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이모저모

Vol.17  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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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아니라면, 이게 가능한 일이야?
- 출판사와 작가, 동네책방과 독자가 이뤄낸 선순환

 

 

 

이영미(편집자이자 작가이자 강사)

 

2020. 12.


 

미국 작가 제임스 미치너가 쓴 『소설』을 읽어 보셨는지? 무려 1993년 ‘열린책들’에서 출간한 오래된 이 소설을 좋아한다. 요즘엔 개정판이 나와 상, 하 두 권 네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각각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책을 읽을 당시 초보 편집자이자 독자였기에, 작가와 비평가의 심정까지 엿볼 수 있어 흥미진진했다. 언젠가 글과 경험이 더 무르익으면 나도 그런 책을 쓸 수 있을까. 2018년에 첫 책 『마녀체력』이 나왔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나를 ‘작가’로 부른다. 그럼에도 내 정체성은 아직 편집자에 가깝다. 25년 넘게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글만 써온 작가와는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책을 둘러싼 이런저런 사람이나 활동, 이슈에 민감하다.

 

코로나19가 창궐한 이후, 출판 업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껏 안착시켜 온 도서정가제를 흔들려는 시도가 감지되었다. 가장 위기의식을 느낀 건 작은 동네책방이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이 되면서 그나마 드나들던 손님마저 확 줄었다. 안 그래도 온라인으로 손쉽게 사려들 판인데, 책값까지 더 싸게 할인해 준다면? 동네책방은 그날로 줄줄이 폐점 선언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콧방귀를 뀌며 말할지도 모르겠다. 책방 문을 닫는 것이, 치킨집이나 동네 슈퍼 망하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경쟁력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찾지 않으면 사라지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모르는 소리 하지 마시라. 지방 구석구석 작은 공간에 둥지를 튼 책방은 책만 파는 곳이 아니다. 주인장이 돈만 벌려고 운영하는 사업도 아니다. 특별한 안목으로 고른 책들만 진열하기에도 책꽂이가 모자란다. 돈 좀 될 만한 문제집이나 학습지 같은 건 눈 비비고 찾아봐도 없다.
동네책방은 지적인 성장을 하고픈 사람들이 모이는 문화 공간이다. 열렬한 엄마들이 마주 앉아 책을 읽고 실천하는 마을 공동체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뒹굴며 책을 읽는 놀이터다. 도서관과 상생하면서 서로의 아쉬운 부분을 채워주는 정겨운 단골 가게다. 강릉부터 부산까지, 서울 강남부터 괴산 시골까지 수십 군데를 돌아봤다. 내 눈으로 보고, 몸으로 직접 경험한 사실이다.

 

편집자로 일할 때, 책을 만들고 팔면서 늘 아쉬움이 남았다. 대형 서점에 광고를 하거나 눈에 띄는 매대에 진열되는 전략 도서는 몇 종밖에 되지 않았다. 기껏 정성들여 만든 나머지 좋은 책들은 그럼 어떻게 알려야 하나. 저자들이라도 좀 더 적극적으로 자기 책을 알리면 좋을 텐데.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닌 이상, 손 놓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저절로 소문이 나는 일은 드물었다. 물론 당시에는 대형 서점의 공간에서 사인회 형식으로 열리는 게 대세이긴 했다. 안타깝게도 잠깐의 화제만 불러일으키는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기 십상이었다. 가끔 지방에 있는 도서관이나 작은 단체로부터 강연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다. 시간과 품이 많이 들면서도 효과는 미미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바쁜 저자한테 무작정 홍보를 부탁하거나 바라는 건 어려웠다. 결국 수많은 책이 출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소리 소문 없이 초판으로 사라져 갔다.


『마녀체력』이 처음 나왔을 땐 세상이 퍽 달라졌다. 지역 곳곳에 실핏줄처럼 파고든 도서관과 동네책방 덕분에 독자를 만날 공간이 많아졌다. 직접 만나지 않고도 SNS를 통해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인터넷 장이 열렸다. 더군다나 편집자 출신 작가로서, 이왕이면 먹고 살면서도 출판 업계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강한 책임 의식이 타올랐다. 남몰래 결심을 했다. 편집자였을 때 작가가 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을 몸소 다 해 보기로. 내 책을 알리는 활동이지만 출판사에 도움이 되고, 독자에게 기쁨을 전하고, 책방도 활발해지는 일을 해 보자고.

