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이모저모

Vol.26  2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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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이야기]
16주 만에 쓰는 편집본부장 인수인계서

 

 

 

박태근(위즈덤하우스 출판사 편집본부장)

 

2021. 10.


 

15년 전 편집자 생활을 시작한 이래 최근까지 스스로 편집자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내가 하는 일이 편집이라는 데에 전혀 의심이 없었다. 출판사에서 온라인 서점으로 자리를 옮겨 11년 넘게 일하면서도 이런 생각에는 변화가 없었다. 새롭게 열린 책의 공간에도 편집자의 역할이 필요할 테고, 원고를 책으로 만드는 일은 아니지만 숱하게 나오는 책 각각의 의미를 살피고 연결고리를 찾아 맥락을 구성하는 일은 당연히 편집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장에서 MD로 일하면서도 스스로를 편집자라 믿었던 덕분에, 때로는 둘 사이의 거리와 차이를 오가며 필요와 상황에 따라 긴장과 가능성을 즐겼기 때문에, 그 시간이 여전히 즐겁고 뜻 깊은 때로 기억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막상 출판사로 돌아온 후 이런 생각이 흔들리며 편집자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지 되묻게 되었으니 의아하고 신기하다.

 

 

 

본부장님, 무슨 일 하세요?

 

지금 일하는 출판사에서 맡은 역할은 본부장,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편집본부장이다. 어떻게 부르든 편집보다는 본부장이 문제가 아닐까 싶긴 하다. 한때 온갖 드라마에 등장하던 실장이 어느 때부터인가 본부장으로 바뀌었고, 주간과 편집장으로 구분되던 출판사 편집부의 직함도 본부장과 팀장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주간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이들을 출판계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본부장이 주간을 대체하는 표현인지, 출판사가 아닌 일반 회사의 명칭을 그저 활용할 뿐인지, 아니면 다른 업무 역량과 역할을 반영한 직책인지는 따로 논의된 적이 없는 듯하고, 이렇게 불리는 나 역시 별다른 고민은 없었다. 하지만 막상 편집자로 돌아온 걸 환영한다는 동료들의 인사에 편집자로 돌아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답하게 되는 걸 보면 생각해볼 구석은 있겠다 싶다.(참고로 필자가 다니는 출판사는 수평 호칭을 사용하기에 내부에서 직급을 부르거나 직급으로 불릴 일은 극히 드물다.)

 

우선 온라인 서점의 도서팀장에서 출판사의 편집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자주 들은 질문을 떠올려본다. “기획도 직접 하시나요?” 본부장이 직접 기획을 하는 게 보통인지, 직접 기획까지는 하지 않는 게 보통인지 확인하기 어려울뿐더러, ‘직접’이 어느 정도의 관여를 뜻하며 ‘기획’은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염두에 두는 질문인지 알 수 없어 답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 않는다고 답하면 마땅히 해야 할 일 혹은 기대되는 일을 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 것 같고, 직접 한다고 답한다면 굳이 끼어들지 않아야 할 일에 참견하며 훼방을 놓는 듯한 느낌이 들 것 같아서, 어느 쪽으로도 시원하게 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며 지나가곤 한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역시 본부장이란 역할이 드문 터라 궁금한 게 많은 듯하다. 앞선 질문을 살짝 비껴갔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는 순간 이내 다음 질문이 도착한다. “그럼 무슨 일을 하시나요?” 차라리 “본부장도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을 하나요?”처럼 말도 안 되는 시대 역행 질문을 해주면 마음이 편하겠다 싶을 정도다.(참고로 필자가 일하는 출판사는 자율 유연근무제로 출퇴근 시간은 각자 정하고 이를 기계적으로 관리하지 않는다.) 일단 이 질문에도 “편집을 합니다.”, “기획을 합니다.”로 답하기는 어렵겠다. 앞선 답변은 교정교열 등 편집 실무를 맡을 상황이 드물어 오해의 여지가 크고, 뒤의 답변은 앞서 나눈 “기획도 직접 하시나요?”로 되돌아가는 방향이라 선택이 불가하다. 상황이 이러니 어쩐지 본부장은 본부장의 일을 한다고 답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싶어진다. 아니 내가 하는 일, 하고자 하는 일이 이곳에서, 나의, 편집본부장으로서 일이라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매일을 드라마처럼

 

이 글을 쓰는 시점은 내가 이곳에서 편집본부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지 16주를 꽉 채우는 날이다. 이렇게 말하면 주간 단위로 근무 기간을 세고 있느냐며 의아해 하는데 따로 적어두거나 알림을 활용하여 기억하는 건 아니다. 그만큼 한 주 한 주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쌓이고 있다는 설명도 가능하겠고, 이전에 일했던 출판사와 온라인 서점을 말할 때에도 각각 43개월, 136개월을 다녔다고 말하는 걸 보면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이라는 확증도 타당하겠다. 어쨌든 16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무슨 일을 해왔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간 단위로 확인된 업무와 주간 단위로 확장된 역할, 그리고 그 가운데 꾸준히 겹치며 핵심에 놓인 일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설명할 수 있다.

