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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4  20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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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 일어난 ‘파친코’ 현상 팩트 체크

 

 

 

노정태(자유기고가, 번역가)

 

2022. 7.


 

2022년 상반기는 ‘파친코’의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던 소설 『파친코』를 원작으로 한 애플TV 드라마가 전 세계 동시 개봉하면서, 특히 한국에서 열광적인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인의 이야기가 애플을 통해 세계에 알려지다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같은 반응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문학사상사에서 출간했던 번역본이 순식간에 베스트셀러 1위 자리에 올랐던 것은 물론이다.

 

이례적인 일은 그 직후 벌어졌다. 충분히 잘 팔리고 있던 책이 갑자기 절판된 것이다. 대신 계약 만료된 소설의 판권이 시장의 매물로 등장했다. 그리하여 나온 숫자는 10억 원. 『파친코』의 재출간을 위해 지급된 선인세의 액수다. 정확한 금액은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실제로는 1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과 미국 에이전시는 최소 20만 달러(한화 약 2억 5천만 원)의 선인세, 4년의 판권 기간, 3개월마다 판매량 보고라는 조건을 제시했는데, 국내 출판사 중 인플루엔셜이 그 조건을 수용해 파격적으로 높은 선인세를 지불하면서 합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문학사상사에서 출간한 『파친코』 표지

문학사상사에서 출간한 『파친코』 표지(출처: (주)문학사상)

 

 

이민진을 향한 10억 원의 선인세. 놀랍긴 하지만 최고 기록은 아니다. 이 분야의 최고 기록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지고 있다. 출판사에서 정확한 자료를 제공하지는 않으나, 업계에 따르면 그가 쓴 세 권짜리 소설 『1Q84』의 선인세는 대략 10억 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16억 원, 두 권짜리 『기사단장 죽이기』는 20억 원이 넘었다는 얘기가 돌았다.

 

고액의 선인세를 받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용의자 X의 헌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으로 유명한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신간을 낼 때마다 억대의 선인세 계약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늘 있던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국 출판계는 왜 이럴까. 소위 ‘블록버스터’ 작품을 향해 거액을 배팅하는 ‘돈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그 결과 앞서 인용한 몇몇 사례들처럼 어떤 작가들은 본인의 모국에서보다 더 많은 인세를 한국에서 선금으로 받는 경우 또한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정작 한국 작가들이 쓴 소설은 몇몇 베스트셀러 작가를 제외하면 시장에서 그리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상황은 더욱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2022년 6월 현재 김영하의 『작별인사』가 베스트셀러 목록의 상위권을 누비고 있으나, 한국 작가의 소설이 이렇게 잘 팔리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 물론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영국 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였고, 최근 정보라의 『저주토끼』 역시 같은 상에 최종 후보로 오르는 영광을 누리긴 했지만,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적으로 받고 있는 조명에 비하면 우리 문학의 자리는 상대적으로 비좁게 느껴진다.

 

K-POP이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고, 한국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는 일이 그리 놀랍지 않은 세상이 되었지만, 우리의 문학 시장은 여전히 외국 작가들이 지배하고 있다. 대체 이런 괴리는 왜 발생하는 걸까? 한국의 다른 문화 예술 영역만큼 문학이 국내외적인 사랑을 받게 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파친코’ 현상을 좀 더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자.

 

가장 흔한 오해부터 해결해야 한다. 『파친코』는 한국 소설이 아니다. 당연한 소리 같지만 모든 사람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파친코』가 애플TV에 의해 드라마화된다고 발표되었을 때,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공개되었을 당시의 기억을 돌이켜 보자. 마치 ‘한국 문학의 승리’, 더 나아가 ‘한국 드라마의 세계 정복’인 것처럼 환호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호들갑스럽게 울려 퍼졌다.

 

안타깝지만 그 모든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파친코』는 미국 소설이고, 드라마 〈파친코〉 역시 미국 자본에 의해 미국 제작진이 만든 미국 드라마다. 다만 그 출연진으로 배우 윤여정과 김민하, 이민호 등 다수의 한국인이 주연으로 등장한다는 점이 이례적일 뿐이다. 콘텐츠 제작업계에서는 초심자라 할 수 있는 애플이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를 원작으로 삼아 거액의 제작비를 투입해 드라마를 만든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미국 관객, 더 나아가 미국의 대중문화에 친숙한 글로벌 관객층에게 호소하기 좋은 이야기라는 전략적 판단이 깔려 있는 것이다.