 


20군데 책방과 북투어를 이어 나간 ‘달려라 영미’


20군데 책방과 북투어를 이어 나간 ‘달려라 영미’

 

그래서 시작한 것이 ‘동네책방 북투어’였다. 물론 통영에서 ‘봄날의책방’을 함께 운영하는 ‘남해의봄날’ 출판사였기에 가능한 기획이었는지도 모른다. 독자나 편집자로서 일부러 시간 들여 둘러보고 싶은 공간을 작가로 초청받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각 지역을 골고루 안배하여 동네책방 20군데를 골랐다. 혼자 내비게이션을 켠 채 KTX나 고속버스를 타고, 지하철과 택시를 갈아탔다. 도심도 아니요, 변두리 후미진 골목에 숨어 있는 책방을 찾아다녔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3대 토박이에다 소문난 길치로선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여정이었다. 동시에 쉰 넘은 『마녀체력』을 지닌 여성으로선 지금껏 맛보지 못한 흥미로운 도전이었다. 때론 달랑 일곱 명만이 어색해 하며 앉기도 했다. 또 어떤 곳은 30여 명 넘는 엄마 독자들이 열렬히 맞아 주기도 했다.


동네책방에 독자로 참가한 분 중에는 도서관 사서, 선생님이나 학부모, 대기업 사원, 생협 조합원 등등이 섞여 있었나 보다. 조금씩 꾸준하게 입에서 입으로, 또 SNS로 퍼져 나간 소문 덕분일까, 줄줄이 강연 요청이 이어졌다. 단 한 군데도 거절하지 않고 일정을 조정해 가며 달려갔다. 진실을 말하자면, 인세만큼이나 생계에 꽤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눈앞에서 책을 읽은 독자를 만나 공감하고, 예비 독자를 만나 격려하는 자리였다. 작가로서 무얼 더 바라겠는가.

 


일산에 있는 ‘행복한 책방’ 북투어를 마치고


일산에 있는 ‘행복한 책방’ 북투어를 마치고

 

2020년 9월, 코로나19 팬데믹이 휘두르는 채찍은 너 나 할 것 없이 혹독했다. 나 또한 예정되어 있던 모든 강의가 취소되었다. 그 바람에 얌전히 집에 들어앉아 두 번째 책 『마녀엄마』를 마무리했다. 그때 동네책방 주인장들이 도서정가제 개악을 반대하며 청와대 앞에 나가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300여 개의 작은 책방들이 1, 2만 원씩 십시일반 하여 두 신문에 전면 광고를 내보냈다. 그나마 대학로를 꿋꿋이 지키고 있던 오래된 동네책방은 폐업을 선언했다.

 


책방들이 십시일반 하여 내보낸 도서정가제 신문광고


책방들이 십시일반 하여 내보낸 도서정가제 신문광고

 

이 작은 책방들이 하나하나 문을 닫고 사라지면 어떤 나비효과가 벌어질까. 결국 몇몇 온라인서점과 대형서점만 살아남을 것이다. 대중의 입맛에 맞는 책을 내고 서점에 광고하는 대자본 출판사만 명목을 유지할 것이다. 결국 섬세하게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책들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한 채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곧 출판계의 자율과 생존권이 말살되는 뻔한 수순이 아닌가. 겨우 책 한 권 낸 힘없는 작가지만 미약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누구나 하는 동네책방용 리커버 정도로는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고민 끝에 『마녀엄마』를 동네책방부터 우선 배본하는 게 가능한지 의견을 내놓았다. 마침 전국책방네트워크 임원으로 활발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던 남해의봄날 대표도 흔쾌히 시도해 보자는 대답을 해 왔다.


지인들에게 이런 얘기를 전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론칭 초기에 온라인과 대형 서점 판매를 하지 않는다는 건 노출에 치명적일지도 모른다고. 안다.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안다. 평생 책을 만든 편집자가 왜 그걸 모르겠는가. 온라인 서점에 신간이 노출되면 기쁨의 소리를 지르고, 깜깜무소식이면 밥맛까지 떨어졌는데. 그래서 더더욱 작은 동네책방들의 힘겨운 몸짓을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전국의 동네책방에 기획 의도를 적어 공문을 보냈다. 초기에 예약 주문을 해온 책방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뜩이나 코로나로 위축된 데다가 직거래라 책값을 현금으로 먼저 지불해야 하니 경제적 부담이 될 터였다. 따로 동네책방만을 위한 굿즈 ‘2021 마마 다이어리’를 부록으로 붙여서 독려했다.