 

실제로 입사 직후 초기에는 하루하루의 변화를 드라마 제목처럼 정리하며 극소수의 사내외 동료들과 나누기도 했는데, 전체 제목은 출판사 이름과 앞서 소개한 수평 호칭을 조합한 〈지혜의 집에 불시착한 테오 박 고흐 본부장〉이다. 설명을 붙이자면 닉네임 테오는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 테오 반 고흐, 그러니까 빈센트 반 고흐가 숱하게 보낸 편지의 수신인에서 따왔다. 일하는 출판사에서 가장 오래 꾸준히 읽힌 책이 『반 고흐, 영혼의 편지』라 그에 대한 존중을 담고 싶었고, 본부 구성원들이 고민되거나 어려운 상황을 만나 용기와 위로가 필요할 때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바람을 담은 이름이다.

 

테오 반 고흐

 

드라마는 입사 첫 날 1화부터 시작해 20일째 되는 날 20화로 막을 내렸다. 출근을 하는 평일에만 방영을 했으니 총 4주 동안 진행된 셈이다. 제목으로만 기록되었고 시놉시스와 원고는 머리와 가슴에만 새겨진 터라 궁금증을 풀어드리긴 어렵겠지만, 이 글에서 처음으로 전체 제목을 공개한다.

 

1화:
사람이 많다!

 

2화:
벌써 보이는 건 결말이 아니다

 

3화:
최적 경로의 출발점은 언제나 현 위치

 

4화:
주사위를 던지기 전에 할 수 있는 것들

 

5화: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겠다

 

6화:
실패한 농담을 책임지는 방법

 

7화:
하고 싶은 말을 들어라

 

8화:
입이 트였다! 지켜야 한다!

 

9화:
우리가, 우리를, 우리는

 

10화:
현장은 어떻게든 남는다

 

11화:
돌다리는 그냥 건너도 될까요?

 

12화:
듣고 나서 해야 할 일, 더 듣기

 

13화:
언제나 마지막 차례

 

14화:
두드려도 열 수 없는 문

 

15화:
손이 아니라 머리가 바쁜 일

 

16화:
테오가 먼저 보낸 편지

 

17화:
형태와 기능, 의도와 결과

 

18화:
점차 가까워지는 골짜기

 

19화:
아름다울 수 있는 최대한

 

20화:
잘할 거고 잘될 겁니다!

 

다행히 20화 제목에서 해피엔딩의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현실은 20화에서 막을 내리지 않고 16주까지 이어졌으니 최종 결말이 어떻게 나올지 나 역시 궁금하다. 물론 드라마 역시 이렇게 끝나는 건 아니다. 마지막 화 제목을 전하며 덧붙인 종영 인사는 다음과 같다. “그동안 시청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시즌 1 불시착 편은 오늘로 막을 내립니다. 시즌 2 정착 편은 추후 편성이 확정되는 대로 소식 전하겠습니다. 그때까지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여전히 확정되지는 않았고 제작 여건과 투자 상황에 따라 변경될 여지가 적지 않지만, 제작, 각본, 감독, 주연을 함께 맡는 이로서 연내 방영을 짐작하고 기대한다. 마찬가지로 극소수의 사내외 동료들에게만 개별적으로 전해질 예정이니 궁금하신 분들께서는 따로 연락주시길 부탁드린다.

 

 

 

벌써 준비하는 인수인계

 