 

애플TV에서 제작한 드라마 〈파친코〉 포스터

애플TV에서 제작한 드라마 〈파친코〉 포스터(출처: 애플TV)

 

 

『파친코』의 배경과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해 보자. 이야기는 크게 세 개의 시공간을 무대로 펼쳐진다. 주인공 선자는 20세기 초의 부산에서 태어나 성장한다. 일제 치하의 조선에 살던 선자는 우여곡절 끝에 오사카로 이주하게 되고 재일 조선인 즉 자이니치 사회에 뿌리를 내린다. 재일 조선인들은 일본 사회의 차별로 인해 소위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그래서 파친코 같은 불법성 강한 업종에 종사하거나 야쿠자가 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선자는 아들과 손주들을 최선을 다해 길러냈지만, 1990년대 초 일본의 버블 경제 붕괴와 함께 선자와 재일 조선인 3대의 여정은 또 한차례 고비를 맞이한다.

 

여기서 짚어볼 수 있는 포인트. 『파친코』는 이민자 문학, 그중에서도 ‘디아스포라’ 문학이다. 디아스포라의 사전적 의미는 해외 이주민 공동체를 뜻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보다 좀 더 복잡한 맥락을 지닌다. 가령 최근 실리콘 밸리에서 각광받는 인도의 고급 IT 인력 이민자들은 이주민이긴 해도 ‘디아스포라’라 불리지 않는다. 반면 『파친코』의 오사카 자이니치처럼 시대와 역사의 흐름 속에 자의건 타의건 타향살이를 하게 된 이들, 차별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고국으로 향하지 않았거나 그럴 수 없었던 이들은 디아스포라로 불린다. 가장 열악한 여건에서 힘들게 타국 생활을 하는 이주민들이 바로 디아스포라라는 뜻이기도 하다.

 

『파친코』가 미국 시장을 공략할 수 있었던 특장점이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미국은 다양한 나라에서 건너온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파친코』를 드라마로 제작하기로 한 애플이 노린 점도 바로 그것이다. 재일 조선인들이 겪은 차별의 이야기가 애플TV의 드라마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나라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나가는 이민자들, 그들이 겪어내야 하는 고난의 역사, 그 이야기가 미국 시장에서 갖는 보편적인 호소력 때문인 것이다.

 

〈파친코〉의 제작과 발표를 보며 “미국이 일본 대신 한국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식의 유치한 반응, 소위 ‘국뽕’이 등장하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파친코〉가 갖는 근원적인 힘은 디아스포라 문학에서 출발한, 이주민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라는 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언론 보도와 리뷰를 보면 〈파친코〉가 공개된 후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주민 가정에서 긍정적인 리뷰가 쏟아져 나왔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수많은 이민자와 그 후손들에게 ‘우리 할머니, 아버지, 혹은 나의 이야기’로 느껴지는 것, 그것이 〈파친코〉가 갖는 힘의 근원 중 하나다.

 

