서 떠올릴 수 있었다. 바다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일몰의 바다를 바라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과 가지게 된 것들을 노동의 관점에서 되새겨본 시간이었다.

 

2호점 장생포 지관서가 외부 전경과 내부 모습

2호점 장생포 지관서가 외부 전경과 내부 모습

 

2호점 지관서가에서 바라본 장생포

2호점 지관서가에서 바라본 장생포

 

 

 

3호점 선암호수공원 지관서가 테마: 나이 듦

 

어디를 가나 감추어져 그 은밀한 곳의 발견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공간이 있다. 선암호수 산책길을 걷다가 산길을 향해 쭉 올라가면 노인 복지회관 1층과 2층에 3호점 선암호수공원 지관서가가 있다. 사람들은 선암호수에 놀라다가 감춰진 이곳에서 한 번 더 놀란다. 백발의 종업원이 지관서가에 처음 온 독자들에게 미소 지으며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이로 인해 마음이 더없이 편안해지면서 지식의 세계로 몰입할 수 있었다. 이곳 서가의 테마는 ‘나이 듦’이었는데 복지회관과 접목해 어른들의 문화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어 새로웠다. 그 활력은 ‘나이 듦’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과 다르게 ‘살아 있음’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던지는 듯했다. 매일 책을 읽으러 오는 실버 세대들의 진풍경이 지관서가에서 펼쳐진다고 젊은 세대들이 오지 않는 건 아니다. 창가 자리를 독차지하는 건 언제나 젊은이들이다.

 

지관서가는 7명의 북 큐레이터들이 각 호점마다 인생 테마를 주제로 선별한 도서와 신간 도서를 특색 있게 배치한다. 색색의 실들이 전시된 뜨개질 코너와 독서 모임을 할 수 있는 공간들도 잘 갖추어져 있다. 창가에 앉으면 선암호수의 전경이 펼쳐지고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을 언제든 충전할 수 있어 편리했다. 기기 사용의 편리함은 다섯 군데의 지관서가마다 동일했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와 닿은 문장이나 짧은 감상평을 원고지 카드에 적어 남긴 글들이 비치된 도서들 사이에서 활자들로 빛났다. 창을 통해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을 바라보며 지혜의 나무에서 삶의 양식을 얻는 이들에게서 나이 듦의 여유가 한껏 느껴졌다.

 

3호점 선암호수공원 지관서가 내부 모습

3호점 선암호수공원 지관서가 내부 모습

 

 

 

4호점 유니스트 지관서가 테마: 명상(Meditation)

 

4호점 유니스트(UNIST, 울산과학기술원) 지관서가가 생긴 것은 작년 가을이다. 유니스트 학술정보관 1층 도서관 공간에 있다 보니 학생들이 많았다. 아직 시민들에게 홍보가 많이 되지 않아 비교적 여유로웠다. ‘비움의 공간, 연결의 시간으로’라는 안내를 따라 들어가 보았다. 미지의 행성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서가는 ‘명상’의 테마에 맞게 고즈넉한 여백의 공간 너머에 인문 도서들이 드러나지 않게 배치된 게 인상 깊었다. 비워진 그 사이에 드문드문 도서들이 있어 가볍게, 편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4호점 유니스트 지관서가 입구(좌), 창가에 위치한 독립된 공간(우) 모습

4호점 유니스트 지관서가 입구(좌), 창가에 위치한 독립된 공간(우) 모습

 

 

가막못 물빛 아래로 봄볕이 따스하게 내리쬐었다. 문장을 곱씹다가 언뜻 나뭇가지를 바라보니 새 둥지로 여긴 물체가 조심스레 움직였다. 산비둘기 크기의 이름 모를 새였다. 모든 고요를 끌어안은 듯 이름 모를 새도 마치 명상의 세계에 빠져든 듯 보였다. 창으로 들이치는 날빛을 등지고 새와 나는 오붓이 평온과 고요를 만끽했다.

 

창가 풍경을 따라가면 개인의 독립된 공간이 있다. 블라인드를 내리면 바깥과 차단돼 오롯이 책으로의 몰입을 가능하게 한다. 유니스트 지관서가에서는 매달 각 분야의 예술가나 석학들을 초청해 현장 강연이나 온라인 강연을 열고 있다. 올 3월에는 뇌 과학자 김대식 교수를 초청해 ‘인간과 기계의 공존: 챗 GPT와 함께하는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라는 주제로 온·오프라인 강연을 펼쳤다. 또한 지식 큐레이터가 진행하는 ‘책 읽는 저녁’이라는 독서 모임은 책을 좋아한다면 온라인으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오전 일찍 가막못의 물빛을 보고 지관서가에 들렀다가 밤늦게 가막못 둘레길의 가로등 불빛을 보며 돌아가는 발걸음은 왠지 뿌듯함을 안고 돌아가는 듯 보였다.