 


『마녀엄마』는 출간되자마자 동네책방 우선으로 배본되었다.


『마녀엄마』는 출간되자마자 동네책방 우선으로 배본되었다.

 

차츰 『마녀엄마』를 주문하는 책방이 하나둘 늘어갔다. 그렇다 해도 당장 책을 읽고 싶은 독자들이 편하게 구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리는 SNS를 통해, 독자들에게 뻔뻔한 부탁을 했다. 차라리 가까운 동네책방에 가서 책을 주문해 달라고. 그 결과는 ‘남해의봄날’ 정은영 대표의 글로 대신하겠다.

 

 

 

 

SNS를 통해 작가가 적극적으로 동네책방 구매를 독려하자, 찐팬 독자들이 가까운 동네책방에 전화를 걸어 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독자들의 문의가 이어지자 거꾸로 책방들이 출판사로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자들이 급하게 찾아서 연락했어요. 책 좀 보내 주세요!” 웬만한 동네책방은 다 알고 있는데도 처음 들어보는 전국의 책방들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걸 보면서 역시 ‘독자의 힘은 세다’는 걸 실감했다. 처음으로 동네책방에 책 주문을 해 보았다는 이와 덕분에 책방 나들이를 했다며 고맙다는 독자, 주변에 책방이 없어 옆 도시 책방까지 원정 간다는 독자들 덕분에 온라인 판매가 시작된 지금도 새로운 책방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정말 눈물 나는 일이다.

 

 

 

세상에! 나 같으면 어림도 없는 짓이다. 나중에 얼마든지 온라인 서점에서 살 수 있는 책을, 일부러 동네책방까지 사러 간다고? 없으면 주문해 놓고, 다시 사러 간다고? 나 같은 작가가 아무리 동네책방에서 사달라고 부탁했어도, 이런 실천이 말이 되는가? 이 자리를 빌어 독자님들께 머리를 조아려 감사드린다.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은 또다시 벌어졌다. 그저 작은 선의를 베푼 작가의 책을, 이번엔 동네책방이 너도나도 SNS에 홍보하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내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은 『마녀엄마』의 우렁찬 다리가 보이는 연보라색 표지로 뒤덮였다.

 


각 동네책방들이 우후죽순 책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각 동네책방들이 우후죽순 책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그런 은혜를 입었으니, 아무리 엄한 코로나 시국이라도 작가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겠나. 동네책방 주인장들도 만나고 열렬 독자들에 호응하기 위해 “힘내라, 엄마들!”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서울 몇 군데와 통영, 부산, 완주, 순천, 용인, 김포, 울산, 강화, 거기다 이번엔 바다 건너 제주까지 전국을 돌면서 다시 한번 북토크를 하기로 했다. 그러자 강화 논두렁에 자리 잡은 시골 책방 ‘국자와 주걱’에서 ‘온 가족 북스테이’라는 탐나는 상품을 걸고 ‘『마녀엄마』 독후 신촌(村)문예’를 연다나!

 


강화에 있는 ‘국자와 주걱’에서 독자에게 내건 신촌(村)문예


강화에 있는 ‘국자와 주걱’에서 독자에게 내건 신촌(村)문예

 

작가이기 이전에 편집자로 일해 온 사람이라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런 선순환이 결코 쉽게 벌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책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가 없다. 출판사와 작가와 동네책방과 독자가 상생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이다. 그래서 책은 여느 공산품이나 제품과는 다른 것이다. 도서정가제는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동네책방들은 문화 커뮤니티 공간으로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

 

『마녀엄마』가 나온 지 이제 한 달이 되어 간다. 지금은 물론 온라인 서점이나 대형 서점에서도 책을 살 수 있다. 동네책방에 먼저 배본한 책들이 얼마나 팔렸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누구도 지금껏 해 보지 않은 방식을 고안하고 도전해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일부러 동네책방에 들러 책을 사 주는 1천 명의 찐독자만 있다면, 작가로서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겠다. 언제 또 새 책을 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도 기대하세요. 동네책방과 찐독자님들, 더 신명나게 한판 놀아봅시다~

 


다시 전국으로 달려가는 북투어


다시 전국으로 달려가는 북투어. 코로나로 인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영미(편집자이자 작가이자 강사)

『마녀체력』, 『마녀엄마』, 『마감일기』(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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