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이모저모

Vol.30  2022.03.

게시물 상세

 

재개발에 직면한 헌책방 메카, 보수동 책방골목

 

 

 

김성일(혜광고등학교 국어교사)

 

2022. 3.


 

‘헌책’하면 여러분들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다들 학창시절에 한 번쯤은 참고서나 만화책을 사고 팔아본 경험을 떠올리거나 책장 한편에 꽂힌 낡은 헌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가 생각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온라인 대형 서점 위주로 출판 시장이 재편되고 전자책의 유통 비중이 증가하면서 골목 서점들은 하나둘씩 사라져갔고, 어느새 헌책은 우리에게 ‘과거’의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새 책에 대한 공급 부족으로 헌책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1960년대, 각 시도마다 헌책방 밀집 지역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고, 고도의 경제성장과 독서 문화 붐이 일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의 청계천, 인천 배다리 거리, 광주 계림동, 대구 남산동 등 전국 각지의 헌책방 골목은 신학기와 주말마다 발 디딜 틈 없이 성행했다. 하지만 세월의 변화 속에서 이제는 대부분 사라지고 몇몇 헌책방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새 헌책방 ‘골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도 전국에 단 한 곳만 남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부산의 ‘보수동 책방골목’이다.

 

보수동 책방골목 전경


보수동 책방골목 전경

 

‘보수동 책방골목’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 온 학교들이 보수산 기슭에 자리를 잡아 만들어진 노천교실의 통학로이자 배움에 목마른 학생들에게 양서 공급처가 되었다. 그리고 서편으로는 임시수도 정부청사와 국회의사당, 작전사령부를 지척에 두고, 남편으로는 국제시장을 끼고 있는 요충지로서 피란수도 부산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또한 군부 독재 시절에는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책 관련 소비자 협동조합인 ‘양서협동조합’이 설립되면서 전국적인 화제를 일으킨 동시에 부산 민주화 운동의 세력 집결지 역할을 하였으며, 영화 변호인을 통해 잘 알려진 ‘부림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나면서 부산 민주항쟁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보수동 책방골목 뒤편으로 뻗은 돌계단 세 곳과 축대 일대는 1930년대 축조된 것으로 일제강점기의 생생한 흔적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관광 포토존으로 많은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처럼 ‘보수동 책방골목’은 우리나라의 근대 역사 유산인 동시에 부산을 대표하는 문화명소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에는 부산시에서 ‘미래유산’으로 지정하기도 했지만 세월의 변화와 재개발 위기 속에서 한때 백여 곳에 달했던 서점은 이제 서른여 곳 남짓 남게 되었다. 게다가 코로나 사태까지 겹쳐 시민들의 발걸음마저 줄어든 안타까운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골목의 위기를 가속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본 가치의 ‘상승’ 때문이었다. 경기 침체와 별개로 불어닥친 부동산 시장의 활황은, 남포동과 국제시장을 지척에 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보수동 책방골목의 부동산 가격을 뛰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건물 세입자이며 평균 연령대가 70대로 노령화된 책방골목 서점 주인들은 재개발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재작년인 2020년에 책방골목 입구 오른편의 건물이 주거용 오피스텔 건축을 위해 철거되면서 여덟 곳의 서점 자리가 한꺼번에 사라진 이후, 최근에 책방골목 터줏대감 역할을 하는 서점 세 곳이 위치한 건물이 또다시 오피스텔 재개발을 위해 매각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제는 ‘책방골목’의 정체성이 한순간에 사라질지도 모르는 ‘존폐 위기’에 놓인 것이다.

 

보수동 책방골목 중앙 모습(돌계단과 축대)


보수동 책방골목 중앙 모습(돌계단과 축대)

 

누군가는 재개발 또한 사유재산 보호를 위해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온라인 서점과 전자책의 시대에 종이책의 가치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고도 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보수동 책방골목이 부산의 문화유산으로 대내외적인 인정을 받아왔음에도 70년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국가 차원에서 문화지구나 경관지구 설정 등을 시도하지 못하고 일반 상업지역으로만 분류되어 그 어떤 난개발에도 무방비일 수밖에 없으며 그동안 지자체에서 책방골목 개발 및 보존에 대한 가이드라인조차 마련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리고 한번 사라진 책방골목은 되살릴 수 없으며 돈으로 대체할 수 없는 문화의 가치를 기억한다면 조금은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또한 서점과 책의 가치는 어떠한가? 온라인 서점이 확대되는 만큼 성장하고 있는 것이 독립서점 시장이며, 정보를 습득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독서에는 전자책이 유용하지만 책장을 넘기며 문장을 사유하고 삶을 성찰하는 독서는 분명 전자책이 대체하기 힘든 종이책만의 고유한 가치일 것이다.