‘파친코’는 디아스포라 문학이며 그에 기반을 둔 드라마다. 그래서 ‘파친코’는 그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초국가적인 보편성을 지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그 어디에도 ‘우리’로 속하지 못하는 디아스포라를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파친코’를 ‘한국의 승리’라는 식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이니치 중 상당수는 대한민국뿐 아니라 북한이라는 나라가 성립하기 전인 조선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이며, 한국과 북한 중 어떤 나라의 국적도 신청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이니치들이 ‘특별영주권자’의 신분으로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이유다. 그래서 그들은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불편을 겪어야 했다. 여차하면 일본에서 추방당할 수 있다는 직간접적인 위협을 당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소설 및 드라마를 통해 ‘파친코’는 그 점을 잘 그려낸다. 1990년대 초, 아주 오랜만에 고향인 부산에 와서 공무원과 대화를 할 때, 선자는 스스로의 법적 신분을 ‘특별영주권자’로 설명한다. 이러한 설정은 오늘날 미국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가장 뜨거운 정치적 갈등과 맞닿아 있다.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의 당선을 낳은 원동력인 ‘불법 이민자’의 이야기를 바로 그 이민자들의 편에 서서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파친코〉가 깔고 있는 설정 및 사회적 배경은 철저히 미국적이다. 등장인물의 성격 및 갈등의 구조 역시 마찬가지다. 할리우드에서 공식화되어 오늘날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작법이 〈파친코〉 내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이는 특히 주인공인 선자의 성격 및 선자가 품고 있는 갈등의 구조를 통해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선자는 부산의 어시장을 오가며 돈 안 되는 일을 하다가 일본에서 온 야쿠자 중간보스인 고한수를 만난다. 한수는 선자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게 해주겠다며, 자신의 첩이 되라고 한다. 선자는 그런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일말의 여운조차 남기지 않는다. 훗날, 돈과 권력이 아쉽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선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 자신을 반으로 갈라놓고 살 수는 없데이.”

 

나는 죽어도 첩이 되기는 싫다, 가난해도 정실부인이 되어야겠다, 혹은 내 자식을 첩의 자식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등의 이야기가 아니다. 20세기 초에 태어나고 자란 한국의 ‘어머니’가 떠올릴 법한 대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영어로 저술된 후 부산 지역의 방언으로 번역된 것이어서, 그 속에 담긴 정서는 부산 또는 한국이 아닌 미국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내적 일관성과 윤리적 기준에 맞춰 행동하는 ‘미국적’인 캐릭터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캐릭터의 설정과 판단, 행동의 움직임은 철저히 미국적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할리우드에서 개발하고 전 세계로 보급한 ‘표준 캐릭터’의 그것에 가깝다. 한국의 어머니나 여성들이 주체적이지 않다거나 본인보다 가족만을 우선시한다고 단언하고 싶지는 않으나, 한국의 토속적인 정서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선자는 21세기의 여성 독자나 시청자의 눈높이에 맞는 주체적이고 당당한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로 이러한 특징이 ‘파친코’를 ‘한국 문학’이나 ‘한국 드라마’가 아닌 보편적인 무언가로 만들어준다. 미국적인 정서에 기반을 두고 쓴 이야기를 바탕으로 미국적인 드라마를 만들었는데, 그러한 정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소재 면에서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할 무렵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을 다루고 있지만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파친코’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 및 그로 인해 탄생한 자이니치라는 디아스포라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재 차원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민자 커뮤니티, 그리고 그 속에서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여성의 자의식과 주체성이라는,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인들에게 익숙한 보편적 주제를 다루는 보편적 이야기인 것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한국의 출판계는 『파친코』를 비롯하여 수많은 해외 문학에 많은 선인세를 주고 수입해오는 일을 반복하고 있을까? 물론 지금은 초대형 국산 베스트셀러가 터져 나오던 1990년대와 달리 대중이 보고 듣고 즐길 거리가 많아졌다. 하지만 우리의 문학이 독자들의 높아진 눈높이에 걸맞은 콘텐츠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성을 스스로 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히가시노 게이고, 이민진 혹은 민진 리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이들은 보편적인 호소력과 읽는 재미를 지닌 작가들이다. 그래서 해외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우리의 출판업자들은 기꺼이 값비싼 선인세를 내고 그들의 판권을 사들인다. 이러한 현상에 개탄할 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업계의 내부자라면 그 손가락질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혹은 자기 자신에게 향해볼 필요가 있다. 창작자, 편집자, 출판업자 등, 한국의 문학계는 과연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파친코’는 좋은 작품이다. 하지만 우리의 아픈 역사를 소재로 삼은 미국 소설과 드라마가 이토록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커다란 숙제와도 같다. 우리는 그것을 그저 읽고 보고 즐기고 지나가서는 안 된다. 제2의 ‘파친코’는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기를 기원한다.

 

 

 

노정태

노정태 자유기고가, 번역가

자유기고가이자 번역가이다. 『아웃라이어』,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등을 한국어로 옮겼고,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프리랜서』 등을 썼다.
basil83@gmail.com
https://www.facebook.com/jeongtae.r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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