 

4호점 유니스트 지관서가 내부 모습과 강연 모습(사진: 진효숙 작가)

4호점 유니스트 지관서가 내부 모습과 강연 모습(사진: 진효숙 작가)

 

 

 

5호점 울산시립미술관 지관서가 테마: 아름다움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울산시립미술관 입구에 자리 잡은 5호점 지관서가다. 이곳도 개장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시내 중심가에 있다 보니 울산시립미술관과 더불어 많은 시민이 찾았다. 울산시립미술관 지관서가의 테마는 ‘아름다움’이다. 시각예술의 아름다움이 지관서가의 인문학과 잘 어우러졌다. 미술관에서 나오면 바로 맞은편이라 시민들이 지관서가에서 휴식을 취하며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한가로웠다. 울산시립미술관과도 잘 어울리게 지관서가도 모던한 양식으로 건축돼 깔끔한 느낌이었다. 지관서가의 창으로 미술관의 전경이 보이고 옆으로는 옛날의 동헌 풍경도 훤히 드러났다. 1층과 2층에는 테마에 따라 숭고와 열망, 예술가의 꿈 그리고 조화와 성찰, 예술가의 말 순서로 도서가 배치된 게 돋보였다. 현대미술관과 조화를 이루듯 도서를 추천해주는 키오스크도 비치돼 AI 기술로 어떤 도서를 찾아 읽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이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4호점 유니스트 지관서가 내부 모습과 강연 모습(사진: 진효숙 작가)

5호점 울산시립미술관 지관서가

 

 

지관서가의 문화 콘텐츠는 다양하다.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식의 범주를 엮어 인문학을 기반으로 삶의 지표를 설정해 준다. 각 지관서가에서 펼치는 인문 활동은 강연, 북 토크, 클래식 콘서트 음악회 등 매번 새롭다. 카페와 굿즈(생활 소품)를 통해 판매한 수익금은 소외계층을 돕는 일로 환원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마니아들의 적극적인 참여 활동으로 SNS로 홍보에 앞장서며 지관서가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의견을 항시 수렴하고 있어 인문학의 지평이 한층 확대될 전망이다.

 

2022년 울산은 ‘법정문화도시’로 지정되어 산업, 생태환경, 문화가 어우러진 도시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지금 울산 시민들은 울산을 생태환경도시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다른 지역에서도 생태도시로 탈바꿈한 울산을 관광하러 오고 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산업의 중심지가 문화의 시너지로 날갯짓한다. 폐허가 된 마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황무지에서 묵묵히 한 그루의 나무를 심기 시작해 모든 사람이 쉼을 얻도록 숲을 이룬 어느 위대한 사람이 떠오른다.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장 지오노, 김경온 옮김, 두레, 2018)의 엘제아르 부피에처럼 지관서가를 통한 이 출발의 변혁이 울산뿐 아니라 전국으로 펼쳐나가리라 본다. 2023년 5월, 울산 북구 송정에 위치한 박상진 호수 공원에 6호점 지관서가가 개점을 앞두고 있다. 보도된 바로는 우리나라에 지관서가를 100군데로 확산할 예정이라고 한다. 울산에서 출발한 여정이 경북 예천에서도 지관서가가 올해 착공돼 문화적 인프라의 폭을 넓힌다고 하니, 기업의 사회 공헌을 향한 강한 의지를 엿 볼 수 있었다.

 

지관서가가 지향하는 공통의 가치와 공간적 특색에 어울린 지관서가의 독창적 프로그램들이 더욱 다채롭게 펼쳐진다면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될 것이다. 천혜의 경관, 예술적 인프라를 갖춘 곳이 울산이다. 태화강 십리대숲을 시작으로 수려한 자연이 주는 풍경에 지식의 보고를 갖춘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고 본다. 미래 세대들이 이것을 보고 자랄 것이고, 우리 삶의 깊숙이 들어올 것이다.

 

앞으로 울산 곳곳에서 지관서가를 만나고 싶다. 2026년까지 울산 지역에 20군데의 지관서가가 들어선다고 하니 상상만 해도 설렌다. 노잼 도시가 아니라 이제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다.

 

“울산에는 뭐가 좋죠?”
“네, 수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삼은 지관서가가 있어요.
지관서가의 테마를 따라가 보면 절대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울산에는 지관서가가 있다고, 제대로 자랑하고 싶다.

 

이서안 소설가

서울과 울산으로 오가며 소설을 쓰고 있다. 2017년 경상일보 신춘, 2018년 목포문학상, 2021년 동아일보 신춘 중편소설에 당선되었다. 소설집 『밤의 연두』(문이당, 2019),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북레시피, 2022)가 있다.
tslee3000@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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