 

그동안 보수동 책방골목에서도 여러 차례 활성화 정책들이 나왔고, 다양한 도시재생 사업들이 진행되었으며 무수히 많은 분의 노력이 앞서 있었지만 어떤 방식으로 보수동 책방골목을 살리고 어떻게 헌책에 대한 독서 문화를 활성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정답을 행정적으로 찾기는 어려웠다. 본인 역시 인근 지역에서 태어난 부산 원도심의 토박이로서 학창시절 무수히 지나다닌 등굣길이자, 가족이며 친구들과 많은 추억이 깃든 보수동 책방골목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지만 선뜻 나설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사범 대학 졸업 이후 교사가 되어 원도심으로 돌아온 이후 보수동 인근 고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면서 보수동 책방골목을 ‘교육’의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수동 책방골목의 한 식당에 들렀다가 우연히 ‘보수동 도시재생 동아리 주민 공모 사업’ 포스터를 보게 되면서 이곳과 특별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2020 동주여자고등학교 『보수동 책방골목 와보시집』 전시회, 최대호 시인 초청 강연


2020 동주여자고등학교 『보수동 책방골목 와보시집』 전시회, 최대호 시인 초청 강연

 

단편영화 시나리오 회의 모습, 단편영화 촬영 현장


단편영화 시나리오 회의 모습, 단편영화 촬영 현장

 

당시 포스터에서 눈길을 끈 것은 ‘사업’이란 딱딱한 단어가 아닌 교사에게 친근한 ‘동아리’라는 말이었다. 학생들의 독서 활동과 연계해 보수동 책방골목 동아리를 만들어 본다면 지역사회에도 보탬이 되고 국어 교육적으로도 의미가 남다를 것이란 작은 아이디어에서였다. 시작이 반이란 말처럼 일단 당시 재직 중이던 동주여자고등학교 방송실 마이크를 잡고 보수동 책방골목을 알리고 싶은 동아리원을 모집한다는 공지를 내보냈고, 1학년 학생 7명이 한걸음에 모이게 되었다. 그렇게 결성된 것이 보수동 책방골목 동아리 ‘예그리나’였다. 옛것을 그리워한다는 동아리 이름처럼 어떻게 보수동 책방골목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을지 학생들과 머리를 맞댔다. 국어 교사로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문학’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생소할 수 있는 피란시절의 문학을 읽고 지역 문인들을 이해하는 것은, 자칫 주객이 전도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누구나 친숙하게 문학 활동을 하고 보수동 책방골목을 가까이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학생들의 매체 환경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SNS에서 감성을 담은 짧은 시 문구에 익숙해 있으며 이것이 새로운 온라인 문학의 유행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상욱 작가의 이야기를 꺼내자 학생들과 문학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시험이 끝난 후 국어 수업 시간에 보수동 책방골목에 관한 뉴스를 시청했고, 다함께 SNS 시 창작 활동을 하게 되었다. 동아리원들과 함께 시 원고를 모았고, 우리 손으로 한 자 한 자 필사해보자는 아이디어까지 나왔다. 이후 SNS 시인을 찾아보다 베스트셀러 『읽어보시집』으로 유명한 최대호 작가와 연락이 닿게 되었고, 멀리 수원에서 흔쾌히 부산의 학교로 와서 문예창작 강연까지 열게 되었다. 강연에서 작가는 책방골목 시집 제작에 참여를 약속해 주었고,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불과 몇 달 만에 작가와 고등학생의 컬래버레이션 시집이 기획되었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 『보수동 책방골목 와보시집』이었다.

 

SNS 문학의 무한한 잠재 가능성을 확인한 나는 학생들이 무엇보다 친숙한 매체인 유튜브로 눈길을 넓히게 되었다. 보수동 책방골목을 유튜브에 검색해보니 브이로그나 기록 영상은 찾기 쉬웠지만 책방골목의 풍경을 아름답게 담은 영상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눈에 띄었다. 때마침 영상 제작에 관심을 두고 관련 온라인 동호회 카페에 가입해두었던 것이 생각나서, 무작정 카페에 접속해 보수동 책방골목의 사정과 함께 꼭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영상으로 담아보고 싶다는 글을 게시판에 썼다. 그리고 기적은 또 한 번 일어났다. 아이들과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댓글이 수십 개가 달렸다. 기왕 찍을 거 짧은 단편영화가 낫다는 여론까지 생겨났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오겠다는 아마추어 단편영화 촬영팀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해서 필무비의 차경훈 감독의 재능기부로 보수동 책방골목 역사상 최초의 청소년 단편영화 “책방골목에서”가 탄생했다. 6분 분량의 짧은 단편영화였지만 학생들의 순수한 마음과 재치 있는 연기에 지역사회와 언론의 반응은 뜨거웠다. 부산시에서는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온라인 상영을 도와주었고 문화체육관광부와 시교육청에서는 SNS를 통해 홍보를 도왔다. “너희들 생기부(학교생활기록부)에 적히려고 한 거 아니니?”란 기자의 장난스러운 질문에 학생들은 “우리가 나서 후손에게 미래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라고 답했다. 아이들의 지역 살리기 활동은 전국 일간지 1면의 톱기사로 실렸고, EBS 지식채널e에 방영되기도 했다.