만 16주 근무에 어울리지 않지만, 또 다른 해피엔딩으로 인수인계를 상상해본다. 인수인계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을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우선 전임자의 흔적을 최대한 지우고 새롭게 출발하는 경우라면 인수인계의 절차가 필요하지 않을 테고, 내가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일했는지보다 새로 오는 이가 어떤 생각으로 무슨 일을 펼칠지가 훨씬 중요할 테니 따로 준비할 게 없이 조용히 떠나면 충분하겠다.(물론 이 경우가 해피엔딩인지 아닌지는 현재로서 짐작하기 어렵다.) 두 번째는 다음 편집본부장에게 직접이든 간접이든 업무의 얼개와 내용을 담은 매뉴얼을 전하는 경우일 텐데, 이때를 상상하며 전하고픈 이야기를 매뉴얼이 아닌 줄글의 방식으로 편히 정리해보면 나라는 사람이 편집이라는 활동을 거쳐 편집본부장으로 일해 온(16주에 불과하지만) 현재까지의 고민과 생각과 활동을 나눠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편집본부장이 하는 일을 의미 중심으로 정리하여 인수인계의 머리말을 적는다면 ‘기획, 편집 과정에서 필요한 판단의 방향을 제시하고 구성원들과 수시로 논의, 점검하며 설명하고 설득하여 조직 전체에 공유되고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편집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판단이 필요한데, 이론적으로는 해당 책의 독자를 중심에 두고 편집자의 지향을 더한다지만 실무 진행 과정에서는 전자는 사라지고 후자만 남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앞서 언급한 ‘판단의 방향’은 ‘판단의 기준’이 아니기에 교정교열 원칙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개별 편집자가 아닌 팀 단위, 본부 단위, 출판사 단위의 에디터십에 가깝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고정된 기준이 아니기에 마주한 상황이 영향을 미쳐 방향을 조정하기도 하고, 조정의 크기에 따라 적용되는 범위와 층위도 달라질 텐데, 핵심은 이 논의에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고 상황과 결과 또한 구성원 모두에게 충실히 설명하여 현장에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함께 모여 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앞서 업무에서 마주하는 이론과 현실의 차이를 말했는데, 그 간극을 줄이는 데에도 꾸준한 상호 확인과 점검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앞서 나눈 편집본부장의 일 그리고 ‘판단의 방향’은 모두 구체적이지 않은 이야기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자. 편집자들이 흔히 “위에서 떨어졌다.”고 말하거나 ‘민원 원고’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출판사 대표를 비롯하여 대체로 상급자들이 관계나 상황이나 취향이나 지향이나 판단에 따라 제안하는 기획이나 원고를 말한다. 이 경우 원고를 가져온 이가 이후 편집을 거쳐 출간에 이르기까지 실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담당자는 의견을 내거나 판단을 하지 않고 처음 원고를 가져온 이에게 모든 판단을 위임하고는 그야말로 수행에 집중하여 일을 끝마치게 되는 상황이 전개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이들이 나에게 물어본 “기획도 직접 하시나요?”와 이야기가 다시 연결된다. 숱하게 쏟아지는 에이전시의 외서 소개 메일에서 반짝이는 책이나 생각이 맞닿는 책을 발견한다거나, 독자로서 반갑게 마주했던 저자와 도모해볼 새로운 기획이 떠오를 수도 있다. 혹은 애초 이 자리에 오고자 했을 때부터 마음에 품은 기획이나 다뤄보고 싶은 주제가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현재 맡은 업무를 고려하면 개별 도서의 편집 과정까지 도맡아 진행하기는 어려울 게 분명한데, 그렇다면 위에서 떨어졌다고 여겨지거나 민원 원고라 불리지 않고 이를 실현할 가능성은 없는 걸까. 앞서 소개한 ‘불시착 편’을 넘어 ‘정착 편’을 지난다면 새로운 탐험과 모험도 떠나게 될 텐데, 그 과정에서 조직의 운영과 관리뿐 아니라 기획과 편집의 시도도 당연히 예상되니, 머지 않은 때에 한동안 마주할 혹은 끝까지 고민될 주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 생각들을 그러모아 보니, 편집본부장에서 문제는 본부장이 아니라 편집에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당연한 일인데 이만큼 쓰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니 앞날이 걱정이다. 본부장이 되고 싶거나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편집본부장이라는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었던 것이니, 문제든, 핵심이든, 다른 그 무엇이든 방점은 편집에 두는 게 당연하겠다. 왜 출판사로 돌아오고 나서 오히려 편집자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지를 되묻게 되었는지, 이제는 의아하고 신기한 마음이 아니라 반갑고 감사한 마음이다. 계획된 도착이 아닌 불시착이었지만 잘 돌아왔다고, 앞으로의 탐험과 모험도 무척 흥미로울 거라고 되뇌어 본다. 모쪼록 다음번에 편집본부장으로 다시 이야기를 전할 때에는 ‘판단의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지나온 항로와 유효한 방법까지 담아, 완성된 인수인계 자료를 제출하며 ‘탈출 편’으로 만나길 기대한다.

박태근

 

박태근(위즈덤하우스 출판사 편집본부장)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다가 자리를 옮겨 온라인 서점에서 MD로 일했고, 지금은 위즈덤하우스 출판사에서 편집본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편집자를 위한 실험실' 연구원으로 출판계에 필요한 이야기를 나누며, 여러 매체에서 책을 전하는 목소리를 내며 '책이야기꾼'으로 활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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