 

도시재생 함께읽길전 단체 사진,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


도시재생 함께읽길전 단체 사진,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

 

시집 제목 설문조사 모습, 시집 출판 전시회


시집 제목 설문조사 모습, 시집 출판 전시회

 

이후에 마을 미술관과 캘리그래피 작가님의 도움으로 출판 전시회가 열리게 되었고, 활동들이 마무리되고 나니 어느새 2021년 새해가 밝았다. 그리고 보수동 책방골목 바로 위에 위치한 혜광고등학교로 학교를 옮기면서 작은 욕심이 생겨났다. 즉흥적으로 이뤄졌던 도시재생 활동을 사전에 계획된 ‘프로젝트’로 진행해 보자는 조금은 당돌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학교의 교장·교감 선생님, 그리고 구청의 담당자 분 모두가 이를 반겨주었고, 지자체와 학교가 뭉쳐 도지새생 교육협약 MOU를 맺고 탄생하게 된 것이 “책방골목 함께읽길” 프로젝트다. 한 학기 동안 보수동 책방골목을 주제로 독서논술 수업이 열렸고, 도시재생 작문, 독서력측정검사, 헌책방 연계 진로독서 활동, 도서관 책 기부 캠페인 등이 진행되었고, 문예 공모전 개최와 더불어 후속편 시집 제작으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재능 있는 학생들이 나서, 보수동 책방골목 최초의 홍보 노래와 뮤직비디오가 탄생했다. 또한 미술 창작 동아리의 합류로 책방골목 미술 전시회도 함께 열리게 되었고, 보이지 않는 도움의 손길이 이어져 보수동 책방골목의 공사장 가림막은 미술 전시회의 작품으로 채워져 벽화 갤러리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기존의 활동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2학기가 되면서, 어떻게 학생들의 노력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공감을 얻으면 좋을지 생각을 확장해 보았다. 그때 눈에 띈 것이 공모전이었다. 당시에 참여 가능한 부산시 주최의 공모전 총 3개에 모두 참여해 보게 되었다. 첫 공모전은 AI·블록체인 공모전이었다. 전공과는 동떨어졌지만 보수동 책방골목과 원도심이 지닌 문화적 가치가 무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참가에 의미를 두고자 했다. 다행히 전문가 멘토와 함께 준비를 할 수 있었고 덕분에 과학적인 부분과 인문학적인 부분을 융합하면서 아이디어를 방학 동안 다듬어 나갔다. 결과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대상’. 그것도 관련 스타트업 기업이나 사내 벤처 동아리팀, 전공자들과 경쟁해 얻은 성과였기에 더욱 믿기지 않았다. 이후 학생들과 함께 참가한 부산시 유튜브 공모전에서 “누군가의 헌책이 당신만의 잇템?!”으로 또다시 대상을 차지하고, 부산시 공공디자인 공모전에서도 공사장 가림막 벽화가 입상을 하면서 보수동 책방골목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수동 책방골목 보존을 위한 시민 포럼과 부산시 주관의 대책 회의가 열린 것이 불과 저번 달의 이야기다.

 

AI·블록체인 공모전 메타버스 수상식 화면, 부산시 유튜브 공모전 대상 화면


AI·블록체인 공모전 메타버스 수상식 화면, 부산시 유튜브 공모전 대상 화면

 

책방골목 시민포럼, 부산광역시교육청 초청 방문


책방골목 시민포럼, 부산광역시교육청 초청 방문

 

하지만 각계각층의 성원과 여러 시민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보수동 책방골목의 재개발은 현재 진행형에 있고 여전히 골목은 존폐 위기에 놓여 있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이 보수동 책방골목의 위기 상황을 모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과연 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책방골목의 작은 기적은 실패인 것일까? 하지만 ‘성공’과 ‘실패’ 그 어떤 말에도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학생들과 함께 그간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함께했던 노력은 누구로부터 평가받기 위한 사업도, 시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꿈과 희망을 가지고 스스로가 좋아서 시작했던 일이고, 한 번도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사회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에 대한 소유가치를 갈구하지만 자연이 진정 아름다운 것은 존재 가치이다. 어떤 대상은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동아리를 사전에 해산했더라면, 공모전이 무모하다고 생각해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기적은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일어남을 명심하고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망설이지 말자. 그리고 결과를 먼저 예단하거나 평가하는 것을 삼가자.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작은 노력 하나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면 모두 똑같이 소중하고 값진 것이며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하자. 보수동 책방골목의 기적을 위한 학생과 시민들의 노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김성일

 

김성일(혜광고등학교 국어교사)

혜광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며 보수동 책방골목 지키기에 관한 청소년 도시재생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책방골목 함께읽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2021 부산광역시 유튜브 콘텐츠 공모전과 부울경 AI 블록체인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는 『보수동 책방골목 와보시집(공저)』, 『보수동 그 거리(공저)』가 있다.
ksi6683@gmail.com
www.instagram.com/busan_culture_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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